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손님들. 아니, 미래의 존 나센 며느리들이 온지 사흘이 흘렀다.
그 사이 있었던 일들을 간추리자면 역시나 그 며느리들의 루틴 점검.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면 본격적으로 첫 번째 약혼 자리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데.
공평한 경쟁, 공평한 전투를 위해서라도 모두의 확인 작업은 필수였다.
“으음. 지금 루틴은 너무 허술한데. 그래서는 과부하는커녕 자극도 부족할 겁니다.”
“아… 그, 그런가요? 그러면 아버님의 뜻은 어떠신가요?”
“지금보다 세트 횟수를 늘리거나, 아니면 무게를 늘려야 할 겁니다.”
“그렇군요. 저, 그런데… 말씀 편하게 하시면 안 될까요?”
여인들의 부탁에 존 나센 남작은 처음에는 고개를 내저었다.
말을 놓으면 자신이 너무 루틴에 집중해서 약간 날카로워질 수도 있다고.
혹 그런 일이 생길까 존대로 미연에 그 일을 방지하는 중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남작의 뜻은 이번에도 남작 부인에 의해 제압되었다.
뜻은 좋지만 언제까지고 며늘아가들에게 그럴 수는 없지 않냐고.
이제라도 친해지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 그녀의 의견.
이어지는 설득에 존 나센 남작은 제 부인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물론 당장 편하게 말을 놓는 것은 아니고, 차차 그러겠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교단 사제들도 좀 봐야겠군요. 순례라고 하고 왔는데 그 순례 길에 아무 것도 얻지 못 한다면 그보다 서운한 일은 없을 겁니다.”
아예 본인이 직접 나서서 확인하고, 또 판단하고 싶다고.
그리 말한 존 나센 남작은 교단의 사제들 앞에 직접 섰다.
덕분에 사제들은 그야말로 초긴장 상태에 접어들었다.
저번처럼 그냥 존 나센 남작령의 사람들이 봐줄 거라고 여겼는데.
그들 입장에선 태산과도 같은 남작이 직접 나타났으니까 말이다.
“으음. 저번 방학 때보다 더 좋아지긴 했군요.”
단순히 강함만 추구하는 존 나센이 아니다.
강함으로 나아가는 길, 그 과정에 들인 노력 또한 중요하다.
그리고 그 노력 부분에서 볼 때 사제들은 합격이었다.
“지금처럼만 한다면 언젠가 여러분들도 우리들의 뒤를 따라올 수 있을 겁니다.”
엄청난 말이었다. 제국 쪽 인물들도 많이 듣지 못 했던 평가다.
그런 평이 교단의 사제들에게 내려졌으니 성녀는 뛸 듯이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이제 형제자매분들 모두가 걱정 없이 고행길에 오르면서도 그분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고 믿음을 잃지 않게 되었습니다!”
“당연한 말씀을. 합당한 노력을 하고, 그 노력에 따른 결실을 취한 이들은 결코 길을 잃지 않습니다. 설령 잃는다고 해도 금방 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나아갈 겁니다.”
사제들은 그런 남작의 대답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심지어 몇몇은 그걸 또 열심히 수첩에 적어가기까지 했다.
“성녀님. 허면 우리 형제자매들은 이만 정해진 고행을 떠나겠습니다.”
“어느 곳으로 가시려는 건가요?”
“글쎄요. 아마 남쪽으로 향해서 그곳을 좀 돌다가, 동쪽으로 나아갈 계획입니다.”
유목 부족들이 있는 동쪽 평원으로 가겠다는 건가?
하기야, 그곳 사람들은 이곳 교단의 종교가 아닌 민간 신앙을 믿고 있으니까.
카일 입장에선 사제들의 행선지가 당연히 그곳이 될 거라 여겼다.
하지만 이후 나온 대답은 그의 예상보다 더 멀고 넓은 것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더 멀리 가보고 싶습니다.”
“더 멀리, 라고 하신다면.”
“동쪽 너머, 또 어딘가 새로운 세상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직까지는 멀고 험해서, 누구도 감히 가볼 생각을 하지 못 했지만 이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몸이 무겁고, 또 약했을 때는 그 고됨 때문에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하지만 몸이 가벼워지고 또 강인해지며, 육체의 고됨은 그저 ‘따위’ 가 된 순간.
