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집단에는 무릇 여러 집단이 생기는 법이다.
그 집단의 등장을 껄끄럽고 또 불쾌하게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원래 인간이란 비슷한 이들끼리,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이들끼리 뭉치는 법.
이 제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집단을 꼽으라고 한다면.
황실에 그야말로 ‘절대적인’ 충성을 주창하는 황제파와.
귀족들의 권위 정도는 보장받고 싶어 하는 귀족파.
그 중에서 귀족파는 다시 크게 세 가지 파벌로 나뉜다.
그리고 그 주축은 당연하게도 세 대공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 제국은 혼란의 시기가 아니다. 당연히 그 세 곳이 다투지는 않는다.
다만 알게 모르게 조금씩 견제 정도는 하고 있다.
그래야만 좀 더 깨끗한 정계가 유지되는 법이니까.
“바이엔 대공. 자네는 이곳에서도 수완 이야기인가.”
중후한 목소리에 바이엔 대공 곁에 있던 귀족들이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는 잔을 든 채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슈렐리츠 대공이 서있었다.
“대공 각하.”
귀족들이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선다.
물론 그러면서도 바이엔 대공과는 딱히 어울리지 않는 슈렐리츠 대공이.
갑작스레 이 자리에 다가온 것이 못내 궁금한 모양이었다.
“장사꾼이 장사 이야기를 하는 게 뭐 어때서.”
황실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절대적인 위세를 지닌 곳이 바로 대공가다.
그럼에도 그 대공가의 수장 중 하나인 바이엔 대공은 스스로를 장사꾼이라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스스럼없이 말하고 있었다.
“뭐라 하는 건 아니네. 그냥, 잠깐 이야기나 하고 싶어서.”
“자금을 빌려달라는 이야기만 아니면 언제든 환영이지.”
바이엔 대공의 말에 슈렐리츠 대공이 ‘어이쿠.’ 하고 멋쩍은 미소를 짓는다.
아무래도 하려던 이야기가 그쪽과 굉장히 가까웠던 모양이다.
그렇게 두 대공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이번에는 리토리오 대공이 무슨 이야기를 그리 하냐며 찾아왔다.
외교 부분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그의 파벌이 내무성에도 진출했다고 하던가.
황제파 입장에선 살짝 걱정스러운 부분이지만 어쩔 수가 없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외교 부분만으론 인재풀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한데 리토리오 대공은 혼자서 온 것이 아니었다.
옆에는 한 명의 거대한 중년 남성과 함께였다.
그리고 그 중년 남성을 본 두 대공.
특히 슈렐리츠 대공이 굉장히 놀라는 기색을 내보인다.
“존 나센 남작.”
“간만에 뵙습니다. 슈렐리츠 대공 각하. 동쪽 이후로 처음이군요.”
“그, 그렇군. 그 때 이후로 처음이군.”
순간 그 날의 악몽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움찔, 하고 만 슈렐리츠 대공이었다.
지나버린 과거이긴 하지만 나름 제국 10강이기도 했던 자신인데.
비록 늙었다지만 아직 몸을 움직이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는데.
존 나센 남작이 지목하고, 이후 카일이 감행한 존 나센의 단련법은.
그 슈렐리츠 대공마저도 끙끙거리는 수준으로 만들어버렸다.
‘이거, 이 친구도 당했었던 모양이구만.’
거기서 리토리오 대공은 그가 동지임을 깨달았다.
당장 본인도 후들거리는 몸뚱이를 제어하느라 꽤나 힘들지 않은가.
그런 와중에 슈렐리츠 대공의 모습이 어제의 자신과 비슷했다.
“바이엔 대공은 존 나센 남작과 초면이지 않나?”
“그렇지. 남작의 막내아들인 카일 존 나센과는 만나보았지만 말이야.”
바이엔 대공은 그리 말하며 존 나센 남작을 바라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상대방의 가치를 파악하고, 또 얼마나 이득을 낼 수 있는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다.
그런 바이엔 대공의 입장에서, 존 나센 남작을 평가하자면….
‘둘 중 하나군. 돈이 하나도 안 되거나. 아니면, 말 그대로 돈을 쓸어 담거나.’
한편, 존 나센 남작도 바이엔 대공을 평가하는 중이었다.
과거 제국 10강이기도 했었고 대대로 ‘제국의 검’ 역할을 하던 슈렐리츠 대공가이기에.
또 본인이 선천적으로 강골을 타고났기에 만족스러웠던 슈렐리츠 대공이나.
혹은 그만큼은 아니어도, 비록 지금은 아쉬운 부분이 많이 보여도.
본인 딴에는 나름 관리도 했고 노력한 티도 나는 리토리오 대공과는 다르게.
‘아무리 좋게 봐도 평균 이하. 차라리 교단에서 본 사제들이 낫겠군.’
속으로 ‘쯔쯧.’ 하고 혀를 찬 존 나센 남작은 생각했다.
