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300화 (300/318)

이상하네. 왜 작년보다 더 바빠진 것 같지?

작년은 신입생이라는 위치에, 아직 존 나센에 대한 경계심도 많았다.

해서 자신은 그 둘을 모두 소화해내기 위해 나름 열심히 임했었다.

제국 내에 사고 치지 않는 존 나센의 막내아들로 보이기 위해서!

덤으로 초창기에는 원작의 흐름인지 뭔지를 위해 노력도 했었다.

물론 눈치는 국밥에 말아서 아주 시원하게 말아 처먹은 두 남자 때문에 패스.

오히려 어쩌다 보니 여인들과 아주 제대로 엮어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그 이후로는 그 여인들과 지내느라 또 은근히 바빴다.

거기까지만 해서 끝이었다면, 나름 보람찬 1년이었을 거다.

결과적으로 레아처럼 1학년 마치기도 전에 방출 당하는 일도 없었고.

제국의 존 나센에 대한 경계는 이제 호감을 넘어 신뢰로 돌아선 지 오래이며.

반대로 자신의 고향도 제국과 조금 더 가까워지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문제는 바로 거기서 시작되었다.

제국과 존 나센, 이 둘의 접점이자 다리 역할은 다름 아닌 카일 자신.

그 덕분에 이런저런 일에 거의 반강제로 나서야만 했다.

이를테면 제국이 신설한 보건성의 임시 고문.

아니, 이제는 정식으로 고문이 되어서 일주일에 한 번 이상 회의에 참석한다던가.

그 소식을 고향에 전하며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한다던가 말이다.

‘덕분에 할 게 더 생겼다고! 내 팔자야!’

분명 신분은 아카데미 학생인데 다른 몇 개가 더 있는 느낌이다.

예로 들어서 단련 동아리 회장이라던가, 보건성 외부 초청 고문이라던가.

이럴 바에 그냥 제국 공무원 자리 하나 얻어서 있는 게 나을 정도다.

‘최소한 급여는 받으면서 일한다는 거라도 있잖아.’

그나마 위안을 얻자면 엘가도, 티샤도, 황녀도, 하다못해 성녀도 바쁘다는 것?

엘가야 학업에 대공가 업무까지 있으니 당연히 바쁠 수밖에 없고.

아주 조금 여유가 생겼다곤 하지만 여전히 연구에 허우적거리는 티샤하며.

황녀는 보조교사의 거대한 업무량에 그녀답지 않게 헥헥거리고 있다.

차기 성녀와 만나 이런저런 교육을 해주는 성녀도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원래 사람이란 게 남 바쁜 것보다 내가 바쁜 게 더 피곤한 법이다.

‘이제 와서 관두겠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모양새가 빠지는 건 둘째 치고 다른 부분이 문제다.

방금 전 나왔던, 카일이 존 나센과 제국의 접점 역할을 한다는 것.

그 상황에서 카일이 갑자기 ‘나 이제 하던 일 안 할랍니다.’ 라고 하면?

제국 입장에서는 존 나센 내부에서 무슨 다른 결정이 났나? 싶고.

반대로 존 나센에선 제국이 카일한테 뭐 섭섭하게 했나? 하고 생각할 거다.

공고히 다져둔 두 곳의 신뢰를 본인 손으로 무너트릴 수는 없는 법이다.

거기에 외부에서의 일만이 아니라, 카일 본인 내부의 일도 늘었다.

‘하다하다 운동에 이어서 공부까지 신경을 써야 할 줄은 몰랐다고!’

여인들의 경쟁에 ‘학업 성취도’ 부분이 추가되었다.

덕분에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학업에 매진하고 있는데.

그 부분이 또 알게 모르게 카일에게도 은근한 압박이 되었다.

아니,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운동에, 공부에 다 하고 있는데.

그 연인이라는 자신이 하위권 성적을 가질 수는 없지 않은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게 자식 앞에서 바보 취급 당하는 거라고 했어.’

아카데미 성적표? 우와! 엄마 1등하셨구나! 아빠는 뒤에서 세어보는 게 더 빠른데!

엄마는 똑똑했는데 아빠는 똑똑하지 않았다 보네요!

어쩐지, 내가 머리가 나쁜 건 엄마가 아니라 아빠를 닮아서구나!

라는 미래를 상상하자니 그야말로 비참함 그 자체다.

언젠가 부모가 된다면 절대 사절하고 싶은 내용이라 할 수 있었다.

어째 2학년은 여러 의미로 참 길고 힘든 시간이 되겠구나.

카일은 그리 생각하며 들고 있던 바벨을 내려놓았다.

쿠우우웅!-

천지가 진동하며 당장이라도 건물이 무너질 듯 흔들린다.

“히익!”

“으억!”

이제 막 실내 연무장이라는 걸 구경하던 신입생들이 겁을 집어먹는다.

그 중 몇몇은 아예 바깥으로 뛰쳐나갈 준비까지 하고 있는 상황.

여기서 누군가 ‘도망쳐!’ 라고 외치는 순간 대탈출을 시작할 기세였다.

“회장! 거 땅 데드는 좀 주의해서 합시다!”

“맞아요. 중량 높은 거는 자랑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하지만 기존 학생들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되레 카일에게 각자 한 소리씩 하면서 본인들 단련에 열중한다.

여기서 더 놀라운 점 하나.

“흠흠. 미안합니다.”

시끄럽다! 하고 당장 손에 들고 있던 봉을 휘두를 것 같은데.

보고만 있어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엄청난 거구를 지녔음에도.

빠르게 손을 들고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카일이었다.

‘사과를 한다고?! 사망을 시켜주는 게 아니라?!’

‘와아… 선배들, 정말 대단하신 분들이구나.’

