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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전투종족-276화 (276/318)

남작 부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여인들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상황 파악을 못 한 건 카일도 마찬가지였기에 역시나 그러했다.

“어머니? 왜 갑자기 저를 가리키시는 건지….”

“왜 모르는 척이니. 존 나센의 방식만을 고집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막내, 너라면 응당 눈치를 챘어야지. 이 엄마가 뭐라고 할지 말이야.”

그러니까 저는 아무 것도 모르겠는데요, 라고 답하려던 카일.

하지만 곧 남작 부인이, 제 어머니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아차렸다.

“…아니, 어머니. 잠시. 이건 경쟁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러면 객관적인 평가만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주관적인 부분이 더해지면….”

왜 자신을 가리켰는지 빠르게 이해를 한 카일이었다.

지금 자신의 어머니는 여인들의 육체적 단련, 그리고 학업적 성취도.

그에 더해서 카일 본인의 마음이 향하는 것도 고려하겠단 것이었다.

즉, 누가 더 여성적인 매력을 어필하느냐, 이 뜻이었다.

하지만 이건 카일에게는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본인이 택하지 않게 되어서 이제라도 편하게 대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다시금 여인들의 눈치를 보아야하지 않는가.

“객관적인 부분이 있으니 주관적인 부분도 있어야지. 이건 경쟁이고 또 전투이지만, 동시에 승패만을 가르는 일이 아니잖니, 막내야.”

“그런….”

“남녀의 일이야. 언젠가 부부가 될 사이야. 그러면, 네 마음도 정해야지. 그래서 이 엄마가 객관적인 부분을 제시한 거고, 이제 거기에 내 주관적인 부분을 더하라고 해주는 거란다. 네가 너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하지만, 결국 네 선택에 따라 결정이 될 것임을.”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저게 맞을 수도 있다.

모든 객관적인 부분을 더해서 약혼 순서를 정한다고 한들.

거기에 카일의 선택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법이지 않은가.

“나와 네 아빠 결론은 이렇단다. 우리들은 이런데, 카일 너와 여기 있는 아가들은 어떻게 생각하니. 이번에도 이견이 있으면 말해주렴.”

그러자 여태껏 침묵하고 있던 황녀가 슬그머니 손을 든다.

“저는 어머님의 의견이 십분 동의합니다.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경쟁도 좋지만 무엇보다 카일의 마음이 어떤지. 저는 그게 더 궁금했거든요.”

“황녀님은 그렇다고 하는데.”

직후 엘가와 티샤도 받아들이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들어보니 이보다 더 괜찮은 조건도 없겠다는 게 그녀들의 생각이었다.

단순히 육체적 단련만 있는 게 아니라 학업적 성취도도 있고.

그에 더해서, 카일의 마음을 가장 많이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부분까지.

이렇게만 한다면 충분히 첫 번째 약혼녀의 자리를 쥘 수 있었다.

“성녀님은 어떠시죠?”

남작 부인의 물음에 성녀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카일 형제님의 마음. 네, 저도. 그리고 다른 자매님들도. 그게 가장 중요한 법이죠. 이렇게 좋은 말씀을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여자들 의견은 전부 통일되었다.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무한 경쟁도 좋지만 거기에 상대방의, 카일의 마음도 확실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만족도도 높고 앞으로도 계속 노력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따지고 보면, 카일에게도 부담만 있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주관적인 기준만이 아닌 객관적인 판단 기준도 있지 않은가.

순번을 정할 때는 종합적인 평가가 될 테니 자신에게 쏠리지는 않는다.

이미 이쪽의 상황을 전부 알고 있었다는 듯 행동한 남작 부인.

여자들의 마음은 같은 여자가 안다는 것인지,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이쯤 되면 그냥 어머니가 단독으로 다 정하신 것 같은데.’

겉으로는 남작과 함께 고민을 하고 결론을 내렸다곤 하지만.

이렇게 보니 아무래도 모든 고민과 결론은 남작 부인 혼자서 한 것 같았다.

그 사이에 남작이 한 일? 그냥 옆에서 눈치를 보며 운동만 했겠지.

“저, 그러면 어머님. 오늘 당장 시작인 건가요?”

슬쩍 황녀의 눈치를 살피며 엘가가 질문을 던진다.

카일의 고향이다. 카일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는 곳이다.

최소한 이곳에선 조신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다.

괜한 짓을 하다가 혹 안 좋은 눈길이라도 받으면 울고 싶을 것 같다.

하지만 저 직진 밖에 모르는 황녀는 그딴 건 개의치 않을 거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라고 하면 당장 오늘밤 카일을 유혹할 확률이 매우 높다.

‘어머님께서 말씀하신 카일의 마음.’

그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다른 결과들이 살짝 부족해도 카일이 그걸 다 물리고 붙잡게 하라는 뜻이다.

그건 여인으로서의 매력을 십분 활용하라는 뜻과 같았다.

이러니 엘가가 황녀를 살피는 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흐으음.”

엘가의 그런 속내를 알아차린 것일까.

남작 부인이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약간의 뜸을 들인다.

“…그리 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경우가 아닌 것 같네요. 너무 갑작스러우니까.”

“아아! 그런가요?!”

“아가들이 여기 머무는 동안은 그냥 지내도록 해요. 진짜 경쟁, 진짜 전투는 여러분 모두가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 후. 카일이 다시 제도로 가는 그 시점부터예요.”

“여, 역시!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쳇.”

티샤와 엘가가 얼른 남작 부인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그에 반해 황녀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일주일이 지나면 돌아가야 하는 것은 티샤나 엘가만이 아니다.

황녀 자신도 신년하례식 참석을 위해서 돌아가야만 한다.

