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일 형제님!”
교단에서의 기도회를 마치고 바로 돌아온 성녀.
그녀는 카일을 보자마자 와락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전에는 그래도 다른 여인들 눈치라도 좀 보는 것 같았는데.
존 나센에 다녀온 이후로는 이제 거리낌이 없어졌다.
아무래도 성녀 또한 알게 모르게 경쟁 부분을 신경 쓰는 듯 했다.
“헤에. 성녀님. 너무 적극적인 거 아닌가? 이러면 나 질투 나는데.”
“황녀님은 참아주셨으면 좋겠어요. 황녀님이나 다른 두 자매님들은 카일 형제님이랑 같이 계셨지만 저는 아니었잖아요.”
맞는 말이긴 했다. 실제로 신년하례식에 참석을 안 한 이는 성녀가 유일했다.
하지만 그녀가 강제로 못 한 것도 아니고 본인의 선택으로 안 온 것이다.
덤으로 황녀와 티샤는 각자의 이유로 카일 곁에 제대로 붙어있지도 못 했다.
기껏해야 10분 정도 같이 있다가 신년하례식의 끝을 같이 본 정도?
결국 그 과정에서 제대로 이득을 본 것은 엘가가 유일했다.
그렇기에 황녀와 티샤는 그 부분에 대해서 반발할 수도 있었다.
“성녀님 말씀이 맞긴 하네요.”
한데 티샤는 오히려 웃으면서 그러자는 듯 아주 부드럽게 넘어갔다.
나중에 있을지도 모르는, 성녀와 같은 경우를 위한 포석이랄까.
그도 아니면 이렇게 자애로운 것을 보여주려는 행위일 수도 있었다.
덕분에 황녀도 더는 이렇다 할 반발 의견을 내지 못했다.
이미 티샤도 입을 다문 마당에 본인이 더 말해봤자 손해였다.
“소식은 들었어요. 아버님은 바로 돌아가셨다고요.”
“네. 제가 그렇게 좀 있다 가라고 하셔도 고개를 내저으시더라고요.”
“그런가요? 하지만 제가 알기로 카일 형제님의 형님과 누님 되시는 분들이….”
“곧장 남쪽으로 가서 바다 건너 대륙으로 가기도 하죠. 그래서 거기에 대한 마중이라도 하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뭐 어디 먼 곳이라도 가냐고 하시더라고요.”
순간 성녀의 머리에 과부하가 걸리고 말았다.
어디 먼 곳이라도 가냐고? 그게 먼 곳이지, 그러면 먼 곳이 아닌가?
대체 존 나센의 기준에서 먼 곳은 어디를 의미하는 건지.
성녀 입장에서는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후훗.”
그런 성녀의 모습에 엘가가 저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린다.
“내가 뭐라고 했어요, 티샤. 우리들만 그러는 게 아닐 거라고 했죠?”
“그러게요. 엘가 님 말씀이 맞네요. 성녀님도 우리랑 똑같은 표정을 지으시네요.”
당연히 황당했던 건 티샤와 엘가도 마찬가지였다.
먼 곳이 맞는데, 어디 먼 곳 가는 것도 아니어서 마중은 안 한다는
그런 존 나센 남작의 말을 받아들이는 건 역시나 어려웠다.
“아버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난 딱히.”
물론 이미 존 나센 화가 끝난 황녀는 너무나 쉽게 받아들였지만.
“흠흠!”
이때, 뒤에서 한 여인이 슬그머니 헛기침을 한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레아. 그리고 뒤에는 리어도 서있었다.
신년하례식이 끝나자마자 바로 남쪽으로 향할 예정인 두 남매.
그리고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금방 돌아올 테니.
딱히 마중을 할 필요가 없다는 남작을 대신하여 카일이 남쪽까지 가기로 했다.
당연히 그 길에 딱히 이렇다 할 계획이 없는 황녀와 성녀.
그리고 둘만 보내기는 살짝 부러우니 결국 같이 따라가는 티샤와 엘가까지.
