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결정했어, 카일. 역시 그렇게 하는 게 좋겠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소리를 하려고요.
겨우 그 말을 목구멍 너머로 넘긴 카일이 황녀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아이는 못 해도 둘 이상으로 하자. 무조건 많은 게 최고야.”
“…저기, 황녀님.”
“아버님, 어머님처럼 셋으로 할까? 더 많아도 좋아. 난 더 낳을 수 있어.”
“아니. 저기요. 벌써부터 2세 계획을 세우고 계신 겁니까?”
기가 막혔다. 결혼은커녕 약혼도 아직인데.
심지어 동침을 한 적도 없는데 벌써 2세 계획이라고?
이건 김칫국 드링킹이다 못 해 때려 붓는 수준이다.
‘…아니지. 어차피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니, 지금 정하는 게 좋을지도.’
다른 여인들은 여기까지는 생각하지도 않은 것 같다.
오로지 황녀만이 훨씬 후의 미래를 고려하고 있었다.
흘끗 보면 아무 생각도, 대책도 없는, 그냥 직진만 하는 여자 같은데.
또 이렇게 보면 은근히 시야도 넓고 또 나름 지혜도 지닌 것 같기도….
“남녀의 사랑은 언제 나눌 거야? 난 지금도 좋은데.”
“…제발 좀. 좋게 생각하고 있을 때 이러지 좀 마요.”
이쯤 되면 일부러 점수를 깎아먹나 의심이 들 정도다.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면 꼭 뇌절을 하는 황녀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러고 있으면 어쩔 수 없잖아.”
“그건… 에휴. 뭐, 틀린 말은 아니니까요.”
마침 티샤도, 엘가도, 그리고 성녀도 없겠다.
대뜸 카일의 앞쪽으로 해서 등을 기대고 앉은 황녀였다.
덕분에 의도치 않게 황녀를 백허그하는 상태가 되었고 말이다.
찰랑거리는 머릿결 사이로 살짝씩 보이는 뽀얀 피부.
그 너머에서 살살 뻗쳐오는 묘한 향기가 절로 몸을 들썩이게 만든다.
“카일.”
“왜요.”
“좀 단단해진 것 같아.”
“…예?”
“단단해진 것 같다고.”
신체에 단 일말의 하자도 없는 카일이다.
더해서 한창 팔팔할 20대의 나이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반응이 나오는 게 맞았다.
“무, 무슨! 그런 말씀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십니까?!”
“어? 뭐가? 난 그냥 네 팔뚝 이야기를 한 건데?”
이런 젠장. 설마 한 번 반응을 보려고 이런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황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녀는 카일의 팔뚝만 쓰다듬을 뿐이었다.
아마도 정말 팔뚝이 단단해졌음을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지극히 자연스럽지만 또 조금은 부끄러웠던 생각을 한.
그래서 스스로 찔렸던 카일만 굉장히 난감한 그림이 되고 말았다.
“카일.”
황녀가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다.
머리칼에 가려져있던 여인의 향기가 한 번에 치고 들어온다.
덕분에 방심하고 있던 카일은 다시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갭 차이가 이렇게 무서운 거였구나.’
왜 이렇게 황녀에게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그 부분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을 해본 카일은 이런 대답을 도출해냈다.
다른 여인들과는 다르게 황녀는 평소에는 너무 무덤덤해서.
이렇게 남심을 저격하는 여인의 매력을 드러내지 않다가.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그게 폭발하듯 덮치기 때문이라고.
지금도 그러하다. 아까 전만 해도 그냥 왈가닥 황녀였는데.
제국 10강의 강자이지만 은근히 철이 없는 여자에 불과했는데.
현재 마주하는 황녀는, 성숙한 여인의 자태를 지닌 미녀였다.
“이상하네. 조금 전보다 얼굴이 붉게 변한 것 같아.”
“…거 모르는 척 좀 지나가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어떻게 모르는 척 지나가. 이게 다 내겐 중요한 일인데?”
“중요한 일이라고요?”
“응. 내가 네게 그런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여자라는 거. 다른 여자들에 비해 밀리지 않는다는 증거. 그러니까 더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마음가짐.”
그렇게 말한 황녀가 카일의 두 손을 안쪽으로 끌어당긴다.
