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296화 (296/318)

교단의 순례자들은 너무 빠르지도 않게, 하지만 너무 느리지도 않게.

적당한 속도를 유지한 채로 계속해서 동쪽으로 나아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감히 꿈도 못 꾸던 일들이다.

이렇게 걷는 건 고사하고 말을 타는 것조차 힘겨워했었다.

당연히 먼 곳까지 순례길을 떠나는 것은 불가능했고 말이다.

‘마차가 없다면, 아니 이동 마법진이 없다면 아무 곳도 갈 수가 없었던 때가 있었지.’

‘그 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어이가 없군. 신이시여, 부디 경솔했던 과거의 저를 용서하소서.’

대체 왜 그리 지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그 당시만 해도 그게 좋고 또 편한 것인 줄 알았다.

실상은 나태가 계속해서 마음을 갉아먹는 건 줄도 모르고 말이다.

떠올리기만 해도 너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해지는 과거.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 몸을 편히 둔 채 신에 대한 기도만 올리고 있었다.

이미 나태해져버린 몸뚱이에 아무리 신실함이 깃든다고 한들.

얼마 가지 않아서 힘없이 무너질 모래성인 걸 전혀 눈치 채지 못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남자. 카일 존 나센이 교단에 나타났다.

성녀와 함께 잠시 교단을 둘러보러 왔다는 그는 교단에 오자마자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성호를 한 번 그은 후 이렇게 말했다.

“나태함이 가득하니, 어찌 이곳을 신께 기도를 드리는 성스러운 곳이라고 부르겠습니까.”

물론 카일이 실제로 그리 말했던 적은 결코 없다.

본인에게 물어보면 ‘그냥 운동 좀 가르치고 싶은데요?’ 라고 말한 게 전부라고 할 거다.

하지만 카일이 뭐라고 말했든, 결국에는 그 결과가 가장 우선이다.

그가 말하니 교황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대주교들이 동의한 게 더 중요하다.

의견을 내놓자 모두가 자신들의 오만함과 나태에 대해서 깨달았다.

처음에는 당연하게도, 갑작스러운 변화에 모두가 힘들어했다.

너무 오랫동안 나태에 빠져있어서, 그게 잘못된 건 줄도 모르고.

그저 몸이 편하니 애써 모른 체 하며 지내왔던 게 이유였다.

“몸의 고통은 잠깐이나, 그 고통을 이겨내고 되찾은 건강한 신체에 깃드는 마음은 영원할 겁니다. 왜 과거 교단의 사제 분들이 순례길을. 그 힘든 고행을 하셨겠습니까. 육체의 굳건함이 곧 마음의 신실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대주교들은 물론이고 교황에, 심지어 성녀까지.

모두가 앞장서서 모범을 보이니 사제들도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자신들이 왜 교단에 왔는가. 신의 이름으로, 그 분의 자애로운 뜻을 행하기 위함이다.

그 반대편에 서서 그 분의 이름을, 뜻을 더럽힐 수는 없는 일이다.

본인 하나로 인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수 있다면 그리 하고 말리라.

“형제자매 여러분. 영광스러운 그 분의 이름을 부르며, 한 세트만 더 합시다.”

아아. 우리는 여태껏 신의 뜻에 정면으로 반하면서.

그 신의 이름을 찾고 있는, 너무나도 어리석은 자들이었구나!

어찌 몸뚱이를 지옥에 두고서 신의 품을 갈구하고 있었단 말인가!

이후로 사제들은. 아니, 교단 전체가 완전히 변했다.

육체 단련은 단순히 성기사들만의 의무가 아니게 되었다.

오히려 사제라면 성기사보다도 더더욱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혹 조금이라도 나태함이 생겨나는 일을 한다면, 무서운 신의 철퇴… 가 아닌.

그 나태함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는 무한 반복 루틴이 기다리고 있었다.

악한 마음은 신실하지 못한 마음에서 비롯되고.

신실하지 못한 마음은 건강하지 못한 몸에서 나오며.

건강하지 않은 몸은 결국 나태함에서 나오게 된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하루라도 그 나태함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신이시여! 혹 우리들이 그 간악한 유혹에 빠져 갈등하고 있을 때.

당신의 봉과 원판으로서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멈추시오! 모두 정지!”

앞쪽에서 다가온 한 무리의 병사들이 사제들을 막아 선다.

저들의 복장이나 행색을 보아하니 동쪽 국경을 맡는 정찰대인 듯 했다.

“교단에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형제님들.”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어디라고 정확히 말씀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애당초 목적지를 정해 두지는 않았으니까요.”

굉장히 종교적인 대답에 순간이었지만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가 당황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곧 헛기침을 한 번 하곤 제 의무를 다하기로 한다.

“이 너머로 가시면 제국 국경 너머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동쪽의 유목 부족들이 우리 제국에게 굴복했다곤 하나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저곳은 하나의 통일된 국가가 아닌,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부족들이 있습니다.”

어떤 부족은 제국과 무조건적인 평화를 아주 강력하게 원하고 있고.