비로소 진정한 순례, 그리고 고행이라는 것을 실행할 수 있게 된 사제들이었다.
언젠가 꼭 다시 뵙기를 고대하겠다며 기도를 외운 사제들.
곧 그들은 존 나센 남작령을 떠나 본인들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언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저게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닿지 못 한 곳에 나아가 그곳에서 신의 말씀을 전할 수도 있다.
“잘 해낼 겁니다.”
사제들을 향해 계속해서 손을 흔들고 있는 성녀.
그 옆으로 다가간 카일은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붙잡아주었다.
“네. 저 형제자매분들은 잘 해낼 거예요. 그러실 수밖에 없어요.”
“성녀님이 믿기에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단순한 믿음이 아니에요. 저들이 어떤 분께 인정을 받았는데요. 카일 형제님의 부친. 아버님. 그 분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러니까, 저는 무조건 믿어요.”
성녀의 말에 카일은 그 말이 맞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이제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교단의 사제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과연 저들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어디서 멈추게 될까.
지금 상황을 봐서는 아무리 못 가도 유목 부족들의 땅까지는 갈 텐데.
그곳에서 멈추고 돌아올까, 아니면 너머로 나아가게 될까.
‘동쪽의 그 너른 평원 뒤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다고 했던가.’
바다 건너 신대륙은 마법과 기술이 화합을 이루는 세상이었다.
그리고 거대한 평원, 그 너머는 마법이 아닌 무공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무협, 그 세계와의 만남이라. 어째, 상당히 기대가 되었다.
이제 이곳에서는 딱히 흥미로운 일도 없을 것 같은데.
바다 건너는 너무 멀어서 딱히 가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드는 찰나.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나오는 세상이라니 꽤나 흥미가 동했다.
“카일!!”
사제들을 마중하고 다시 존 나센의 성으로 돌아온 카일.
그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레아가 냅다 그를 와락 안아들었다.
덕분에 카일은 또 다시 그 품에서 ‘크엑.’ 하고 바동거려야만 했다.
“그, 누. 누님. 제발. 이거 좀 안 하면….”
겉보기에는 그냥 굉장히 가녀린 몸매를 지닌 것 같다.
하지만 실상은 초고도로 압축된, 순도 100퍼센트의 전투 근육이다.
존 나센 남작이나 리어가 외부로 분출되는 형식의 근육이라면.
남작 부인과 레아는 그게 안쪽으로 응축된 형태라 할 수 있었다.
그 근육 사이에 끼어버린다면 누구든 저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아니, 다른 이였다면 진작 질식하거나 터져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아, 미안! 카일! 하지만 너무 반가운걸! 집에 왔으면 연락을 했어야지!”
급히 카일을 내려놓은 후, 레아가 여인들과 인사를 나눈다.
이전에도 몇 번 본 사이이지만 이제는 단순히 동생의 여자친구가 아닌.
미래의 올케들, 그리고 미래의 가족이지 않은가.
“이건 누이 말이 맞다, 막내야.”
예전에도 이미 강인하고 굳건한 모습으로 모두를 주눅 들게 했던 리어.
그런데 지금 보니 이전보다 훨씬 더 거대한 분우기가 돋보인다.
아무래도 사흘 내내 빙해에서 수영을 하며 펌핑이 제대로 된 모양이었다.
“집에 돌아왔으면 바로 이 형과 누이한테도 알렸어야지. 심지어 제수씨들까지 모시고 이게 뭐하는 거냐. 이 형은 참으로 서운하구나.”
“아, 그게! 저, 카일은 두 분께 혹 방해가 될까봐 그랬던 거랍니다! 혹시라도 단련 중에 방해가 되는 짓은 절대 금물이라고 어찌나 그러던지….”
얌전히 상황을 지켜보던 티샤가 슬쩍 카일 앞으로 나선다.
남자 편은 여자가 들어주는 거라고 했던가. 벌써부터 각을 재는 중이었다.