이후 그의 손에 제 손을 포개어 자신의 배 위에 두었다.
“있잖아. 나 평생 결혼 안 할 거라고 생각했어. 아니지. 못 할 거라고 해야 하나?”
“그렇습니까.”
“응.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도 막내 사위는 못 볼 것 같다고 하셨었고, 황태자 전하도 막내 매제는 볼 가능성이 희박하겠구나, 라고 했었어.”
냉정히 보자면 황제의 말, 황태자의 예상이 맞았다.
극도로 아름답고 또 황녀라는 타이틀을 지녔음에도.
워낙 대하기 힘든 여인이기에, 당연히 그리 생각했을 터.
그래도 여기서는 그냥 조용히 있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카일이 얌전히 듣고만 있자 황녀가 품 안에서 파닥거린다.
“아. 얼른 네 거 하고 싶다! 얼른 카일 게 되고 싶어!”
…제발 좀, 그런 대사는 깜빡이 좀 키고 들어와요.
하마터면 또 남자의 자격이 눈치 없게 기지개를 켤 뻔 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어차피 약혼만 하면 결혼은 기정사실이니까요.”
“그게 잘 안 된단 말이야. 나는 그냥 얼른 카일이랑 내 아기가 생겼으면 하는걸.”
“그러니까 제 아이를 원하시는 거면 제 의견도 좀 경청하란 말입니다.”
한숨을 내뱉으며, 카일은 슬쩍 황녀를 안아주었다.
그보다 아이라. 거기까지는 아직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는데.
심지어 황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도 아니고 여럿을 원하는 느낌이 강했다.
‘…미래의 황실 결전병기가 여럿 나오겠는데.’
티샤나 엘가, 그리고 성녀는 딱히 황실과 접점이 없다지만.
황녀는 현 황제의 딸. 그리고 차기 황제의 여동생이다.
둘 사이에서 아이가 나온다면 황제의 외손자, 외손녀이고.
또 그 다음 황제의 조카들이 되는 것인데….
‘황태자 전하가 조카들 감당을 잘 하실지 벌써부터 걱정이네.’
원래 아이들이 부모의 성격을 다 닮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카일 본인도 알게 모르게 조금씩 감정적이고, 또 말보다 행동이 앞설 때도 있는데.
자신보다도 더 ‘존 나센’ 다운 황녀가 엄마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어째 벌써부터 미래의 황제 폐하가 비명을 지르는 게 들리는 듯 싶었다.
‘조카들이 너무 강력함. 뭐 이런 비슷한 거 겪으실 것 같은데 말이야.’
*
두 손을 꼭 모은 채로,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도를 올린다.
그렇게 한참을 기도에 열중하던 성녀가 천천히 움직였다.
“다 끝나셨습니까?”
뒤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카일이 그런 성녀의 손을 붙잡는다.
항상 저녁 기도를 올린다는 걸 알기에, 오늘도 미리 와서 기다린 모양.
“오늘도 기다리고 계셨네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제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요. 괜찮습니다.”
그 말에 성녀는 환한 미소를 짓곤 카일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 남쪽에도 당연히 교단의 영향력이 닿았기에.
숙소에서 나와 일부러 예배당까지 와서 기도를 올렸던 것이었다.
“다른 자매님들은요?”
“글쎄요. 아까 나올 때부터 체스를 두고 있던데.”
“아직도 그러시고 계신가요?”
처음에는 그냥 엘가의 제안으로 가볍게 한 번 시작한 것이었는데.
의외로 티샤가 체스에 꽤나 괜찮은 소질을 보였다.
덕분에 좋은 상대를 만난 엘가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체스에 집중.
티샤도 생각보다 재미있다며 열심히 두고 있었으며.
황녀는 당연하게도 옆에서 훈수 아닌 훈수를 두는 데에 열중했다.
“꽤나 재미있으신 모양이네요. 저도 한 번 배워볼까요?”
성녀의 말에 카일은 살짝 걱정이라는 표정을 해보였다.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성녀의 너무 착한 마음이 더 문제가 될 것 같다고.
한 수 물러달라고 하면 이겨내지 못 하고 물러주는 그림이 보일 지경이라고 말이다.
카일의 그 말에 성녀도 그럴 것 같다며 웃음을 흘렸다.