카일이, 자신의 막내아들이 맞이할 며느리 중에.
저 보고만 있어도 안타까운 바이엔 대공가의 여식은 없어서 다행이라고.
*
“의외네요, 카일. 이런 자리 엄청 싫어할 줄 알았는데.”
싫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영 별로다.
하지만 그걸 바깥으로 드러낼 만큼 자신이 애송이이지는 않다.
심지어 황제가 직접 존 나센 남작에게, 자신의 아버지에게 부탁하지 않았는가.
그런 자리에서 ‘으. 이런 곳 너무 싫어.’ 라는 걸 그대로 내비친다?
또 다시 귀족들이 뒤에서 야만족 어쩌고 수군거려도 무죄다.
뭐, 존 나센 사람들도 야만족 단어에는 면역이니 상관도 없겠지만.
“앞으로 이런 자리가 많을 테니까요, 엘가님.”
“그렇죠? 하긴, 카일 당신이 감당해야 할 문제네요. 공녀에 황녀에. 이제 보니 당신, 생각보다 더 나쁜 남자였을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억울한데요. 대놓고 꼬신 것도 아니고 본인들이 그냥 다가왔으면서.
라는 말을 입 바깥으로는 내놓지 않고 그냥 잔만 좀 기울이는 카일이었다.
아, 당연하게도 잔 안에 담긴 것은 술이 아니라 그냥 물이었다.
“티샤는 엄청 바빠 보이네요. 저것 봐요. 은근히 구해달라고 눈빛도 보내는데.”
“그래 보이네요.”
“안 가봐요? 카일, 당신을 바라보는데.”
“가주고 싶은데, 지금은 안 가는 게 맞아요. 저것도 다 티샤를 위한 거니까.”
이제는 평민이 아니라 정식으로 귀족이 된 티샤다.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리고, 귀족들의 세상도 알아가야 한다.
설령 그곳에 뜻을 두지 않고 본인만의 방식을 고집한다고 해도.
최소한 어떤 세상인지는 알아야 나중에 지혜롭게 대처를 할 수 있다.
“황녀님은 아까부터 황제 폐하 곁을 지키고 있는 것 같고요.”
“아마 지금도 당신 곁에 오고 싶어서 안달이 나셨을걸요?”
안타깝게도 황녀는 현재 황제의 호위 형태로 옆을 지키고 있었다.
황실 기사단도 있고 다른 이들도 있는데 왜 하필 그녀냐, 하면.
다른 뜻은 없다. 그냥 황제가 본인 딸이 또 실수할까 억제기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성녀님도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카일이 말을 안 해본 건 아니잖아요.”
엘가의 말대로, 카일은 성녀와도 함께 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성녀는 본인은 그런 자리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며.
이미 자신은 교단에서의 신년 기도회를 맡기로 했다고 전했다.
덕분에 엘가는 강력한 라이벌인 티샤와 황녀, 그리고 성녀까지.
이 셋을 전혀 경계할 필요 없이 아주 여유롭게 신년하례식을 즐기고 있었다.
아마도 요 근래 가장 즐거웠던 하례식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어차피 이럴 거라고 대충 예상은 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은 그만 아쉬워하고 나한테 더 신경을 써주었으면 좋겠네요, 카일.”
그리 말하며 엘가가 은근슬쩍 팔짱까지 끼고 들어온다.
그렇지 않아도 은근히 보내지던 시선들이 더 쏟아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차피 작위식 때 또 이럴 거 아닙니까. 그 때는 명실상부 주인공이라 티샤도, 성녀님도, 황녀님도 함부로 못 끼어들 텐데.”
“주인공이니 오히려 문제예요. 카일, 당신한테는 다가갈 시간이 없으니까. 아마 그 날이 되면 다른 분들 맞이하느라고 정신이 없을걸요?”
“으음. 사랑이 식었다는 말을 그렇게 하시는 거군요.”
카일의 농담에 엘가가 두 눈을 홉뜨더니 도리도리, 고개를 내젓는다.
같이 농담에 어울려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엘가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절대 안 식어요. 카일, 당신이 바람이라도 피우지 않는 이상.”
“이미 엘가 님 외에도 셋이나 더 있는데.”
“어… 그, 그러면! 그 셋 외에 더 늘어난다는 조건으로!”
절대 안 늘릴 것이다. 지금 이 넷도 감당이 안 되는데.
“그런데, 카일. 저기.”
“네?”
“저기, 존 나센 남작님 아닌가요?”
“그러네요. 그리고 그 뒤에는 리토리오 대공 각하랑 다른 두 대공 각하들께서도….”
이야기를 나누던 세 대공과 존 나센 남작.
그런데 갑자기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어딘가로 향한다.
카일이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황태자 쪽도 무슨 소식을 접한 모양이다.
그를 시작으로 귀족들이 갑자기 바깥으로 우르르 몰려나간다.
