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290화 (290/318)

다른 이들은 아직 단잠에 빠져있을 새벽 시간.

일찌감치 나갈 준비를 마친 청년이 방을 나선다.

“후우.”

역시 새벽 공기는 항상 청량하고 또 상쾌하다고.

청년의 밝은 표정에서 그런 속내가 여과 없이 드러난다.

아직 겨울이다. 봄이 오려면 멀었다.

때문에 추울 법도 한데, 청년은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오늘 날씨는 꽤 포근하네.’ 라고 중얼거리기까지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청년의 고향은, 이까짓 추위는 추위도 아닌 곳이니.

제국민들이 혹한이라고 부를 정도는 되어야 ‘아, 겨울이 왔구나.’ 할 정도다.

우둑!- 우드득!-

가볍게 몸을 한 번 풀 때마다 뼈와 근육들이 기지개를 켠다.

어지간한 기사 정도는 한 손으로 접어버릴 정도로 살벌한 기운이 뿜어진다.

오늘은 일정이 좀 많다. 그러니까 원래 하던 만큼만 하자.

청년이 그리 생각하며 바로 전력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원래 하던 대로. 남들이 듣는다면 적당히 좀 뛰다가 말 것 같은 말.

하지만 실상은 저 상태로 한 시간 가까이 달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

남들 눈에는 죽기 직전까지 뛰는 거지만 저 청년에겐 그게 원래 일상이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중얼거렸다.

역시 ‘존 나센’ 이라고. 세상 어디를 가도 저런 이들은 없을 거라고.

“카일!”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청년, 카일이 고개를 돌린다.

거기에는 뒤에서 제법 바쁘게 따라오고 있는 붉은 머리의 여인이 있었다.

“일어나셨나요, 엘가님.”

“네. 조금 전에요. 오늘도 어제만큼 뛸 건가요?”

“아뇨. 아쉽지만 오늘 일정이 좀 많아서요.”

“황궁에 가야 하나요?”

“네. 이번에도 협의할 사항이 워낙 많아서요. 그리고 오후에는 교단도 가봐야 하고요.”

카일의 대답에 엘가가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얼마 전 황태자에 의해 새로운 부처가 하나 생겨났다.

보건성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는데, 현재 카일이 그곳의 임시 고문으로 활동 중이었다.

‘덕분에 아버지 설득하는 데에 고생 좀 했지.’

정계에 존 나센이 관여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던 다곤 존 나센 남작이다.

그 와중에 카일이 신설된 부처의 고문을 맡는다고 하니 우려의 뜻을 보냈다.

진흙탕 싸움에 뛰어들어야 할 정도로 급한 일이냐고.

그 서신을 받아든 카일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경험을 했다.

언뜻 보면 막내아들이 괜한 행동을 하는 게 아닐까 걱정을 하는 것 같은데.

다시 보니 ‘제국이 귀찮게 하면 제국 조질 수도 있음.’ 이라는 느낌도 든 것이다.

덕분에 카일은 장문의 답장을 존 나센으로 보내야만 했다.

제국이 존 나센을 본받아 전 제국민 건강 증진 계획을 짜고 있다고.

그 기꺼운 일에 동참하여 조언을 좀 해주고 싶다고 말이다.

“제국의 뜻이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겠구나. 그래도 너무 깊이 관여하지는 마라. 자칫 거기에 신경을 쓰다간 막내, 네가 운동할 시간이 더 적어질 거다.”

운동할 시간이 없어지니 정계에 나서지 말라니.

정말 지극히 존 나센스럽다는 생각을 하며 카일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었다.

“하아, 하아!”

한참 달리던 카일이 뒤를 슬쩍 살피더니 속도를 줄인다.

철저하게 자신의 페이스에 맞추는 게 습관이라지만.

옆에 엘가가 있는데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건 이롭지 못 하다.

나중을 생각하면 적당히 맞춰주는 게 오히려 좋다.

당장 그의 어머니, 마리아 남작 부인도 ‘며느리 관련 일엔 좀 유도리 있게 하라.’ 고 은근히 카일에게 잔소리를 전달했으니 더더욱!

“후우, 후우….”

카일을 뒤쫓기 위해 조금씩이지만 무리를 하던 엘가.

그러다가 카일이 자신의 페이스에 맞춰주니 안정을 되찾는다.

이후엔 유산소를 하면서 대화를 나눌 여유도 보였다.

“보건성 일은 어떤가요, 카일?”

“똑같죠. 그쪽에서 뭐를 생각해서 가져오면 조언 좀 해주고, 이건 좀 아니라고 반대하고 이건 부족하다고 더 추가하라고 하고. 고문 역할이 그거 아니겠습니까.”

보건성 장관과 그 밑의 사람들은 내심 카일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어차피 조만간 황녀와도 이어질 사이이니 황실과의 연을 위해서라도 좋은 일.

그리고 이런 일에 대해 존 나센만큼 든든한 조언가가 또 어디 있을까.

“그런데, 티샤가 안 보이네요?”

“어제 급한 일이 생겨서 밤중에 연구소로 향했어요.”

“아아. 그래요? 밤중에… 아니, 잠깐만.”

눈썹을 꿈틀거린 엘가가 카일의 바로 옆까지 다가온다.

유산소만 아니었다면 바로 그를 붙잡고서 해명을 요구했을 것이다.

“밤중에 간 걸 어떻게 알고 있어요.”

“예?”

“설마, 아니죠? 그렇죠? 밤에 같이 있었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정말 그랬다면 이건 선전포고도 없는 기습이라 할 수 있다.