특히 황녀가 그렇게 나온다면 무조건 그럴 것 같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 잠깐만 앉았다 갈까요? 자매님들 승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네. 그러죠.”
딱히 지금 들어가도 방해가 될 것 같지는 않다만.
성녀의 그 말에서 무언가 묘한 분위기를 읽었기에.
카일은 얌전히 성녀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교단에서 연락이 왔어요.”
은은하게 달빛이 비추는 곳에 잠깐 앉아있던 성녀가 그리 운을 뗀다.
여기서 말하는 연락이 어떤 연락인지는, 카일도 대충 예상을 할 수 있었다.
“찾았다고 합니까?”
“네. 동쪽 국경의 인근 마을이라고 하네요.”
차기 성녀. 어떤 방식으로든 결국 세상에 의해 지목이 되는 여인.
그 존재가 이번에는 제국 동쪽의 국경 부근에서 나왔단다.
“그거 아세요? 만약 카일 형제님이 아니셨다면, 찾는 게 더 어려웠을 수도 있었어요.”
“갑자기 제가 왜… 아, 혹시 전쟁 관련인 겁니까?”
“네. 만약 유목 부족들과의 전쟁이 빠르게 끝나지 않았다면 국경 인근 마을이 어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만약 유목 부족들이 거기까지 쳐들어왔다면, 더 난처했겠죠.”
이게 이렇게 또 스노우 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아무튼 세상사, 참으로 희한하다고. 그리 생각하는 카일이었다.
“빠르면 다음해의 봄부터. 늦어도 초여름부터는 그 아이에게 조금씩 내어줄 생각이에요. 그리고 언젠가는, 성녀라는 이 무겁고 힘든 자리도 내어주게 되겠네요.”
“미안하신 모양입니다.”
“미안하죠. 제 어릴 때의 기억이 남아있기에, 이 자리가 너무 힘들었다는 게 선명해요. 그걸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내미는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 말에 카일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당신은 충분히 할 만큼 했다고. 누구보다도 성녀다웠다고.
어쩌면 신께서도 그걸 알기에, 이만 물러나는 걸 허락했다고.
그러자 성녀가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카일을 돌아본다.
“카일 형제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정말로 제가 성녀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 했다면. 그래놓고 이렇게 의무를 떠넘기려고 했다면. 신께서 제게 지금과 같은 이 순간을. 카일 형제님을 제게 허락해주진 않으셨겠죠.”
맞잡고 있던 성녀의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간다.
그 온기에, 그리고 그 마음에 화답하듯 카일도 성녀의 손을 같이 쥐어주었다.
“카일 형제님. 당신을 제 옆에 내려주신 신께 너무 감사드려요. 사실, 요즘 올리고 있는 기도도 전부 그 때문이에요. 항상 감사드리고 있다고. 형제님을 제게 주셔서 행복하다고.”
“이거 부끄럽네요. 제가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니까. 부담도 되는데요?”
“부, 부담 가지라고 드린 말씀은 아닌데!”
“아뇨. 부담 가져야죠. 성녀님에 제 곁에 계신데. 그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우우… 그, 그런 말씀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면….”
붉게 변한 얼굴을 숨기려는 듯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그 덕분에 달빛이 비추면서 오히려 성녀의 얼굴이 더 환하게 보였다.
“저, 그런데. 카일 형제님. 새로운 성녀님이 나왔으니 이제는….”
“다른 성녀님이 몇 명이 생겨도, 제게 있어 성녀는 오직 성녀님, 단 한 사람 뿐이랍니다.”
“정말로 성녀가 아님에도요…?”
“저만의 성녀님으로 계시면 되죠.”
카일의 대답에 성녀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다만, 몸에 살그머니 힘을 빼고서. 카일에게 살짝 기댈 뿐이었다.
“…주셔서 …절대로 놓지….”
희미하게 기도문을 외우는 성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무슨 기도일까, 잠깐 궁금해졌으나 카일은 묻지 않았다.
잘 들리지 않음에도 저 기도가 무슨 기도일지 알 것도 같았다.
*
제게 이 사람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잡은 이 두 손, 절대로 놓지 않겠습니다.
이 생이 마침내 다하여 이별하는 그 순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