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나센 남작이 황궁에 이어 대공가를 방문하고 있을 무렵.카일은 여인들을 두고서 굳이 다른 이안과 만나고 있는 중이었다.
“…신년하례식?”
“모르고 있었어요?”
“알고는 있다. 요즘 그거 때문에 제도가 시끄러운데 모를 리가.”
“그런데 왜 반응이 그래요. 이제 이안 당신, 평민 아니에요.”
황제에게서 정식으로 기사, ‘경’ 이라는 호칭까지 하사 받았다.
아직 정식으로 작위를 받지 못 한 것일 뿐, 엄연한 귀족이다.
그리고 신분이 확실한 귀족이라면 신년하례식에 갈 수 있다.
물론 신년하례식에 올 귀족들에 비하면 너무 볼품없지만.
나름 황제는 물론이고 다른 제국 10강들도 인정한 이안이다.
시간만 좀 더 지난다면 분명 꽤 높은 작위까지 받을 것이다.
“…난 안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한데 이안은 갑작스러운 대답으로 카일을 놀라게 했다.
“그 자리에 엄청난 귀족들도 많이 온다고 들었어.”
“어… 당연히 그렇죠?”
내무성과 궁무성 주관이고, 그렇다는 건 황실이 뒤를 보고 있다는 것.
거기에 항상 세 대공 가문도 방문하고 뒤를 이어 중앙 정계의 귀족들도 거의 고정이다.
제국 정치계의 거물이라고 하면 무조건 온다고 봐야 한다.
“뭐에요. 혹시 귀족들 부담스러워서 안 가겠다는 거예요?”
“솔직히 말하자면, 좀 그래.”
이안의 대답에 카일은 기가 막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니, 언제부터 본인이 그렇게 귀족들 눈치를 봤다고?
당장 아카데미 초창기에 귀족 학생들을 몇 번이나 패지 않았던가.
이후로 카일의 손에 의해 좀 학생다운 모습을 지니긴 했다지만.
그럼에도 주인공으로서, 그리고 검사로서의 프라이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본인을 무시한다는 느낌이 나면 눈빛부터 달라지곤 하는데.
이게 귀족들 사이에선 일종의 견제이자 흠집을 만들기 위한 술책이다.
거기에 넘어가면 본인 손해라는 걸 알아서 다른 이들은 적당히 넘어가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안은 그런 거 없이 일단 들리면 바로 쫓아갔다.
그리고 ‘너님 검술 보니 니네 부모 수준도 알 만 하다.’ 라는.
귀족은 물론이고 교단 사제들이 들어도 경악할 패드립도 했었다.
‘그 정도로 귀족들 눈치를 안 보던 인간이 왜 이제 와서?’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카일.
그에 이안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더니 슬그머니 입술을 뗀다.
“그, 이번에 넬이 다시금 귀족으로서 활동하게 되었잖아.”
“그렇죠?”
과거 있었던 일로 인해 완전히 풍비박산이 난 넬의 가문.
다행히도 이후 여러 도움을 받아서 지금은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넬의 이름값이 올랐기 때문인데.
“그거랑 신년하례식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내가 갔다가 괜히 실수라도 하면, 넬은 물론이고 그쪽 가문 사람들도 나를 굉장히 부담스럽게 여길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러니까, 이제 막 회복을 시작한 가문인데 다른 거대한 귀족 가문을 막 대하는 사람이 사위로 들어오면 피곤할 테니, 점수를 까먹을 짓은 안 하는 게 좋겠다, 이거에요?”
이안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카일의 말이 맞다고 대답한다.
덕분에 카일은 ‘허.’ 하고 어이가 없다는 탄식을 내뱉어야만 했다.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얼마 전만 해도 귀족들 알기를 개 잡것으로 알던 건 둘째 치고.
이제는 그래도 된다. 오히려 그렇게 대해도 입 꾹 다물고 있을 것이다.
정보에 능한 귀족이라면 이안에 대해서는 이미 파악했을 거다.
카일 존 나센과 굉장히 친한 사이로 보이는 동급생에.
제국 10강들이 모두 인정한, 그야말로 검의 천재라는 말이 어울리는 실력.
그리고 결정적으로 동쪽의 유목 부족들과의 전쟁에서 활약까지.
“예전에는 그게 문제였죠. 하지만 지금은 괜찮을 텐데요?”
이안이 억지로 시비를 건다거나 남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먼저 도발이 들어오면 그 때만 대응조치하는 인물이다.
다만, 그 대응 조치가 좀 과해서 문제가 되는 것 뿐이지.
“오히려 넬을 생각한다면 신년하례식에 가는 게 이득이에요.”
“이득이라고?”
“네. 이안, 당신 말대로 넬의 가문은 이제 막 회복에 들어선 가문. 그렇다면 필요한 게 뭐 같아요? 시간? 돈? 그것도 있겠지만 일단 잃어버린 귀족의 자긍심부터 되찾는 거예요.”
그리고 그 귀족들의 자긍심은 다름 아닌 ‘인맥’에서 나오는 법이라고.
카일은 아주 진지한 어조로 이안에게 조언을 이어나갔다.
“그 인맥을 만들어주는 인물이, 진정 넬의 부모님이 원하는 사위겠죠.”
“…일리가 있어.”
“어차피 당신의 실력이면 이미 넬의 마음에 아주 깊숙이 남아있을 거예요. 이제는 넬만이 아니라, 그녀의 주변에도 영향력을 발휘할 때죠. 그러니까 가야 해요. 가서, 내가 이 영애한테 관심이 있다. 그러니까 귀족들, 당신들도 여기 가문이랑 잘 해봐라! 이런 모습을 보여야죠!”