네 여자가 모여서 카일과 본인들을 위한 조약을 맺지 않았던가.

카일을 유혹해서 거사를 치를 거면, 반드시 사전 통보하기.

공평하게, 서로가 불만을 가지는 일이 결코 없도록.

혹 싸우기라도 한다면 카일이 실망할 수도 있으니 반드시 지키자고.

서로 굳게 약속까지 했는데, 이러면 안 되는 일이다!

“…뭘 상상했는지 대충 알겠네요.”

한숨을 내뱉은 카일이 천천히 속도를 줄인다.

아직 40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할 듯싶다.

거기에 엘가의 오해도 빠르게 풀어주어야 하고 말이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밤중에 들러서 이야기만 해준 게 전부지.”

“정말이죠? 정말,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죠?”

“아무렴 티샤가 그런 치사한 짓까지 할 사람으로 보이는 건가요?”

카일의 말에 자리에 멈춰 선 엘가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황녀조차도 그 조약만큼은 철저하게 이행하고 있는 중인데.

설마 티샤가 뒤통수를 치는 일은, 솔직히 좀 말도 안 되긴 했다.

“이제는 서로 다 믿는 거 아니었어요? 자꾸 걱정을 하시네.”

“흠흠! 안심이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잖아요. 경쟁자가 워낙 강력해야 말이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제 좀 마음을 놓아도 될 텐데.

‘쩝,’ 하고 입맛을 다신 카일은 바로 아카데미 실내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런 카일의 뒤를 엘가가 쪼르르 따라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성녀님은 지금쯤 새벽 기도를 하고 있겠죠?”

“아마도 그럴 겁니다. 기도가 끝나면 바로 유산소를 해서 실내 연무장으로 오실 테고요.”

“그 분도 참 대단하시네요. 하나 끝내고 또 하나 하기가 굉장히 힘든데.”

카일을 만나기 전의 성녀였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당장 플랭크조차 몇 초를 못 버티던, 그야말로 극악의 운동치.

거기에 또 몸까지 약해서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온갖 걱정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몸이 약하던 성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은 플랭크도 거뜬히 해내고 달리기도 잘하며, 무엇보다 체력도 좋아졌다.

물론, 어디까지나 과거의 성녀를 기준으로서 좋아졌다는 말이다.

성녀의 벗인 황녀와 비교하자면 그녀는 아직 꼬마 아이 수준이었다.

‘아마도 단련 쪽으로만 보면 객관적인 성장 수치에서 꼴찌는 성녀님이겠지.’

하지만 순서 경쟁에선 그것만 보는 게 아니다.

원래 9만큼을 지닌 자가 10으로 올라가는 것보다.

1만큼만 지니고 있던 자가 2로 올라가는 게 더 힘든 법.

존 나센 남작 또한 그 부분을 고려하겠다고 분명히 뜻을 보였다.

덕분에 성녀는 초조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묵묵히 최선을 다했다.

차기 성녀가 나왔다곤 하지만 이제 겨우 교단에 막 들어섰을 뿐이다.

그 아이가 다른 성녀들만큼 굳건한 마음을 지니기 전까지.

성녀는 성녀로서 응당 본인의 의무를 다하고 있었다.

“황녀님은, 정말로 그 결정 후회 안 하겠다고 하나요?”

엘가가 잠깐 침묵하다가 슬그머니 황녀 이야기를 꺼낸다.

이상하게 조심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

카일 또한 황녀 이야기가 나오자 헛웃음을 내뱉어야만 했다.

“저도 엄청 뜯어말렸는데 어쩌겠습니까. 어차피 단련으로는 딱히 점수를 못 딸 테니 이런 식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보조 교사로 지원할 줄은.”

아카데미 보조 교사. 그것은 카일의 기준에서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었다.

‘대학원생.’

교수를 보조해주는 이로서 조교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차이점은, 보조 업무를 담당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연구도 진행하는 것.

언젠가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거나, 혹은 학자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당연히 인내해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정말 어지간히 인내심이 좋은 이가 아니면 한 달을 못 버틴다고 했던가.

그런 자리에 황녀가 지원을 했다. 그것도 남들이 다 말리는데, 굳이.

오죽하면 그 소식을 들은 황태자가 직접 황녀를 부르기까지 했다.

“황녀.”

“예, 황태자 전하.”

“…어디 아픈 게냐?”

장난기 하나 없는, 정말 진지하기 짝이 없는 질문.

황태자만이 아니었다. 다른 황실의 일원들도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오로지 황제만이 무덤덤한 모습으로 ‘네 마음대로 해라.’ 라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접한 카일은 설마 싶었다.

육체 단련으로는 큰 점수를 못 받는 게 황녀의 현 상황이다.

학업적 부분으로는 이미 아카데미 졸업을 했으니 건수가 없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든 추가 점수를 따내기 위한 이유로서.

다른 것도 아니고 아카데미 보조 교사를 신청한 것이었다.

“이제 한 달 조금 지났나요? 잘 버티고 있다곤 하는데.”

“아직 방심하면 안 돼요, 카일.”

“어째서요?”

“지금은 아카데미가 방학이잖아요. 이제 방학이 끝나고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면. 그리고 교수들이 바빠지는 시기가 오면 보조 교사들 또한 자연스레 미친 듯이 힘들어질 거예요.”

엘가의 말에 으음, 하고 침음을 흘리는 카일이었다.

정말 괜찮으려나. 대체 무슨 연구를 하려고 지원을 한 걸까.

오늘 황궁에 가면 황태자를 만나서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누는 게 좋을 듯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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