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왔다고. 그래, 그가 왔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폐하. 남작이 왔습니다.”
시종장의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거리곤 걸음을 옮겼다.
감정 표현을 자제하고 싶은데, 이제는 좀 익숙해져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아직도 그 이름만 들으면 저도 모르게 몸이 바삐 움직여졌다.
‘존 나센 남작. 다곤 존 나센.’
제국의 확장 사업이 전부 끝나고 나선 본 적도 없었다.
서로가 젊었을 적 보고서, 그 이후로는 영원히 볼 일이 없을 거라 여겼다.
그나마 친분을 위해 아들과 딸을 아카데미에 보낸 게 전부.
한데 그 예측은 언제부터인가 완전히 엇나가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존 나센이 제국으로 들어오는 일이 잦아진 것이다.
시작은 그 가문의 막내아들이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부터.
이후 다시는 올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존 나센 남매가 나타나더니.
급기야는 존 나센 남작까지 움직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이 움직이는 순간이 바로 제국의 위기라고 여겼었는데.
오히려 존 나센이 움직이자 제국의 숙원이 전부 이루어졌다.
서쪽, 남쪽, 그리고 동쪽까지. 1년 만에 평정을 한 것이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지금은 그보다 배는 더 놀라웠다.
제도에 다다른 존 나센 남작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황제 폐하를. 이제는 사돈어른이 될 분을 잠깐 만나 뵙고 싶습니다만.”
설마, 설마 존 나센과 황실이 사돈이 될 줄이야.
이 소식을 선대 황제들이 듣는다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현 황제를 껴안으며 ‘황상!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소!’ 라고 할 것이다.
사돈인 것도 신기한데, 심지어 사돈어른이라고까지 불러준다.
존 나센 남작보다 황제가 몇 살 더 위인 것은 사실이다.
다만, 나이로 그의 위에 한 번 있어보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
그 남작이 먼저 그런 말을 꺼낼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남작.”
불러오기까지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웠다.
하여 황제는 굳이 직접 발걸음을 하여 중간에서 존 나센 남작을 맞이했다.
“다시 뵙습니다, 황제 폐하.”
“그렇구려. 이렇게 빨리 볼 줄은 미처 몰랐소.”
신년하례식에 오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도 그렇고.
이렇게 사돈이라고 칭하며 먼저 친근하게 다가온 것도 그렇고.
이쯤 되니 본인이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싶었다.
“무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이들 이야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무례라니. 원래 자식의 결혼만큼 부모에게 중대한 사안도 없소. 들어가지.”
황제가 직접 손님을 맞이하는 건 아마 전무후무하지 않을까.
뒤에 서있던 시종장은 그리 생각하며 얌전히 두 남자의 뒤를 따랐다.
*
“다음 해에 카일과의 약혼 순서를 정할 생각입니다.”
약혼 순서를 정한다. 그 말은, 황녀가 무조건적인 첫 번째가 아니라는 뜻.
아주 잠깐이었지만 황제의 마음속에 못내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다. 황제도 결국 딸을 둔 아비이다.
그 아비로서 제 딸이 첫 번째가 아님을 받아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보통 귀족도 아니고, 대공가도 아니고, 황족인데.
방계도 아니고 현 황제가 아비인 적녀인데. 서운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서운하시다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황제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존 나센 남작이 말을 잇는다.
덕분에 황제는 아니라며 바로 그 서운했던 마음을 지워버렸다.
“괘념치 마시오. 어쩔 수 없지. 남작의 막내아들이 워낙 대단하니까. 아마 5황녀, 그 아이도 그걸 감안하고서 그러는 것일 터. 남작이 사과할 일은 하나도 없지. 없고 말고.”
제 딸이 좋다면. 그리고 제국에도 이득이 있다면.
아비로서의 서운한 마음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서운함이 사라지니 이제는 벅찬 마음이 더 크게 느껴질 정도였다.
‘황실과 존 나센이 엮인다. 그것도 다른 무엇도 아닌 혼인 동맹. 즉, 혈맹으로서.’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대단한 일이다.
존 나센이 형식적으로 제국의 패권을 인정하고, 제국이 작위를 내린 것?
과거에나 대단한 것이었지 지금 이 혈연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혼인 동맹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으로 강력한 결속력이 된다.
서로 으르렁거리는 원수 가문도 일단 그 연을 맺으면 최소한 눈치는 보게 된다.
그만큼 귀족 사회에서 결혼으로 맺어지는 혈맹은 대단한 가치를 지녔다.
“물론, 황녀 저하의 능력을 생각하면 첫 번째가 될 확률이 낮다곤 할 수 없습니다.”
“남작이 그렇게 말해주니 안심이 되는군.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
“더해서, 황녀 저하와 카일 사이에 태어날 아이에 대한 것인데.”
“아이… 말인가?”
아직 결혼은커녕 약혼도 안 한 사이인데.
이제 겨우 약혼 순서를 정하겠다고 말한 존 나센 남작인데.
갑자기 아이 이야기가 나오니 살짝 당황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저 말은, 결국 존 나센도 이번 일에 대해 굉장히 진지하다는 뜻이다.
