카일은 생각했다. 다시는 여자랑 말도 섞으면 안 되겠다고.
내가 앞으로 다른 여자들이랑 친하게 지내는 것 같으면 개다, 개! 월월!
“솔직히 말해요. 정말로 아무 사심도 없는 거죠?”
“없습니다. 정말로, 진짜로 없습니다.”
“이유는요.”
“여기 계시는 분들이 백 배, 천 배는 더 예쁘니까요.”
“오… 방금 대답은 마음에 좀 든다, 카일.”
압박 수사에 들어가는 티샤와 엘가, 그리고 이상한 부분에서 만족 중인 황녀.
마지막으로 일단 중립 기어를 넣은 채 상황을 보고 있는 성녀까지.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까지 왔느냐고? 뭐, 당연한 거 아닌가.
제갈소연과 너무 과하게 가까워지는 것 같으니 바로 달려온 거지.
경쟁자가 이 이상 늘어선 안 된다는 게 네 여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여기서 더 늘어나면 경쟁도 경쟁이지만, 균열이 생겨날 수도 있다.
그나마 이 넷이 어느 정도 엮인 부분들이 있어서 친하게 지내고 있는데.
갑작스레 이상한 사람이 끼어버리면 서로가 굉장히 난처해질 가능성이 높다.
“저, 일단 여러분. 좀 진정해 주시겠나요. 아직 손님 분들이 그대로 남아있는데요.”
카일의 말대로, 저 멀리 당황한 눈빛을 하고 있는 이들.
노인을 제외하곤 모두가 갑작스레 등장한 여인들 덕분에 놀란 눈치였다.
“아무튼, 절대 그건 아니라는 거죠?”
“아닙니다. 정말로, 제 상체와 하체를 걸고 맹세합니다.”
진심이 느껴지는 절절한 카일의 맹세에도, 여자들은 여전히 뚱한 표정.
이 때 여태껏 침묵하고 있던 성녀가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온다.
“카일 형제님. 그 말씀, 진짜지요? 믿어도 되는 거지요?”
“그렇고말고요. 성녀님. 정말입니다.”
“형제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을 하신다면 그런 거겠죠. 자매님들. 여러분들도 이제는 그만하셔도 될 것 같아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세 여자들을 둘러보는 성녀.
그에 카일이 믿어줘서 고맙다고 막 한 마디를 하려는데.
다시금 시선을 앞으로 돌린 성녀가 카일의 손을 쥔 손에 슬쩍 힘을 준다.
“다만, 그 말씀이 나중에라도 거짓으로 변하시면 안 됩니다, 형제님. 만에 하나 거짓을 고하시는 순간, 크게 혼이 나실 거예요.”
“….”
처음으로 성녀에게서 다른 누군가 보이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생각했다. 정말로 한 눈 팔았다간 절대 가만 안 두겠구나.
지금은 곱게 말하고 있는 이 사람이, 갑자기 돌변할 수도 있겠구나!
“아시겠죠?”
“명심하겠습니다, 성녀님.”
“기꺼운 대답이네요.”
분명 성녀는 웃고 있는데, 카일은 웃을 수가 없는 상황.
그야말로 손발이 덜덜 떨리는 중인데, 별안간 웃음소리가 들린다.
“허허허허!!”
뒤에서 이 상황을 보고 있던 검선이 너털웃음을 터트린 것.
“영웅은 삼처사첩이 기본이라더니. 이곳도 다를 바가 없는 모양이구려! 허허!”
그쪽은 처랑 첩이 다 정해진 모양인데 여긴 아직 아니라서요.
모두가 공평하게 경쟁 중인데 그게 늘어나는 건 다들 거절인 모양입니다.
카일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린 후 간단하게 소개를 시켜주었다.
여기 있는 여인들 모두가 자신과 연을 맺게 될 이들이라고.
그런데 살짝 경계심이 들어서 이렇게 나서게 된 것 같다고 말이다.
“아… 이해합니다, 소협. 정인이 있는 상태라면 얼마든지 이해하죠.”
다행히 제갈소연은 그런 여자들을 이해하는 눈치였다.
동시에 자신은 정말 아무런 사심이 없다며 재빠르게 민심을 가라앉혔다.
맹 군사의 딸이나 제갈세가의 여식다운 빠른 대응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제갈소연에게서 약간의 흥미라도 느낀 것일까?
가장 먼저 황녀가 슬그머니 다가와선 그녀를 한 번 둘러본다.
“보통 여자인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 모양이네. 정갈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강호에서는 여인도 여인이기 전에 강호인이니까요. 본인 몸 하나 지킬 정도는 된답니다.”
“오호. 카일. 혹시 가능하다면 나, 이 여자랑….”
“안 됩니다.”
“다 들어보고 거절하는 것까지는 되는 거 아니야?”
“아뇨. 황제 폐하께서 손님께 그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황녀가 이럴 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따로 언질까지 준 황제였다.
정말이지, 황제가 현명한 건지 아니면 황녀의 전과가 너무 많은 건지.
진심으로 궁금해지는 카일이었다.
“이보게. 젊은이.”
갑작스레 옆으로 다가온 검선이 카일을 부른다.
그에 카일이 뭐가 필요하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나?”
“부탁이라 하시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별건 아닐세. 그저 젊은이와 한 번 겨뤄보고 싶을 뿐.”
아니, 저기요. 별거 아니라고 하더니 별게 맞는데요?
