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와 레아가 떠난 후. 카일과 일행들은 바로 돌아가… 지는 않았다.
이왕 따뜻한 남쪽 바다까지 왔으니 잠시 좀 쉬었다 가자는 게 여인들의 결론.
저번에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기에 그러자는 의견이 더더욱 힘을 받았다.
“카일. 카일도 잠깐은 좀 쉬어도 되는 거죠?”
여인들의 뜻을 하나로 모은 엘가가 웃으면서 그렇게 물었다.
쉬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카일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단련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최소한 하루나 이틀만이라도 좀 널널하게 있자는 거였다.
거기서 초를 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또 힘들어질 텐데.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조금은 느슨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느슨한 것도 아주 조금만 풀어줄 생각이긴 했다.
“기본 루틴은 돌릴 테니 그렇게들 아세요.”
카일이 양보할 수 있는 최대치. 덕분에 티샤와 엘가, 성녀가 환호성을 지른다.
황녀는 ‘이게 기뻐할 일인가?’ 하고 중얼거리다가 얼떨결에 거기에 휩쓸렸고.
“자! 그러면 아까 정해준 순서대로!”
아까 정해준 순서? 저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궁금한 걸 물어보려는 카일이었지만 뜻을 이루진 못 했다.
가서 바닷바람 좀 쐬고 온다며 엘가가 성녀와 황녀를 데리고 냉큼 사라진 것이다.
와중에 황녀는 ‘나는 안 가면 안 되냐!’ 하며 반항했지만 바로 무시.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예요, 황녀님!’ 라는 성녀의 잔소리만이 이어질 뿐이었다.
‘이건 또 뭔… 갑자기 무슨 일이야.’
볼을 긁적거리던 카일은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다른 여인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는데 티샤만 옆에 가만히 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살짝 인위적인 느낌이 솔솔 난다.
“이거, 우연 아니죠?”
“글쎄요?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니까 우연이 아닐까요?”
연기를 하고 있는데 영 실력이 별로인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저렇게 뻔히 다 드러나게 하는 것인지.
잠깐 고민하던 카일은 일단 넘어가주기로 했다.
“아까 전에, 형님이랑 누님이 무슨 말씀을 하신 거예요?”
“그냥 단순한 인사였어요. 정말로 단순한 인사.”
“…아닌 거 같은데.”
“으음. 아닐 수도 있고요?”
잠시 같이 걷자며, 티샤가 손을 내민다.
내밀어진 손을 잠깐 바라보던 카일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고마워요, 카일.”
“갑자기 뭐가요?”
“전부 다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저는 아직도 이상한 거에 관심을 기울이는 괴짜로 남았을 거예요. 지금처럼 제국에 주술의 새로운 시작을 만들겠다는 계획은 꿈도 못 꾸었을 테고요.”
마법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주술이라는 것도 있다고.
각자 장점과 단점이 있으니 적절하게 경쟁할 수 있을 거라고.
그 꿈을 꾸었던 티샤는 이제 그걸 착실히 이루어나가고 있다.
“아뇨. 제가 아니었어도 티샤는 다 해냈을 거예요.”
그녀 또한 나름 당당한 주인공 중 하나였으니까.
그 눈치 제로에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이안도 사람으로 만든 여자니까.
아마 무엇을 해도 기어코 성공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기대를 해주는 이가 있었기에. 그래서 저는 여기까지 쉬지 않고, 모든 시련을 이겨내며 올 수 있었는걸요. 그리고 그건 모두, 당신 덕분이죠.”
마주 잡은 손에서 포근한 온기가 더 진하게 느껴진다.
“덕분에, 여태까지 정말 힘차게 나아갈 수 있었어요. 그리고 더 강해지는 법도 배웠고요. 덕분에 사흘 밤을 새도 끄떡도 없었다니까요!?”
“그… 그건 딱히 좋은 일이 아닌데요. 수면은 반드시 취해야 합니다.”
카일의 말에 티샤가 ‘네. 그것도 너무 고마워요.’ 하고 말한다.