가벼운 생각을 지녔다면 아이 이야기가 나오려야 나올 수가 없다.
“아이는 존 나센이 아닌, 제국에서 자라게 할 생각입니다.”
“…정말인가?”
“어찌 되었든 황실의 핏줄이 아닙니까.”
남작의 말에 황제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혼인을 하면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여인이 남자를 따라가게 된다.
그에 따라 이후 태어날 아이들도 그곳에서 자라나게 된다.
다만 카일의 경우, 작위를 세습 받는 작위 귀족도 아니고.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의 적녀이기에 모호한 부분이 좀 있었다.
덕분에 나중에 생길지도 모르는 고민이었는데, 그걸 남작이 바로 해결해주었다.
“이렇게 해주는 것에 대한 이유가 있겠지.”
“태어날 아이는 정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건 그 아이의 선택에 달린 것 아닌가?”
“때로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서 결정되는 순간도 있지요.”
한 마디로, 태어날 아이는 철저하게 정계에서 배제 시키라는 말.
벌써부터 아이의 미래를 논하는 게 살짝 불편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 아이의 ‘부모’를 생각한 황제는 미소를 지었다.
카일 존 나센, 그리고 율리카 제바스티안 로비사 드 로트링겐.
둘 모두 권력과도, 정치와도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이들이다.
오히려 그 둘을 굉장히 귀찮고 또 덜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할 거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과연 정계에 관심을 가질까?
오히려 부모 이상으로 강해지는 것에 집착할까, 다만 그게 걱정이다.
“이 정도면 일단 폐하와의 이야기는 얼추 마무리가 되겠군요.”
안부 인사도, 이렇다 할 잡설도 없었다.
지극하게 본론만 간단히. 그 이상의 말은 생략.
그리고 용건이 끝났다면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신년하례식 때 뵙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지. 그런데, 아직 신년하례식까지 며칠 남지 않았나?”
“앞으로 가볼 곳이 좀 더 남아있습니다. 교단이라던가, 대공가라던가.”
존 나센 남작의 말에 황제가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모두가 카일과, 그리고 존 나센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될 곳들.
교단에는 성녀가. 그리고 대공가에는 엘가 공녀가 있었다.
‘그 중에서, 황실을 먼저. 나를 먼저 보러 왔다고.’
일단은 제국의 귀족이기에, 귀족이니까 황제를 보러 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디 존 나센이 그걸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인가?
만약 성녀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면 교단을.
반대로 공녀가 마음에 들었다면 대공가부터 방문했을 인물이다.
그럼에도 황실에, 이 자신을 먼저 보러 왔다는 것은.
‘녀석. 그래도 그곳에선 나름 괜찮은 며느리로 보인 모양이다.’
자식 걱정은 거의 하지 않았던 황제였지만.
괜히 그걸 내보였다가 황실에 분란만 야기할까 참아왔지만.
그래도 막내는. 거기에 딸아이는 항상 신경이 쓰였었다.
저 아이가 정말 반려를 얻고, 다른 여인들처럼 살 수 있을지.
이미 다른 자식들은 전부 다 혼인을 해서 제 짝을 찾았는데.
그 걱정을 하던 게 엊그제 같았는데 이제는 정말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
황제가 느꼈던 긴장감을, 이번에는 리토리오 대공이 느끼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이렇게 존 나센 남작을 직접 마주하는 것이.
이리 가까이서, 그 위압감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이 처음이었다.
‘거대하다.’
단순히 육체만을 바라보며 나온 속내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거대했다. 존재감도, 그리고 그 안에 지닌 모든 것이.
강함을 좆는 그 단순함. 그러나 약함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 고귀함.
끊임없는 노력 앞에 인자해지며 풀어진 나태에 날카로워지는.
명예를 알고 유혹에 빠지지 않는, 마땅히 귀감이 되어야 할 자세.
그 앞에 서니 자신이 지닌,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게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허허허.’
설마 자신이, 이 리토리오 대공이 이런 마음을 품게 될 줄이야.
제 딸이 참으로 대단한 곳을 사돈댁으로 골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리토리오 대공을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존 나센 남작. 만나게 되어 영광이오.”
과연 무슨 이야기를 꺼내러 온 것일까.
대공은 자리에 앉은 존 나센 남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공 각하.”
그래. 과연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들어보자.
혹시 카일과 엘가에 대해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둘 사이가 어떤지, 앞으로 어떤 식으로 할 건지.
연을 맺고 싶어 하는 여인들이 너무 많기에, 그 순서를 말해주려는 건가?
“관리에 소홀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존 나센 남작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으음? 남작. 지금 뭐라고….”
“아이들 이야기를 하려고 왔는데, 이걸 보니 참을 수가 없군요.”
쯔쯧, 하고 혀를 차며 고개까지 내저은 존 나센 남작.
그러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났다.
“손주 보기 전까지 정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랑 같이 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남작?”
“같이 상체도 하고, 하체도 하고. 유산소도 같이 해야지요.”
*
다음날, 리토리오 대공가에 웬 이상한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존 나센 남작이 다녀가고 그 다음 날에, 대공이 근육통을 호소하며.
이런 말을 하기 매우 그렇지만 거의 기다시피 다녔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