‘뭔데. 또 무슨 일이야.’
혹시 ‘이곳 신년하례식장을 반파시킬 테니 대피라도 해라!’ 라고 한 건 아니겠지.
제발 좀 그런 일은 더 없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카일이었다.
“카일!
“누님. 어디 가시는… 손에 그건 뭡니까?”
“아, 이거? 아버지께서 가져오라고 하셔서. 원래 반입 자체가 불가능한데 황제 폐하께서 허락을 하셨대! 그래서 가져다 드리는 거야.”
레아가 들고 가는 건 존 나센에서 흔하게 쓰이는 봉 하나.
겉보기에는 그냥 단순한 철봉 같아 보이지만, 존 나센의 물건답게 몇 배는 강한 것이었다.
‘근데 저걸 왜 갑자기 가져가는 건데.’
카일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엘가와 함께 귀족들 뒤를 따랐다.
그곳에는 존 나센 남작이 대공들과 함께 서있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동쪽 평원까지는 좀 아닌 것 같은데.”
“장담하는데, 그 너머로까지 날아갈 거네.”
무슨 내기라도 하듯 수군거리는 바이엔 대공과 슈렐리츠 대공.
그리고 리토리오 대공은 그냥 뒤에서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 사이 존 나센 남작은 레아가 내민 봉을 받아들었다.
“달까지 닿는 건 모르겠고, 그만큼 멀리는 갈 수 있을 겁니다.”
처음은 단순한 장난으로 시작한 말이었다.
존 나센 남작이 무언가를 던졌을 때 어디까지 가겠냐고.
그에 바이엔 대공은 제국 끄트머리라고 답했고 슈렐리츠 대공은 그 너머라고 했다.
거기서 갑자기 묘한 내기가 시작된 것이다.
심지어 황제까지도 재미있겠다는 듯 은근히 나섰다.
직접 궁정마법사까지 불러서 존 나센 남작이 던질 봉에 위치 확인 마법을 걸게 한 것이다.
제국 경계에 걸친 경계 마법 안에 떨어지면 위치 확인이 되고.
만약 확인이 안 된다면 경계를 넘어선 것이라는 게 마법사의 말.
“비키세요. 다칩니다.”
진지하게 할 생각은 사실 없었던 존 나센 남작이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바이엔 대공이 은근히 의심을 해서.
그에 대해 확실히 보여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흡.”
짧은 기합소리와 함께 손에 들린 봉이 그대로 새파란 궤적이 되어 사라진다.
쿠구구구구구구!!-
귀를 찢는 듯한 굉음과 귀족들이 휘청거릴 정도의 충격파는 덤.
“…세상에.”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법사가 경악하고 말았다.
정말로 순식간에, 존 나센 남작이 던진 봉의 위치 추적 마법이 끊어진 것이었다.
이 정도라면 제국 경계는 물론이고 동쪽 평원 그 너머도 충분할 터였다.
“자금 좀 잘 부탁하겠네, 바이엔 대공.”
“…이런. 제대로 물렸군.”
툴툴거리는 바이엔 대공과 껄껄 웃는 슈렐리츠 대공이었다.
*
“제갈 소저! 조심하시오!”
한 줄기 지풍이 여인의 정수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만약 무사의 외침이 아니었다면, 끔찍한 몰골이 되었을 것이다.
“맹 내부에 배신자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말들은 나중에 하시게들! 지금은 저들을 밀어내는 게 먼저야!”
정파 소속의 무사들로 보이는 이들이 힘껏 항전한다.
그러나 갑작스레 들이닥친 적들의 수는 너무 많았고, 또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무엇보다 못 해도 절정 급의 고수들로 이루어진 자들이다.
상대하기엔 적들의 수준이 너무나 고강했다.
“군사軍師의 딸년을 잡아야 한다!”
사방에서 그런 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정파의 무사들은 이를 악물었다.
최대한 방진을 짜고 저항했으나 이내 막다른 곳으로 몰리고 말았다.
싸우다가 죽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나, 할 일을 이루지 못함이 한스러울 뿐이다.
전투가 잠깐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한 눈에 봐도 세가의 무사들에겐 승산이 없어 보였다.
그에 반해 습격자들은 여전히 예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교의 짓인 줄 알았다. 맹과 마교는 현재 날을 세운 상태.
하지만 쓰이는 것은 마교의 검법이 아닌 사파의 도법이 더 주를 이루었다.
이제 보니 얼마 전 있었던 표국 습격 사건도 마교가 아닌 저들이 범인인 듯 했다.
“…쳐라.”
두건을 뒤집어쓴 자들이 끝을 맺으려는 찰나였다.
쿠구구구구―!!!
별안간 하늘에서 푸른빛이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콰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그 푸른빛의 섬광이 그대로 지면에 내리꽂혔다.
하필이면 세가의 무사들을 노리던 사파의 진영 한가운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