해서 그전에 아예 카일의 마음 속 깊이 침투하려고 했던 것인데.

이렇게 되면 아무 수확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만 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남작 부인의.

아니, 시어머니의 말씀이니 황녀라고 해도 거역할 수는 없는 일이다.

“부인.”

이때, 여태껏 침묵하고 있던 존 나센 남작이 남작 부인을 부른다.

그 모습이 마치 중요한 무언가를 누락했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그게 진짜였는지 남작 부인이 ‘아아!’ 하고 탄식을 흘렸다.

“가장 중요한 거! 내 정신 좀 봐. 하마터면 그걸 잊어먹을 뻔 했네요.”

“중요한 거라뇨?”

“잘 들으렴, 카일. 너한테도 해당되는 사항이니까.”

그러니까 그 중요한 부분이 도대체 뭔데요.

카일과 네 여인들이 남작 부인의 다음 말에 집중한다.

“남녀 간의 사랑은, 하루에 한 명씩만.”

“…에?”

“피임 제대로 해야 해요. 가임기 피해서 하는 건 기본인 거 알죠?”

“어, 어머니?”

“사랑을 나누는 시간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시간. 그 이상은 안 돼요. 그리고 운동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루 일과가 전부 끝나고, 밤에만 해야 하고요. 혹시나 불붙어서 도중에 하게 된다면, 나중에 못 한 운동은 꼭 해야 해요.”

너무나 갑작스러운 남작 부인의, 조금은 낯 뜨거운 말들.

덕분에 카일은 어버버거리며 여인들의 눈치만 살펴야했다.

너무 갑작스럽지는 않을까. 혹, 기분 나쁘게 여기지는 않을까.

그런 걱정을 하며 옆에 앉은 여자들을 돌아보았는데….

“어머님.”

“네, 티샤. 말하세요.”

“운동 루틴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하루 일과를 끝낸 밤에 시작해서 한 시간. 맞나요?”

“정확해요. 그 부분만 지켜주면 정말 고맙겠어요.”

“혹시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되나요?”

“그것까지는 우리도 알 수 없으니까요. 그저 여러분들이 지켜주기만을 바라는 거죠. 물론, 난 우리 아가들이 나와의 약속을 지켜 주리라고 믿지만요.”

굉장히 열정적으로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티샤.

심지어 그 다음은 엘가가 나서서 질문을 이어갔다.

“어머님. 그러면 순번은 어떻게 정하나요?”

“으음. 그건 아가들이 정하세요. 그것까지 내가 해주기는 그러니까.”

“혹시, 카일의 마음 부분에 관련해서 이게 중요한 영향을 줄까요?”

“당연하죠. 남녀 간의 속궁합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랍니다.”

크흠!-

옆에 앉아있던 존 나센 남작이 갑자기 헛기침을 한다.

자제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인지.

확실한 건 항상 무덤덤하던 그의 얼굴에 아주 조금은 붉은 기운이 머문다는 거였다.

“한 시간 말고, 두 시간은 안 되나요.”

“아하하! 황녀님. 미안하지만 그 이상은 안 돼요.”

“왜죠?”

“충분한 수면을 취해야 몸 상태가 최고로 유지되고, 그래야 다음날도 즐거운 마음으로 유산소를 하고, 상체와 하체를 거쳐 활력소가 되는 루틴을 할 수 있으니까요.”

“…만약 카일을 유혹해서 그가 더 달려들도록 하면 저는 무죄입니까?”

황녀의 말에 남작 부인이 으음, 하고 침음을 흘린다.

그 부분은 미처 생각하지 못 했는지 잠깐 카일을 바라본다.

“글쎄요. 그건… 으음, 그건 우리 막내가 알아서 잘 처신해야 할 문제겠네요.”

아니, 어머니. 왜 거기서 저한테 맡기시는 건데요.

여기서도 어머니가 나서셔서 안 된다고 해주셔야죠.

황녀님이 직진 뇌절 전문이라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성녀님은요. 하실 질문 같은 건 없나요?”

재빠르게 성녀 순서로 넘어가는 남작 부인이었다.

“아, 그. 저, 저는 없는 것 같아요!”

다른 세 여인들과는 다르게, 성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이미 남녀간의 사랑 부분부터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질문이 온다고 한들 거기에 제대로 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자. 이걸로 가장 중요한 부분까지 전부 말해주었네요. 명심하세요, 여러분. 원래 하던 것에 최선을 다하면서, 그 와중에 게을러지지 않고 단련도 꾸준히 하는 것. 거기에 막내의 마음을 붙잡는 것까지. 쉽지는 않을 거예요. 혹 포기하실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포기하라는 말을 하려던 남작 부인이 그냥 웃어버린다.

카일 옆에 앉은 네 명의 여인 모두, 포기할 생각 따위는 없는 모양.

그 결심이 표정에서, 그리고 눈빛에서 느껴질 정도였다.

“하면 좋겠지만, 그럴 분은 없는 것 같으니 집어치우죠.”

다 끝났다는 듯 가볍게 손뼉을 치는 남작 부인.

그렇게 모든 게 끝이 나자 여태껏 침묵하고 있던 존 나센 남작이 몸을 일으킨다.

“그러면, 식사도 했겠다. 소화도 시켰겠다. 다시 할 일 하러 가야지.”

할 일. 존 나센에서 할 일은 단 한 가지다.

“중요한 이야기도 다 끝난 것 같은데, 이제 단련장으로 가서 그대들이 하고 있는 루틴을 점검하고 조언을 좀 해주고 싶군.”

어째 카일의 약혼 및 순번을 정하는 이야기보다.

예비 며느리들의 루틴 점검을 더 기다린 것 같은 존 나센 남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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