카일은 검선의 제안에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자신이 알던 검선이라는 칭호가 붙은 인물이면 굉장히 초연한 게 맞지 않나?
설마 다짜고짜 대련을 청할 정도라곤 예상을 하지 못했는데?
“노구의 주책인 것은 잘 알아. 본디 이런 사람이 아닐세. 그런데, 내 앞에 있는 젊은이, 자네. 굉장히 특별한 이가 아닌가. 강호에서 그리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자네 같은 이는 처음 보네.”
이거 난감한데. 아무리 부탁이라지만 이쪽은 ‘황명’을 받은 상태라고요.
손님들을 잘 모시라고 했는데 대뜸 한 판 붙어버리면 그림이 이상해진다.
아무리 존 나센 사람이라고 해도, 일단 황명은 잘 수행하는 척이라도 해줘야지.
‘그냥 황제 폐하도 아니고 장인어른 되실 분인데. 사위가 잘 따라줘야 하는 거 아니겠어?’
꿈틀!-
…물론, 몸 안에 잠들어있는 존 나센 본능이 외치고 있긴 하다.
왜 거절하려고 하냐고. 그냥 부탁이니까 두 눈 딱 감고 싸워도 되지 않냐고.
어쩌면 다시는 없을 기회인데, 다시는 오지 않을 최고의 만찬인데.
여기서 후다닥 낚아채고, 허겁지겁 먹어보는 게 좋지 않겠냐고!
‘…참자. 참아, 카일. 좀 참아봐, 존 나센 본능아.’
황제의 명령만 있었다면 모르는 척 대련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나중에 가서 ‘죄송합니다! 저질러 버렸습니다!’ 하면 되니까.
하지만 더 깊이 따지면 이건 장인어른의 부탁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처남, 황태자도 직접 나서서 동쪽의 손님들을 책임지고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하에 놓였으니 마땅히 신경을 쓰는 게 맞다.
“죄송합니다. 저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받은 명령이 있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냥 이쪽에서 강력히 청했다고 하면 되지 않겠나.”
“그러고 싶어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꾸 유혹하지 마요. 지금도 겨우 참고 있다고.
이것 봐. 이두박근 꿈틀거리는 거. ‘전투야?! 전투냐고!’ 하고 외치고 있다.
여기서 한 번만 더 권하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터질지도 모르겠다.
“그런가. 이 노구가 너무 주책을 부렸던 모양이군.”
안타깝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검선도 그 이상은 요구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곳에 손님으로서 왔다는 걸 확실히 자각하고 있는 모양.
그에 카일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동시에, 살짝 아쉽기도 하다.
아주 조금은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계속 부탁해서, 거절할 수 없게.
그런 식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하고 거하게 한 판 할 생각이었다.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대신!’
카일은 이 노인장에게. 아니, 사실은 겉만 늙었지 누구보다도 더 강한 이 존재에게.
조금만 기다리면 진짜 최고의 강자와 만날 것임을 알려주기로 했다.
“참고로, 그 봉을 던지신 제 아버지는, 이곳에서 최강이십니다.”
“호오.”
순간 검선의 눈동자에 불길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강자로서 지닐 수밖에 없는, 꼭 한 번 싸워보고 싶다는 마음이 인 것.
아무리 검선이라고 해도. 세속에서 벗어나 이젠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어도.
검을 들고서 휘두르며 강자지존의 세상에서 살던 이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거, 꽤나 기대가 되는군.”
“이런 말씀까지 하고 싶진 않습니다만, 긴장 좀 하셔야 할 겁니다.”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혹시나 검선이 방심하면 안 되니까.
뭐, 상대를 앞에 두고 방심 따위나 하는 인물이었다면 검선 호칭도 없었을 테지만.
그래도 시작부터 최선을 다했으면 하는 게 카일의 바람이었다.
“허허허. 허풍을 떨 인물이 전혀 아님에도, 그 정도라. 궁금하군. 정말이지, 너무 궁금해.”
검선은 그리 말하더니 대뜸 제갈소연을 향해 외쳤다.
이곳에서 볼일 다 봤으면 얼른 이동하자고.
하루라도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자신이 못 견디겠다고.
‘검선’ 이라는 이름에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짓.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곳 최강자가 떡하니 있다는데.
어찌 강자로서 그걸 조용히 기다릴 수 있겠는가!
“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일은 속으로 아주 뿌듯했다.
이거 의도치 않게 아버지께 효도 선물을 보낸 느낌이었다.
*
요 근래 존 나센 남작가는 아주 즐거운 하루가 계속되고 있었다.
여태까지 보지도, 겪지도 못했던 온갖 기구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
“이거 참 마음에 드는군요. 예전에는 과부하를 주려면 무게를 끝까지 달아야 했는데.”
“이런 게 가능하다면 마법이라는 거,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죽하면 그런 말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
덕분에 기구들을 가져온 리어와 레아는 굉장히 뿌듯한 얼굴이었다.
“잘 다녀온 것 같네요. 그렇지 않나요, 오라버니?”
“조만간 한 번 더 다녀와야 할 듯 싶다.”
바다 건너 사람들이 듣는다면 기절초풍을 할 이야기였다.
물론 그건 전혀 관심도 없는 존 나센 남매는 하하호호 웃을 뿐이었지만.
“도련님.”
이때, 닐 영감이 리어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손님이 왔다고 합니다.”
“손님, 말입니까?”
“예. 그런데… 그들 사이에, 굉장한 분이 한 분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