과거 원작에서 느끼던 주인공에 대한 답답함, 그리고 한심함을 담아서.
아직도 헤매고 있는 이 검술만 아는 바보한테 조언을 퍼붓는 카일이었다.
“으음….”
그래도 이안은 고민하고 있다. 거기서 고구마 한 백 개는 먹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해서 카일은 입술을 깨물고선 비장의 카드를 써먹기로 했다.
“신년하례식에는 세 개의 대공가도 와요. 거기엔 리토리오도 있겠죠.”
“그렇겠지.”
그렇겠지, 는 무슨 그렇겠지야. 이 등신아.
이렇게 눈치가 없으니 주인공 고구마, 주인공 고자, 이런 말을 듣는 거야.
“리토리오 대공가가 오면, 누가 오겠어요.”
“…엘가 공녀?”
“시발.”
결국 참다 못 한 카일이 그대로 이안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덕분에 억! 비명 소리를 낸 이안이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카일을 바라본다.
본인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갑자기 폭력을 휘두르냐는 듯이.
“이 인간아. 리토리오 대공가가 오면 엘가님이 오는 건 알면서, 그 엘가님의 수행비서가 같이 오는 건 생각 안 해? 누군데, 그 수행비서가. 어?”
“…아.”
그제야 카일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은 이안이었다.
“레토… 도 오는군.”
“네, 오겠죠. 그러면 가서 넬이랑 레토랑, 둘이 있는 꼴 그대로 보고 있을 겁니까?”
“아니지. 아니야.”
“그러면 당장 신년하례식 갈 준비나 해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이안을 바라보며, 카일은 얼굴을 감싸쥐었다.
정말이지,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정녕 넬하고 저 인간을 이어주어야 하나 싶다.
저러다가 나중에 넬이 화병으로 몸져눕는다면 그 중 일부 지분은 자신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준비할 게 뭐지?”
“그러고 갈 거예요?”
“이 옷이 어때서.”
시발 새끼. 이딴 게 주인공이었다니.
*
“어서 오세요, 존 나센 남작. 교단 방문을 환영합니다.”
카일이 제 친구에 의해 한껏 고통을 받는 사이.
존 나센 남작은 대공가에 이어 이번에는 교단에 방문하였다.
‘음.’
자신 앞에 자리한 교황을 바라본 남작은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젊었을 적 나름 관리를 했던 것인지 아직은 버티고 있는 노인이다.
하지만 그의 기준에서는 좋은 편이 아니다. 조금 더 지나면 분명 무너지는 곳이 생긴다.
그렇다고 리토리오 대공처럼 다듬을 수도 없다. 그러다가 큰일 난다.
“허허허. 손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이는 것 같습니다.”
“별 거 아닙니다.”
“이 노구는 괜찮으니, 교단의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남작의 지혜를 좀 부탁 드리지요.”
이후 교황은 직접 교단에서 증축한 헬스장을 보여주었다.
그곳을 확인한 존 나센 남작은 ‘오호.’ 하고 작은 미소를 지었다.
분명 존 나센이 아님에도 희미하게 존 나센이 느껴지는 이유.
아마도 카일이 지시한 모든 것을 전부 수용하고 또 그대로 노력한 듯 했다.
하라는 대로 군말하지 않고, 요령을 피우지 않고 따라한다.
이보다 더 우수하고 또 칭찬해주고 싶은 회원님은 없는 법이다.
“이미 막내를 따라온 교단의 사제들을 저번 여름에 한 번, 그리고 얼마 전에 봤었지요.”
“어떠했습니까?”
“….”
잠깐 교황을 바라보던 존 나센 남작은 이곳이 교단임을 자각했다.
그곳에 걸맞은 말을 해주는 게 좋다는 카일의 조언을 떠올리며.
“모름지기 강자는,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겐 약해야 하지요.”
“으음?”
“그런 의미에서 그 사제들은, 언젠가 그 강자라는 이름이 어울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극찬. 덕분에 뒤를 따르던 리어와 레아가 놀랄 정도였다.
덕분에 두 남매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성녀님이 아버지께 점수를 좀 더 딸 수 있겠군.’
‘성녀님! 올케 좋은 소식이야!!’
*
교단에서의 일정도 마무리하고, 이제 내일 있을 신년하례식만 남았다.
그런데 존 나센 남작은 황제가 직접 내어준 숙소로 향하지 않았다.
대신 어딘가로 훌쩍 이동했는데, 그곳은 다름 아닌 제국 아카데미였다.
“여기가 아카데미구나.”
“예, 아버지.”
“레아, 네가 반파시킨 곳이기도 하다고.”
“아하하… 네. 부끄럽게도요.”
레아의 대답에 다시 한 번 흐음, 하고 주변을 훑어보는 남작.
“레아, 네가 화가 많이 안 났었던 모양이다.”
쯔쯧, 혀를 찬 남작은 말을 이었다.
“네가 정말로 화가 났었다면 저 정도는, 반파가 아니라 완파. 아니, 다 없애버렸을 텐데.”
“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저번에 누이를 데리러 오니 저도 그렇게 느꼈었습니다.”
“그걸 가지고 제국에서 그리 반응한 거냐.”
고개를 내저은 존 나센 남작은 앞에 펼쳐진 제도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 이곳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