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302화 (302/318)

동쪽 그 너머에서 왔다는 말을 들은 순간.

카일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단 하나였다.

‘무협.’

얼마 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래, 확실히 들었다.

유목 부족들이 지내는 드넓은 동쪽 초원 지대.

그 너머는 바다가 아닌,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하고 있다고.

‘미치겠네. 바다 건너 마도공학에 이어서, 이제는 무협이라고?’

대체 세계관이 어디까지 확장이 되어 있는 건데.

이거 배경이 로맨스 판타지 아니었어? 거기에 웬 무협이니 마도공학?

어이가 없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릴 것만 같다.

차마 황태자 앞에서 웃을 수는 없어서, 카일은 그냥 속으로 웃고 말았다.

“일단 같이 가지. 보니까 자네. 정확히는 존 나센과 연관이 있는 것 같으니까.”

“저희 가문이 말입니까?”

“그렇다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다. 갑자기 왜 존 나센이 언급되는 걸까.

혹시 유목 부족들이 말하는 그 ‘용’ 인지 뭔지 하는 선조가 그곳에도 갔었나?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카일은 ‘그럴 수도 있겠어.’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애당초 동쪽 평원까지 갔다면 그 너머로 갔을 확률도 있다고 봐야 한다.

심지어 그곳은 마법 따위는 없는, 순수한 무의 결정체인 내공이 있는 세계.

그런 곳에 존 나센의 선조가 갔다면 분명 큰 영향을 주었을 터!

‘…아니, 잠깐. 그런데 우리 가문은 신체 단련을 최고로 여기잖아. 그런데 무협은 신체도 신체이지만 결국 메인이 되는 건 내공 아닌가? 체내의 단련이라고 할 수 있는 거.’

무협에서의 내공이라 함은, 이곳 세상의 마나와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존 나센은 그 마나를 딱히 좋게 봐주지 않는다.

막 배척하는 건 아니지만 어지간해선 없는 게 낫다, 라는 주의라고 해야 할까?

한데, 그런 존 나센의 선조 되는 존재가 무협 세상에?

아무리 생각해도 가서 대립을 하면 했지, 섞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카일? 뭐하는 겐가.”

“아아. 송구합니다, 전하. 바로 가겠습니다.”

일단 자세한 건, 그 동쪽에서 왔다는 손님들을 만나본 후에 생각해야 할 듯 싶다.

*

“….”

대체 뭐야, 저것들? 뭔데 저리 이상하냐고.

황녀는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곳 세상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면, 풍겨지는 기운 자체가 다르다고 할 것이다.

가장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여자나, 그 뒤에 있는 젊은 호위들이나.

모두가 전혀 가늠할 수 없는 마나를 품은 채 앉아있다.

이곳 검사들이나 기사들의 연공법도 아니고, 마법사들의 마나 제어도 아니다.

정체를 알 수가 없는 또 다른 방법으로 연마라도 했다는 건가.

분명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실력자임은 맞는데, 그 수준을 가늠할 수가 없다.

어찌 저리 꼭꼭 숨겼는지, 읽어내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다.

혹시 너무 약해서 읽지 못하는 건가? 싶다가도.

은연중에 저들이 내뱉는 호흡의 결을 느껴보면 그건 또 아니다.

‘수준급 이상의 강자.’

저들이 이곳 제국의 평범한 강자들이었다면 바로 대련을 청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일단, 저들에 대해서 읽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금은 보조교사 노릇 때문에 너무 피곤한 상태이기도 했다.

‘아쉽지만, 나중에. 지금은 그냥 쉬고 싶어.’

한편, 황제는 손님들을 맞이하면서 슬쩍 황녀를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당장 앞으로 나서서 대련을 청하고 싶다고 할 제 딸이다.

강자만 보면 매번 그래서, 자신이고 황태자고 몇 번이나 난처했었다.

제발 좀 적당히 하라고 해도 잠시뿐. 왜 그렇게 못 싸워서 안달이었는지.

‘녀석. 그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절제할 줄도 아는구나. 아니, 배운 것이려나.’

카일 존 나센, 그 청년을 만나고 나서부터 갑자기 확 바뀌었다.

여전히 강자와 겨루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전처럼 무분별하게 하지는 않는다.

예전에도 저랬다면 참 좋았을 텐데. 이제라도 바뀐 게 다행이다.

“그래. 어찌하여 이런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여기까지 당도한 것인가?”

황제의 물음에 옆에 있던 통역가들이 그 내용을 몇 번 거친다.

제국어에서 유목 부족들의 언어로, 그리고 다시 거기서 동쪽 세상의 언어로.

마침내 황제의 말이 전해지자 가장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검은 머리의 여인.

자신을 구해준 한 물건의 시작을 찾아, 흐르고 또 흘러 마침내 이곳까지 닿게 된.

제갈소연은 지극히 공손한 어조로 황제의 물음에 답했다.

“먼저, 황제 폐하의 성대한 대접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리 말한 제갈소연은, 미리 뒤쪽에 준비했던 천 꾸러미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실은, 이 신물의 근원을 찾아 이 먼 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신물이라? 그쪽 세상의 신물에 대한 근원을 왜 여기서 찾는 건가.”

충분히 의문이 들 만한 부분이다. 각자 세상 사이의 거리가 얼마인데.

그 신물에 대한 근원을 몇 달은 족히 걸리는 이곳에 와서 찾는 것인지.