“우리 카일, 인기 좋은 건 알겠는데 애정 표현 자꾸 하면 이 누나도 하고 싶어진다?”
“제발 참아주세요. 누님.”
성녀님은 최소한 척추 부러질 정도로 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라는 말이 입가에서 몇 번이고 맴도는 카일이었다.
“괜찮겠습니까, 제수씨들. 굳이 따라가지 않아도 됩니다.”
“맞아요, 맞아. 마중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금방 갔다가 볼일만 보고 금방 올 텐데요! 방학 끝나기도 전에 올걸요?”
이 말을 그 신대륙에서 왔다는 사람들이 듣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마도 이걸 들었다면 다시 한 번 기절초풍을 하지 않았을까.
멀리 가는 게 아니야? 볼일만 보고 금방 갔다온다고?
“아닙니다! 카일 형제님의 형님과 누님 되시는 분들이니, 마땅히 따라가서 가시는 길에 행운을 빌어드리고 또 무운을 기원하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그 사이 잽싸게 먼저 나서서 점수를 따는 성녀였다.
확실히, 신년하례식에 오지 않은 대신 제법 많은 준비를 한 티가 났다.
“성녀님. 이 정도면 선전포고인데.”
“이번만큼은 황녀 저하 말씀이 맞다고 봐요.”
“흠흠!”
덕분에 다른 세 여인들의 경쟁심도 더 크게 타올랐고 말이다.
*
남쪽으로 가는 길에 또 미친 듯이 유산소를 하는 건 아닐까.
그렇게 된다면 과연 여인들이 제 형과 누나를 따라갈 수 있을까.
온갖 걱정에 속으로만 낑낑거리던 카일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네? 아니, 잠깐. 형님? 누님? 방금 뭐라고 하셨죠?”
“이동 마법인가 뭔가 하는 걸 이용할 거라고 했다.”
“정말요? 정말로? 그게 뭔지 아시고 하는 말씀이죠?”
“얘 좀 봐. 카일. 나랑 오라버니가 뭐 존 나센에만 있었니? 우리도 다 제국에 가봤고 아카데미도 다녔어! 음, 나는 1년 하고 바로 내쫓기긴 했지만.”
그러니까 더 놀라워서 묻는 거다.
존 나센 사람들이 이동 마법진 이용을 굉장히 싫어하는 걸 알고 있는데.
그게 뭔지 몰라서 한 번 이용하자는 식도 절대 아닐 텐데.
다른 이들도 아니고 리어와 레아, 존 나센 남매가 그리 말하니 더더욱!
“어머니께서 그리 하라 하셨다.”
“어머니께서요? 왜요?”
“제수씨들이랑 이야기 좀 하라고. 이제 가족이 될 사이니 서먹한 분위기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물론 운동을 하면서도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좀 더 진중한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으니 여유롭게 하시라고 말이다.”
존 나센의 의지마저 굴복하게 만드는 어머니의 말씀이라니.
새삼 카일은 남작 부인의 영향력에 감탄하고 말았다.
그게 아니면 힘으로 아버지를 차지한 어머니에 대한 두려움이라던가?
아무튼, 덕분에 카일의 걱정은 그대로 기우가 되어버렸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레아가 네 명의 여인들과 깔깔거리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남작 부인은 리어한테 이야기 좀 나누라고 했었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같은 여자가 더 편안해서 저러는 건가 싶다.
“여인들끼리는 뭔가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이다.”
“그러게요. 서로 불편해할 줄 알았는데, 다행입니다.”
같은 여자여도 원래 시댁 식구는 불편한 법이 아닌가.
빙의 전 원래 있던 세상에서 그런 경우를 많이 봤다.
“생각은 해둔 게 있냐, 막내야.”
“무슨… 생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형님?”
혹시 결혼식이나, 2세 계획을 묻고 있는 걸까?
“나랑 누이가 건너가서 받아올 기구. 주문 제작이니 특별히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하거라. 그쪽 사람들이 그래도 기계 만드는 재주는 좋다고 하니 가능할지도 모른다.”