덕분에 상황을 살피던 엘가도 가세해서 카일을 변호했고 말이다.
“어머, 뭐야. 우리 올케들, 벌써부터 남편 편드는 거야?!”
“네? 아. 그건 아니고! 저는 그저….”
“장난이냐, 장난. 카일이 우리 방해할까 그러는 거 다 알고 있지.”
티샤와 엘가의 등을 토닥거리며 환하게 웃어주는 레아였다.
한편, 성녀는 리어와 레아 곁으로 다가가선 조심스레 입술을 떼었다.
“두 분, 소식은 들었습니다. 아버님. 그러니까, 존 나센 남작님을 대신하여 바다 건너 새로운 세상으로 가시려고 한다고요.”
“그렇습니다. 제수씨. 아버지께서는 제도에 볼일이 생기셔서.”
리어의 제수씨, 라는 말에 성녀의 입가에 방긋 미소가 그려진다.
그 단어가 그리도 좋았던 걸까. 자꾸 헤실헤실 미소를 짓자 레아가 킥킥거린다.
“아이고, 우리 올케들. 아무래도 엄청 좋은 모양이네요.”
“아… 네. 너무 좋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가족이 생긴다는 게… 너무 좋습니다.”
“그런가요? 앞으로 잘 지내봐요. 그리고, 우리 카일 잘 좀 부탁하고요.”
“오히려 제가 누를 끼치지는 않을까 하고 있답니다.”
그러자 리어와 레아가 각각 ‘아뇨, 제수씨.’, ‘아뇨, 올케.’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이라면 분명. 당신들이라면 분명히 카일에게 너무나 소중한 선물이 될 거라고.
부디 우리 막내, 당신들의 곁에서 잘 지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것보다 막내야.”
“네, 형님.”
“여기 있는 분들이 다 제수씨 되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불러야 하는 거니.”
“예? 어,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가 안 가는데요, 형님?”
이름을 몰라서 묻는 건가? 아니다. 이미 몇 번이나 만났던 사이다.
리어가 티샤와 엘가의 이름을 모를 리가 없다. 심지어 황녀의 이름도 안다.
성녀의 이름 정도야 모른다고 하지만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 건지.
“카일도 참. 오라버니 말 그거잖아. 첫째 제수씨가 누구고, 둘째 제수씨가 누구고. 이런 거.”
“…아.”
그런 거였구나. 그래, 그런 거였어. 고개를 끄덕인 카일은 ‘음.’ 하고 침음을 흘렸다.
아직 본격적으로 경쟁이 시작되지 않았기에 잠잠하던 여인들.
하지만 방금 전 레아의 입에서 나온 첫째, 둘째 이야기에 눈빛들이 달라진다.
‘대충 보인다. 첫 번째가 안 되는 건 몰라도 절대 꼴찌는 하지 말자.’
일단 엘가와 황녀는 본인에 대한 프라이드가 남다른 여인들이다.
그리고 티샤와 성녀도, 마음이 착하다곤 하지만 자존감이 낮은 건 절대 아니다.
아직은 정해지지 않았으니 당장은 크게 걱정할 게 없다고 하지만.
벌써부터 묘한 기류가 흐르는 걸 보니 잔잔한 경쟁은 아닐 것 같았다.
“아무래도 갈 길이 참 멀어 보이네, 카일.”
레아의 팩트 폭력에 윽, 하고 물러서는 카일이었다.
“카일. 그건 알고 있지? 아버지가 제도의 신년하례식에 가시는 거.”
“네. 들었습니다.”
“나랑 오라버니도 그 때 같이 갈 거야. 가서 적당히 인사 좀 하고, 그 후 남쪽으로 내려가서 그 바다 건너에 좀 다녀올 생각이야. 가서 얼른 부탁한 거 받아야지.”
“….”
부탁을 한 건지, 아니면 협박을 한 건지.
그쪽 사람들이 느끼기엔 누가 봐도 후자였을 것 같은데.
카일은 부디 배를 타고 떠난 이들이 얼른 도착하기를 바랐다.
최소한 운동 기구를 만들지는 못 했어도, 계획 정도는 잡아두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