황제와 주변 신하들, 그리고 10강들이 가만히 제갈소연을 바라본다.

“실은, 바로 이 물건 덕분에….”

제갈소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의 세상에서 각자의 뜻으로 인해 힘을 겨루는 세 개의 세력.

그 사이에서 함정을 파고 그로 인해 전쟁을 일으키려던 한 곳.

거기에 휘말려 고초를 겪을 뻔 했는데, 이 신물이 그걸 막아주었다고 말이다.

“대단한 일이군.”

사실인지 아니면 과장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일단 황제는 적당하게 맞장구를 쳐주며 가만히 제갈소연을 바라보았다.

어디 한 번, 그 신물을 보자는 무언의 뜻을 여인 또한 알아차렸다.

고개를 끄덕거린 제갈소연은 소중히 감싸고 있던 신물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천 사이로 은은한 빛깔을 내뿜는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이것이옵니다, 황제 폐하.”

매우 소중하고, 또 귀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레 그걸 쓸어내는 제갈소연.

뒤에 있던 호위들 역시 애써 티는 내지 않지만, 그 물건을 눈에 확실히 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때, 그 물건을 멍하니 바라보던 황제가 입을 연다.

아주 조금은 황당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 한 채로.

“그 물건이 하늘을 가르고, 푸른 섬광을 내뿜으며 나타났다고.”

“그렇사옵니다, 황제 폐하.”

“덕분에 그대를 해하려던 자들이 일거에 쓸려나갔고 말이지.”

“정확하시옵니다.”

“….”

성실히 대답하던 제갈소연은 문득,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그녀는 슬쩍 고개를 돌려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양옆에 도열해있던 신하들의 표정이 조금씩 묘하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이곳 세상의 고수들로 보이는 자들 또한 비슷한 반응.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제갈소연은 최대한 조심스레 황제를 살짝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아래로 내리고, 속으로 탄식을 흘렸다.

다들 반응이 이상하다. 당최 알 수가 없는 반응이다.

궁금해 하거나, 혹은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 나올 줄 알았는데.

지금 저들이 보이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닌 ‘난처함’ 이었던 것.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슬그머니 입술을 떼려는 순간.

“황제 폐하. 황태자와 카일 존 나센이 들었사옵니다.”

“…안으로 들이거라.”

“예, 폐하.”

잠깐의 소란스러움과 함께, 두 명의 인기척이 뒤쪽에서 추가되었다.

*

‘진짜였구나. 무협 세계가 진짜였어!’

홀에 들어서는 순간,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이들을 본 순간.

카일은 말로만 무협이 아닌 ‘진짜’ 무협에서 왔음을 직감했다.

일단 복장부터 이곳과는 전혀 다르다. 저건 누가 봐도 동양풍의 옷이다.

이곳 사람들이야 동양이니 서양이니 개념이 없으니 전혀 모를 테지만.

카일의 상식에서는 저게 어느 쪽에서 기원했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거기에 슬쩍 보니 생김새도 이곳 사람들과는 다르다.

동쪽에서 만났던 유목 부족들도 대부분은 이쪽과 생김새가 비슷했었다.

그들 말에 따르면, 더 동쪽으로 가면 다르게 생긴 부족들이 있었다고 했던가?

아무래도 그쪽이 경계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 카일은 그 경계 너머의 세상을 볼 수 있었다.

‘대체 작가는 어떤 대통합 사회를 꿈꾸며 이런 걸 만든 걸까.’

비록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지만, 그래도 언젠간 물어보자며.

그렇게 생각을 마친 카일은 슬그머니 황제의 앞으로 다가갔다.

“폐하를 알현하나이다.”

“어서 오게, 카일. 아카데미 생활로 바쁠 터인데 노고가 많아.”

“전혀 그렇지 않사옵니다. 부르신다면, 언제든 달려올 따름입니다.”

사위니까 당연히 그래야죠, 라는 뒷말은 일단 넣어두었다.

사적인 자리라면 한 번 용기내서 그렇게 말이라도 할 텐데.

지금은 신하들과 10강들까지 있는 자리이지 않은가.

카일은 자세를 바로 하곤 옆쪽에 있는 ‘강호인’ 들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진짜 무협 세계관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이미지다.

“카일 존 나센.”

“예, 폐하.”

“부족들이 살고 있는 그 너머에서, 손님들이 찾아왔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왜 이 먼 곳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는지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하더구나.”

황제는 몸소 카일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위기에 빠진 이들을 마치 하늘께서 구하시듯.

단 한 번의 섬광으로 악인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고.

거기까지 들은 카일은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황제가 해준 이야기는 그냥 정말 보통의 이야기와 다를 게 없었으니까.

문제는.

“그리고 바로 저게, 그 이유가 된 물건이니라.”

황제의 손짓에 따라 카일은 고개를 돌렸다.

굉장히 값비싸 보이는 비단에 소중하게 들어가있는 물건.

꽤나 기다란 것이었는지 비단 길이도 만만치 않다.

저 정도의 비단이라면 보통 값이 아닐 텐데, 대체 어떤 귀한 것이기에 저런….

“어.”

눈을 껌뻑거리던 카일은 다시 한 번 그것을 확인했다.

혹시 자신이 잘못 본 건가 싶어서 그런 것이었는데….

‘잘못 보기는 개뿔.’

확실히, 아주 확실히 본 것이었다.

저들이 가지고 온 그 신물은, 다름 아닌 존 나센 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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