덕분에 실내 단련장을 방문한 신입생들만 더 황당한 기색을 짓고 만다.

저기 서있는 괴물 같은 남자, 아니 남자 같은 괴물인가? 아무튼.

저 선배한테 저렇게 말하는 것도 기겁을 할 정도로 대단한데.

카일이 저기서 바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할 줄이야.

“땅 데드가 안 되는 것도 아닌데 너무하네요. 왜 우리 회장 기를 죽이고 그래요?”

이때, 옆에서 얌전히 운동을 하던 붉은 머리의 여인이 슬쩍 나선다.

그에 신입생들은. 특히 남학생들은 ‘헉!’ 하고 숨을 한 번 들이마셔야만 했다.

아름다움에서 한 번, 그리고 그녀의 정체에서 한 번 놀란다.

저 타는 듯한 붉은 머리는 리토리오 대공가의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현재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리토리오의 사람은 딱 한 명.

“저는 괜찮습니다, 엘가 님.”

“내가 안 괜찮아요.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어차피 그러라고 황제 폐하와 아버지께서 이 실내 단련장의 모든 권한을 주신 건데요!”

뭐지. 싸우는 건가? 이거 분위기 이상해지는 거 아니야?

그런 걱정을 하며 신입생들이 살살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카일도, 엘가도, 그리고 타박을 한 다른 학생들도.

이건 그냥 장난삼아 한 번 내던지는 말임을 다 알고 있었다.

저쪽은 카일과 이제 제법 친해져서 가볍게 장난을 건 것이고.

엘가는 그걸 알고서 일부러 제 연인 편을 들며 은근히 과시를 한 것.

모두가 각자 신입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행동들을 한 거다.

“…끝.”

그러는 사이, 마저 루틴을 다 돌린 카일이 후우! 호흡을 고른다.

그에 맞춰 공격적으로 기세를 뽐내는 근육들이 씰룩거린다.

“어서 와요, 신입생 여러분. 실내 단련장에 온 걸 환영합니다.”

“여, 영광입니다. 선배님.”

딱히 영광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지만, 그렇게 대답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저 손에 반으로 접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학생들이 그렇게 말하자 카일은 가벼운 미소를 한 번 지었다.

“어….”

순간 여학생들의 시선이 묘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옷을 입고 있긴 하지만 그것으론 미처 가릴 수 없는 튼실한 몸.

덤으로 개연성을 지닌 외모에 미소가 떠오르자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니 야수 같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전혀 아니었던 거다.

‘이것들이?’

절대 안 돼. 이미 넷으로도 포화 상태라고. 더는 못 늘려! 더 허락도 못 해!

라고 생각하며 엘가는 조금 빠르게 횟수를 채운 후 카일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마치 보라는 듯 카일과 팔짱을 끼고서 신입생들을 바라본다.

마치 ‘이 남자는 이미 임자가 있으니 허튼 생각 말라.’ 고 말하듯이.

“단련 동아리에 대해서는 학생회장이 다 설명했죠?”

“네. 어느 정도는 들었습니다.”

“그러면 더 이야기할 건 없겠네요. 자신이 있거나, 혹은 조금 더 강해지고 싶다는 사람은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하지만 다른 무언가를 노리고 오면 서로 실망할 테니 조심하고요.”

실망한다, 부분에서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리는 신입생들.

‘실망시키면 사망처리 해주겠다.’ 라는 느낌이 확 드는 것 같다.

“그리고 단련 동아리 소속이 아니어도 실내 단련장은 출입 가능합니다. 혹 자신이 너무 약한데, 과연 와도 될까. 하는 고민을 한다면, 그러지 말라고 미리 말해둘게요. 여기는 강한 사람들을 위한 곳이 아닌 노력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확실히 그래 보인다. 당장 운동을 하고 있는 이들만 봐도 그렇다.

몇 명은 카일보다는 부족하지만 어찌 되었든 근육이 빠방한데.

또 몇은 과장 조금 보태서 멀대 같이 생긴 이들, 혹은 조금 과하게 살이 붙은 이도 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공통점은 오직 한 가지.

모두가 남들의 시선을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땀을 흘린다는 것.

바깥의 사정은 모두 잊고 지금 이 순간의 과부하만 느끼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 선배님.”

신입생 중에서 다른 학생들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학생이 손을 든다.

“정말로, 아무나 와도 되는 겁니까?”

그 말에 카일은 속으로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남들보다 왜소한 것은 어릴 적부터 굉장한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그게 무시에서 그러했든, 아니면 동정심에서 시작되었든.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측은한 마음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에 필요한 건 동정이 아니라 평범하게 대해주는 것이다.

“관두지 않고, 딴 짓 하지 않고, 오로지 단련에만 임할 수 있다면요.”

“아. 알겠습니다.”

부디 꼭 이곳에 와서 몸도 마음도 강해졌으면 한다.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해도 괜찮다. ‘나도 할 수 있다.’ 정도면 충분하다.

“카일. 슬슬 강의 들으러 가야 해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나요?”

“네. 첫날부터 바로 강의를 하실 거라고 했잖아요.”

“거 참. 교수님도 너무하시네요. 첫날에는 원래 일찍 끝내는 게 암묵적인 룰 아닌가요?”

“아니라는 분도 계시니까요. 어쩔 수 없죠.”

신입생들을 뒤로한 채 엘가와 함께 단련장을 나선다.

“….”

“….”

그 모습을 신입생들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여학생들은 아카데미에서 카일 같은 남자친구를 만났으면 하는 눈치고.

반대로 남학생들은 카일처럼 되어서 엘가 같은 상대를 만나는 꿈을 꾸는 중이었다.

다만, 여기서 그들이 놓친 한 가지.

카일도 엘가도, 모두 존 나센 남작의 인정을 받은 이들이라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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