“이렇게 걱정해주는 거. 쉬지 않고 달릴 때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그 따스한 한 마디. 그것도 너무 고마웠어요. 카일.”
걸음을 멈추게 한 티샤가 카일의 앞에 선다.
그리고 조금은 긴장한 눈빛으로, 앞에 선 카일을 바라본다.
“앞으로도… 그래줄 거죠? 내가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항상 응원해주고. 지치면 힘내라고, 더 잘 할 수 있다고 다독여주고. 그렇게 해서, 마침내 닿고자 했던 곳에 닿았을 때. 고생했다며 전처럼 따스하게 안아줄 거죠?”
그 질문에 카일은 웃었다. 대답 대신, 그냥 웃을 뿐이었다.
너무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서. 반드시, 꼭. 그렇게 할 테니까.
“여태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옆에서 영원히 그렇게 해줄게요, 티샤.”
“…고마워요.”
품에 안긴 티샤는 고맙다는 듯, 그리고 참 다행이라는 듯.
그렇게 한동안 카일의 품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
“왜 빼는 거야? 그냥 확 잡아버리면 되는데.”
“….”
“거기서 왜 나이트를 옮겨? 그냥 앞으로 나아가서 압박하면 되는 거 아닌가?”
지금 엘가와 체스를 두고 있는 이가 자신인지, 아니면 황녀인지.
카일은 진심으로 헛갈리고 있는 중이었다.
“황녀님. 그, 부탁인데 제발 조용히 좀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결국 참다 못 한 카일이 애써 웃으면서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아까부터 옆에 앉아서 자꾸 구시렁거리는데 환장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훈수 수준도 안 돼! 체스 기본 룰만 아는 실력이라고!’
설마 카일 본인보다도 더 체스를 못 둘 줄은 몰랐다.
기물들이 움직이는 기본적인 규칙만 알고 있을 뿐, 상대방의 수를 읽을 생각이 전혀 없다.
아마 황녀가 하자는 대로 했다면 진작 기물을 다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원래 남의 게임에 끼어드는 이들이 다 그러하듯.
황녀 또한 본인이 방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더 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어필할 뿐이었다.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건지, 카일이 성녀를 바라본다.
제발 저 황녀님 좀 어떻게 해달라는 간절한 눈빛으로.
그러자 성녀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리곤 덜컥, 황녀의 손을 붙잡는다.
“지금 엘가 자매님과 카일 형제님이 하시는 중이잖아요! 이건 방해랍니다, 황녀님!”
“이게 왜 방해야? 난 그냥 내 의견만 말하고 있을 뿐인데?”
“우리는 그런 걸 훈수라고 부르고, 그 훈수를 좋아하는 형제자매님은 없어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성녀님! 암요, 옳고말고요!
“티샤 자매님!”
“네, 네?”
“반대쪽 손잡으세요. 정당한 승부를 위해서라도 황녀님을 끌어내야겠습니다!”
성녀의 말에 티샤가 저도 모르게 ‘우리가요?’ 라고 반문했다.
아무리 운동을 해서 몸이 좀 탄탄해졌다고는 하지만.
황녀는 제국 10강이다. 자신과 성녀 한 트럭이 와도 상대가 안 된다.
그런 황녀를 끌어내겠다니? 그게 정녕 가능한 말인가?
‘…이게 되네.’
예상과는 너무나 다르게, 그냥 순순히 끌려가주는 황녀였다.
“카일 형제님! 꼭 이기셔야 합니다!”
힘찬 성녀의 응원과 조금은 당황한 기색의 티샤.
그리고 투덜거리는 황녀를 뒤로 한 채, 카일은 다시 체스에 집중했다.
물론 엘가는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카일의 체스 실력이 나쁜 게 아님을 감안한다면.
그를 상대하고 있는 엘가는 최소한 그 이상이었다.
‘이건 좀 힘들 거 같은데.’
한 번 전체적인 상황을 본 카일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너무 많이 꼬였다. 일단 질질 끌고 있긴 한데 한계가 보인다.
초반에 기물을 어이 없이 잃은 게 너무 컸다.
스노우 볼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걸 뜻하는 모양이다.
