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275화 (275/318)

식사 자리는 카일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유쾌했다.

원래 가족 식사 자리에서 나오는 화제는 단 하나다.

오로지 단련에 관한 것. 그것 외에는 따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식사를 하고 어떤 운동을 얼마나 할 것인지.

현재 루틴이 어떻고 앞으로 어떻게 해볼 생각인지.

어떤 기구가 가장 부실하고 새로운 기구가 얼마나 필요한지, 등등.

하지만 이번만큼은 존 나센 남작도, 그리고 남작 부인도.

단련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오롯이 아카데미 이야기만 꺼내놓았다.

정확히는 남작이 반사적으로 운동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마다 남작 부인이 제지하고.

얼른 화제를 바꾸어서 카일과 네 명의 여인들 관계를 묻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다들 사정이 있어서 오랫동안 있을 수는 없다는 거구나.”

“네, 어머니. 엘가님은 대공 작위를 받는 것 때문에 준비할 게 많고. 티샤도 이번에 주술 관련해서 엄청 바빠서 말이죠. 성녀님이나 황녀님은 당연하게도….”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단다. 이전에도 한 번 말하지 않았니.”

다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지어주는 마리아 남작 부인.

원래도 단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이 웃기까지 하니 더더욱 부드러운 분위기가 난다.

그 모습에 성녀가 ‘아아.’ 하고 탄성까지 흘릴 정도였다.

물론, 카일은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속지 않았지만.

‘절대 방심 안 해. 우리 어머니, 절대 만만하신 분이 아니시지.’

단순히 부드럽기만 한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남작 부인이 되었을까.

이곳 존 나센에서도 철혈이라는 별칭까지 지닌 존 나센 남작이다.

그 남작을 낚아채고 휘어잡을 정도의 여인이 바로 과거의 남작 부인이었다.

당장 리어가 남작을 닮고, 레아가 남작 부인을 닮았음을 생각하면 이해가 더 쉽다.

아카데미 반파를 누가 시켰던가? 리어? 아니다. 레아였다.

“다들 걱정할 거 없어요. 나도 우리 아가들에게 할 말만 전하면 되니까.”

“그러면 언제 이야기를 할 생각입니까, 부인. 지금….”

“지금 말고요.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여기서 했다간 체하고 말 거예요.”

“으음. 그렇군요.”

저것 보라고. 아버지가 꼼짝도 못 하시잖아.

세상 대다수의 부부들이 최소 한 번 이상은 부부 싸움을 한다고 들었는데.

카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제 부모님이 싸우는 광경을 본 적이 없다.

아주 단순하고 사소한 말다툼조차도 말이다.

“아, 아버지. 아까 하시려고 했던 이야기 좀 해주시죠. 계획이 바뀌었다는 거요.”

카일에게 있어서 가장 궁금한 부분은 바로 그것이었다.

존 나센 남작이 누구보다 바다 건너 새로운 대륙으로 가고 싶어 하는 걸 아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어떤 계획 변경이 있어서 그걸 포기한다는 것인지.

혹시 자신은 모르는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걱정까지 될 정도였다.

“그거 말이냐. 별 거 아니다. 실은, 제국의 황제가 초대장을 보내서.”

“초대장이라뇨?”

“제도에서 열린다는 신년하례식 말이다. 거기에 참석해줄 수 있느냐고 하던데.”

신년하례식? 그 말에 카일은 물론이고 다른 여인들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국에 그런 행사가 있다는 건 당연히 모두 알고 있다.

지나간 한 해의 마무리, 그리고 다가오는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행사.

그 중 제도에서 열리는 신년하례식은 보통 행사가 아니다.

어느 정도 급이 되는 귀족들도 겨우 올 수 있는 자리.

중앙 정계에서 힘을 지녀야만 고개를 내밀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원래는 따로 초대장을 발송하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를 판단키에 제도의 행사에 참석해도 되는 수준이라면.

혹 그곳에 가서 무시를 받지 않을 정도는 된다는 확신이 선다면.

따로 누군가의 초대를 받지 않아도 참석할 수 있는 자리였다.

한데 그 신년하례식에 황제가 초대장을 보냈다니.