“아.”
이상하네. 원래 그쪽 사람들 특기는 마도 병기였을 텐데.
어쩌다가 갑자기 기구 만드는 데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주문제작자가 된 거지?
뒤통수를 긁적거리던 카일은 잠깐 생각하다가 입술을 떼었다.
“봉에 무게가 자동으로 추가되는 것 좀 만들어달라고 해주세요. 아카데미에서 난처한 게, 들고서 원판을 끼울 수가 없어서요. 다들 원하는 무게의 원판을 들지를 못 해서.”
생각보다 요구 사항이 너무 술술 잘 나와서 카일 본인도 놀랐다.
“으음. 이해했다. 나도 예전에는 그래서 무게가 아니다 싶으면 내려서 다시 끼우고, 그 상태로 다시 들었다가 그래도 안 되면 또 내려놓곤 했었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리어가 품에 지니고 있던 수첩을 꺼내든다.
슬쩍 내용을 살펴보니 이미 고향 사람들의 요구 사항이 가득했다.
‘저걸 다 언제, 어떻게 만들라고 저렇게 많이…?’
그야말로 머리가 띵해지는 수첩이었다.
아무리 저쪽 대륙의 사람들이 마도 공학의 결정체라곤 하지만.
병기를 만들던 이들에게 갑자기 운동 기구를 만들라고 하면.
과연 존 나센 사람들이 원하는 수준으로 잘 만들까 걱정이 앞선다.
“그리고 말이다, 막내야. 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듣고 있습니다, 형님.”
“며칠 전에 본 그 이안이라는 친구 말이다. 저번에 아버지께 따로 단련까지 받은 녀석.”
혹시 이안이랑 한 판 하고 싶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말이기에 카일이 살짝 긴장하는 찰나.
“그 녀석은 뭔데 자꾸 여인 하나를 두고 낑낑거리는 것이냐.”
“…아.”
리어의 눈에까지 그게 보였을 정도면 좀 심각한 건데.
남작 부인을 닮아 비교적 눈치가 빠른 레아와는 다르게.
존 나센 남작을 더 많이 닮은 리어는 눈치가 살짝 느렸다.
해서 아카데미 시절에 소수이긴 하지만 호감을 지닌 영애들도 있었는데.
운동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좀 비키라고 한 소리를 했다던가.
그런 리어의 눈에도 보였단다. 이안이 넬을 두고 낑낑거리는 게.
그 정도면 정말 얼마나 애타게 낑낑거린 것인지 훤히 예상이 갔다.
“실은, 이게 좀 이야기가 깁니다.”
이안과 넬, 그리고 레토에게 너무 피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만.
대강의 것들을 간추려서 리어에게 말해준다.
잠시 후, 카일의 이야기를 다 들은 리어가 ‘허어.’ 탄식을 흘린다.
“아버지께 개인 단련까지 받은 놈이 왜 그런 거냐. 그 레토라는 청년은 바쁘다는 이유로 우리 존 나센에도 오지 않은 놈인데. 당장 정당한 경쟁을 벌여서 차지하면 될 것을.”
“그, 형님. 존 나센에는 존 나센만의 방법이 있듯이 제국에는 제국만의 방법이 있습니다. 남녀간의 사이에서도 당연히 그게 존재하죠. 그랬다간 오히려 이안이 난처해집니다.”
다행히도 리어가 또 아예 말이 안 통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카일의 설명에 영 별로라는 듯 턱을 만지작거리면서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딱히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역시, 막내 네가 그 친구보다는 낫다.”
“네?”
“단련 강도도 그렇고, 여자 하나에 매달리는 것도 아니고. 역시 존 나센의 남아답다. 제국의 사내 놈들보다야 훨씬 나아. 그래, 그래야 막내라고 할 수 있지.”
툭툭―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건 채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리어.
분명 막내동생이 장해서, 그래서 진심으로 칭찬을 하는 것 같은데.
왜 멕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까, 라는 생각이 문득 떠오르는 카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