또 다른 부족은 그저 그런 마음을 지니고서 적당히 구색만 맞추려 할 수도 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래도 모든 부족들이 제국을 적대하고 있지는 않다는 거다.

혹 그런 일이 벌어졌다간 제국군이 들이닥치는 것… 이 문제가 아니라.

결과에 복종하지 못한다는, 그런 아쉬움을 표하며 북쪽에서 존 나센이 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동쪽은 여전히 제국에 비해 안전하지 못하다.

그 이유는 부족만이 전부가 아닌 곳이기에, 부족에 속하지 않는 자들도 있기에.

그리고 그 자들은 법도, 규칙도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기에 그렇다.

“무엇보다 저곳은 치안이 좋지 않습니다. 제국을 생각하시고 가시면 안 됩니다. 도적들이 있을 수도 있고, 그 도적들은 교단의 분들이라고 해서 잘 대해주지도 않을 겁니다.”

“사제 여러분. 차라리 제국 곳곳을 돌며 다른 분들을 만나 뵙는 게 어떨지요?”

정찰대 소속 병사들이 걱정하는 투로 그렇게 말한다.

교단의 사제들에 대한 평판은 굉장히 좋은 편에 속한다.

그 사람들이 위험한 곳으로 갔다가 무슨 봉변이라도 당한다면.

병사들 입장에선 설령 제 탓이 아니어도 굉장히 찝찝할 것이다.

“괜찮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이미 그런 각오까지 하고 왔답니다.”

하지만 사제들은 그런 병사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더 넓은 세상,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또 겪어보며.

와중에 신의 뜻을 알게 되고 신의 말씀을 전할 수 있으면 된다고.

그리 말하면서 앞으로 더 나아가겠음을 천명하고 나섰다.

사제들이 이리 나서니 병사들도 더는 그 앞길을 막아설 수 없다.

하여 이들은 제국에 굉장히 유한 분위기를 지닌 부족들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그리로 피하면 될 것이라고 알려주면서.

“사제님들. 부디 순례길에 아무 사고도 없이, 무사히 돌아오시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형제님들. 형제님들에게도 신의 가호가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정찰대와도 작별한 후, 마침내 사제들은 제국의 국경을 넘어섰다.

곧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제국에선 보기 힘들었던 광활한 들판.

작물들이 자라나는 곡창 지대가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초원뿐인 곳이었다.

조금만 나아가도 민가라는 게 보였던 제국과는 아예 달랐다.

한 시간, 두 시간, 몇 시간을 걸어 나가도 민가는커녕 사람조차 없다.

새로운 세상임을 새삼 실감하며 사제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려는 찰나.

두두두!-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유목 부족민들이 나타났다.

사제들은 그들의 등장에 긴장을 하면서도, 과하게 경직된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이미 제국과 평화 조약까지 맺었으니 큰 문제는 없을 터.

다만 걱정인 게 있다면 언어 부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국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한데, 그런 사제들의 걱정을 앞에 선 유목 부족원이 바로 없애주었다.

너무나 유창한 제국어. 덕분에 사제들은 살짝 놀란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어, 예.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신의 뜻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아아. 제국에 있다는 그 교단의 사람들인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것보다 제국어가 굉장히 유창하십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사실 이게 우리 부족에선 필수가 되어서요. 용의 가르침을 하나라도 더 이해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용의 가르침? 그게 무슨 말이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제들.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던 다른 부족원들이 갑자기 무슨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제국어를 구사하던 이가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말했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사제 여러분. 우리 부족으로 초대를 하고 싶습니다만.”

“여러분들의 마을에 초대 말입니까?”

“네. 제국의 교단에 대해서 더 알고 싶습니다. 그 신이라는 존재의 말씀이 어떠한지, 예전부터 조금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신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할 일이다.

바로 그를 위해서 자신들이 이 먼 곳까지 온 게 아니었던가.

다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고민되는 게 있다면.

자신들의 목적지는 이곳 동쪽 평원이 아닌 그 너머였다.

여기서 시간을 너무 지체하기엔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또 우리 전사들이 말하기를, 여러분들에게서 무언가 익숙한 것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익숙한 것,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제국의 손님 여러분.”

“익숙한 것이라 하시면 정확히 어떤 말씀을 하시는 건지요?”

사제들의 질문에 남자가 뒤에 있던 제 동료들에게 자신들의 언어로 질문을 전달한다.

대체 어느 것에서 어떤 익숙함을 느꼈기에 그러는 것이냐고.

그러자 전사들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사제들을 가리켰다가 자신들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팔, 어깨, 종아리, 허벅지라고 할 수 있었다.

“여러분들의 그 균형 잡힌 육체에서 그 분들의. 용의 느낌이 강하게 난다고 합니다.”

“용이라고 하신다면 어떤….”

“제국의 그 분들. 존 나센, 이라고 했었나요. 그 분들을 우리 부족들은 용이라고 부릅니다.”

“어, 아. 아아아!”

전사들의 그 말에, 사제들은 비로소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동시에 그들 또한 보았다.

분명 처음 보는 이들인데, 심지어 제국 사람들도 아닌데.

저들의 육체는 묘하게 자신들과 비슷한 단련을 겪은 느낌이 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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