심지어 그 상대가 여태 한 번도 그 행사에 참여한 적도 없는 존 나센인데.

그 초대를 존 나센 남작은 받아들이는 쪽으로 생각하는 눈치였던 것이다.

“정말로 가시려고요? 아버지가요?”

“그래. 원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만, 네 엄마가 하도 성화를 내서.”

“어머니께서요?”

그리 말하며 카일이 반사적으로 남작 부인을 쳐다본다.

어떻게 아버지를 설득했느냐, 그것도 물론 궁금하긴 하지만.

그보다는 어떤 생각으로 그런 의견을 제시한 건지, 그게 더 궁금했다.

“당연한 거 아니니. 네 아빠가 거기에 간다면, 우리 막내랑 우리 아가들에게 더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나중에 있을 경사스러운 자리에서, 모두의 축복이 더해진다면 더 좋잖니.”

한 마디로 언젠가 있을 카일과 각 여인들과의 결혼식에서.

조금이라도 더 화려한 예식을 치렀으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들이 모였으면 해서.

바로 그 때문에 존 나센 남작을 신년하례식으로 밀어낸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카일은 순간적으로 ‘이미 충분하지 않을까요.’ 라고 말할 뻔 했다.

일단 엘가부터 보면, 단순히 대공가의 공녀가 아닌 확실시된 후계자다.

미래의 대공이 될 인물이 결혼을 하는데 어떤 귀족이 그걸 무시할까 싶다.

아마 결혼식에 어떻게든 초대를 받으려고 갖은 애를 쓸 것 같은데.

그 부분은 황녀 또한 마찬가지다. 이쪽은 엘가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도 않다.

현 황제의 적녀, 그리고 제국 10강. 이 두 타이틀만으로도 차고도 넘친다.

‘성녀 쪽은 뒤에 교단이 있으니 이쪽도 역시나 패스고.’

예전이었다면 티샤 쪽이 조금 걱정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존 나센과 어느 정도 레벨이 맞는 세 명의 여인과는 다르게.

아무 것도 아닌 일개 평민이 운 좋게 남자를 잘 만났다고 할 수 있으니.

하지만 그것도 이젠 모두 옛말이 되어버렸다.

황녀가 말하기를 이번 신년하례식 전후를 해서, 황제가 귀족 작위를 내릴 예정이란다.

그냥 찌라시도 아니고 황실의 인물이 전하는 오피셜이니 확실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막내의 경사인데. 조금이라도 더 빛나야지.”

남작 부인이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니 카일은 그냥 고개만 끄덕거리고 말았다.

것보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결혼식은 존 나센에서 할 생각이 아닌 모양이다.

이곳에서 할 생각이었다면 제국 쪽 시선을 고려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어, 어머님.”

엘가도 그에 대한 확답을 듣고 싶었던 걸까.

조심스레 남작 부인을 부르며 그 부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저희와 카일의 결혼은….”

“당연히 아가들 입장도 배려해야지. 어디 보통 사람도 아니고. 대공에, 성녀에, 황녀. 제국 쪽 관례는 우리도 대충은 알고 있단다. 그래도 한 명은 막내 고향에서 했으면 하는데….”

“제가 할게요!”

기다렸다는 듯 냉큼 그걸 채가는 티샤였다.

“저는 어디서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어머님! 제가 카일이랑 존 나센에서 결혼할게요!”

저기, 여러분. 내 의견은 아무도 안 듣나요?

갑자기 어쩌다가 이렇게 결혼 이야기로 흐름이 잡히는 건데요.

우리 여기 모인 건 결혼이 아니라 다른 주제로 모인 건데?

카일의 이런 속내를 남작 부인도 대충 알아차린 것일까.

이후 식사가 다 끝나자 차를 한 잔씩 타주며 자리에 앉아있게 했다.

존 나센의 원래 방식대로라면 당장 단련장으로 이동하는 게 순서인데 말이다.

“자. 이제, 아가들을 여기까지 오게 한 이유를 설명해야겠네요. 다들, 대충 알고는 있죠?”

끄덕끄덕-.

네 명의 여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에 남작 부인은 미소를 지은 채로 말을 이었다.