포기할까, 라는 마음도 아주 잠깐 들었지만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포기라니. 하다못해 그 지옥 같은 존 나센 단련도 이겨냈는데.
고작 머리 좀 쓰는 것 앞에서 승부도 안 보고 포기를 해?
끝까지 가는 거다. 승패가 가려지기 전까지 치고 박고 싸우는 거다.
“…끝이군요.”
“네, 끝이네요.”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른 후, 비로소 승부가 났다.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엘가의 승리. 초반의 불리함을 결국 이겨내지 못 했다.
“고생 많았습니다, 엘가 님.”
“카일도요. 그보다, 정말 잘 두네요.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초반에 카일이 많이 말렸다. 그래서 쉽게 이길 줄 알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시간을 끌며 전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 엘가 본인의 집중력이 흐트러지며 기물을 여럿 잃었다.
“체스에서의 수도 그렇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뭘요. 어찌 되었든 패했는데요.”
“하지만 정말 좋은 승부였어요. 덕분에 많이 배웠어요. 어쩌면 이게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외교 부분의 한 전략일지도 모르겠네요.”
체스를 두다가 갑자기 웬 외교 전략이 튀어나온단 말인가.
카일이 두 눈을 껌뻑거리자 엘가가 피식, 미소를 짓는다.
“이런 식으로, 설령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라도 네가 그리던 그림까지 다 망쳐버리겠다. 라고 상대방에게 협박을 한다면. 아무리 승리가 확실한 상대라도 조금은 물러서지 않을까요?”
프훗, 하고 미소를 지으며 기물들을 정리한다.
그에 뭔 소리야.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카일도 같이 기물을 치우기 시작했다.
“카일.”
“네, 엘가님.”
“솔직히 말할게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기물을 옮기던 손을 멈추고 엘가를 바라본다.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싶었는데, 표정이 꽤나 진지하다.
“당신을 좋아하는데, 순수하게 이성적인 부분으로만 좋아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나는 리토리오의 주인이 될 테니까. 당연하게도 내 가문을 위해서 선택한 것도 있어요. 그러니까….”
“순수하기만 한 사랑은 아니다. 결국 이거잖아요?”
카일이 한 번에 요약을 해주니 엘가가 쓴웃음을 짓는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오히려 너무 당연한 말이다.
귀족들 사회에서 순수한 사랑만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을까?
결국 사랑도 결혼도, 전부 정치의 연장선으로 이어지는 곳인데.
“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이미 그 부분은 진작, 서로 이해하고 있었잖아요.”
“네. 그렇죠. 이전에도 말했었고, 또 느꼈을 테지만… 한 번 더 말하고 싶었어요.”
“왜요. 죄책감이라도 들어서요?”
“…그것도 있고요. 그리고… 티샤나 성녀님을 보면 괜히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서.”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엘가의 이마를 가볍게 톡, 하고 쳤다.
“아얏?”
“오히려 순수하게 사랑해서, 라는 말을 했다면 더 이상했을 걸요. 제가 아는 엘가님은 그런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니까.”
“…나도 가끔은 감정적일 때 있어요. 그건 오해하지 마요.”
“네네. 당연하죠.”
기물을 전부 걷어내고 체스판을 덮어둔다.
“그래도, 절 아예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당연하죠. 그러니까, 내가 방금 전 말한 건 ‘이러이러한 이유도 있다.’ 라는 거지, 절대 그게 주된 이유가 될 수는….”
아닌 척 하지만 다급한 목소리가 채 숨겨지지 못 하고 다 드러난다.
덕분에 카일이 크흡, 하고 웃음을 터트리자 엘가가 울상을 짓는다.
“씨이. 왜 자꾸 당신 앞에만 서면 냉정하고 이성적인 공녀 이미지가 망가지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요? 저는 알 것도 같은데.”
슬그머니 엘가의 손을 붙잡자, 그녀의 얼굴이 붉게 변한다.
눈동자에서는 ‘왜, 왜 이래요?’ 라는 질문이 느껴질 정도다.
“바로 그거요.”
“네, 네?”
“그게 이유라고요.”
좋아하니까. 나도, 당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