“원래는 여기 있는 모두가. 아, 황녀님은 아니군요. 아무튼, 네 사람이 황녀님과 마찬가지로 아카데미 졸업을 하고. 그 이후에 누가 첫 번째가 될 것인지 정하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생각해보니 이건 공평하지 않은 전투인 걸 알았죠.”

“그, 어머니. 전투라고 말씀하시는 건 좀….”

슬그머니 카일이 이의를 제기하지만, 앉아있던 남작이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한다.

“해서 나랑, 여기 있는 내 남편이랑 상의를 좀 했어요. 그리고 나온 결론은, 이번 방학부터 시작해서 2학년 여름 방학 직전까지. 그렇게 기간을 정하고 먼저 약혼 순서를 정하려고요.”

어찌 되었든 넷은 학생 신분. 해서 결혼 대신 약혼으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비록 결혼은 아니지만 약혼으로만 해도 충분하다 할 수 있다.

먼저 약혼했으니, 먼저 결혼한다. 전혀 이상할 게 없으니까.

오히려 먼저 약혼을 했는데도 결혼을 못 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일단 우리들 생각은 이런데, 아가들 의견도 들어봐야겠죠. 해서 이렇게 불러서 아가들 의견을 듣고 싶어요. 혹 이견이 있다면 말해줄래요? 편하게 말해도 좋아요.”

마리아 남작 부인의 말에 엘가와 티샤가 잠깐 무언가를 소곤거린다.

아마 둘 사이에 적당히 합의된 무언가 있는 모양인데.

“어머님.”

엘가가 슬며시 손을 들곤 말을 잇는다.

“일단 어머님과 아버님의 혜안에 그저 감탄하고, 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저희도 미처 신경을 쓰지 못 했던 부분을 짚어주셨어요.”

“고마워요.”

“당장 이번 방학부터 시작해서 다음 학년의 여름 방학까지. 그렇게 해서 약혼 순서를 정하는 것에 대해선 따로 이견이 없습니다. 티샤, 당신도 그렇죠?”

“네. 엘가님. 없습니다.”

“다만, 궁금한 게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경쟁을 해야 할지. 그게 궁금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만약 경쟁을 존 나센 식의 경쟁으로만 한다면 결국 승자는 무조건 황녀다.

경쟁이라는 것은 공평해야 하는 법인데, 이러면 너무 황녀에게 유리하지 않은가.

“중요한 부분을 말해주었어요. 역시, 제국의 대공가 따님답네요.”

“가, 감사합니다. 어머님.”

“여러분들 생각은 얼추 보이네요. 우리 존 나센의 방법으로 하면, 너무 불리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 그렇지 않아도 당장 이 상황이 황녀님 때문에 일어난 건데 또 황녀님에게 유리한 판을 깔아주는 게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죠?”

남작 부인의 말에, 티샤와 엘가가 슬그머니 남작 부인의 눈치를 본다.

이미 다 알고 있으니 자신들의 의문에 대한 대답도 지니고 있을 터.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러분들에게 존 나센의 방식을 강요하지는 않을 거예요. 물론!”

검지를 들고 살짝 저으며 남작 부인이 말을 잇는다.

“존 나센의 경쟁 방식을 아예 제외하겠다는 것도 아니에요. 전투는 공평하게, 치열하게. 그러기 위해선 종목도 좀 많아야겠죠? 마침 여러분들은 학생이네요. 그러니까 육체 단련과 더불어서 학업에 대한 성취도도 보는 게 좋겠네요.”

“어, 그럼 저는….”

“황녀님은 졸업 성적이 있으니까요. 아, 혹시 열심히 안 하셨나요?”

그 말에 황녀는 끄응, 하고 침음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황녀이기에 그냥 막 지낸 건 아니지만 열심히 한 것도 아니다.

“대신 황녀님은 단련의 성취도가 더 높잖아요? 이 정도는 해줘야 공평하죠.”

틀린 부분이 없었다. 해서 황녀는 결국 수긍하고 말았다.

“그리고 또 하나.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데.”

빙긋, 미소를 지은 남작 부인이 갑자기 카일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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