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토의 최근 기분은, 솔직히 말하자면 굉장히 좋았다.
일단 엘가의 조언이 정말 제대로 유효했다.
기사로서 끝나는 것이 아닌, 다시금 가문을 일으키고 싶은 넬.
그런 말인즉 귀족 사회에 다시 합류해야 한다는 뜻인데.
그러기 위해선 단순히 명성이나 공로, 그리고 자금만이 아닌.
귀족으로서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할 기본 지식도 필요했다.
사실 이 기본 지식은 말만 ‘기본’ 이지, 엄청나게 방대하다.
귀족들 사이에서 마음먹고 물 먹이려고 하면 말도 안 되는 질문까지 할 수 있다.
거기에 정확한 답을 하지는 못 한다고 해도, 최소한 비슷한 건 내놓아야 한다.
그렇기에 넬에게 있어선 그 온갖 지식들이 너무 급했다.
당장 이번 겨울 방학에 황실 기사단의 시종으로서 들어가기까지 한다.
이러니 넬의 마음이 다급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
레토는 바로 그 부분을 파고들었다.
온갖 지식들에 나름 자신이 있는 자신이다.
리토리오 대공가의 차기 가신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차후 부족함 없이 대공을 보좌하려면 온갖 걸 알고 있어야 한다.
그 부분을 레토는 강력하게 어필했고, 넬과의 시간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이안 님과의 개인적인 시간이 너무 확고해서 좀 불안했는데.’
이미 넬은 이안에게 개인적으로 검술 교습을 듣고 있다.
다른 이들은 하나도 없이, 오로지 넬 혼자서 말이다.
남자와 여자가 단 둘이서, 서로를 마주본 채 무언가를 해나간다?
이 정도면 없던 정분도 들어서 엮이는 사례가 빈번하다.
하물며 이안은 넬을 좋아한다고 했고, 넬도 이안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이런 식이면 둘의 사이가 감당도 안 되게 가까워질 터였다.
그 부분을 어찌 할 수 없었던 레토로서는 이번이 정말 최고의 기회였다.
비록 방학 전까지,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불과하지만.
그러는 사이 넬과의 관계를 굉장히 더 가깝고 친밀하게 할 수 있었다.
효과가 아주 제대로였다는 건 이안의 행동에서도 드러났다.
어느 날 갑자기 카일과 함께 나타난 그가 자신도 같이 수업을 듣고 싶다며.
대뜸 관심도 없던 학업에 열중하는 모습까지 보인 게 바로 그거였다.
살짝 불편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기분이 좋았다.
자신이 굉장히 잘 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니까.
이대로만 한다면, 또 넬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다면.
너무 격차가 벌어진 이 상황을 충분히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 바로 어제, 이안과 넬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음.”
종업식 전 워낙 업무가 많아 자리를 계속 비우는 엘가.
덕분에 레토는 속 편하게 학기 말을 보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틀 전에는 넬을 데리고서 조그마한 파티에도 다녀왔다.
표면적인 이유는 다른 귀족 자제와 영애들에게 넬을 소개하는 것이었지만.
또 다른 이유로는 당연히도 둘의 진전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래, 정말 딱 거기까지만 좋았다.
그 다음날 이안에게서 검술 교습을 받고 온 넬의 표정이.
레토로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 했던 것이었다.
“넬 양? 넬 양?”
“아, 아. 네.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항상 집중하시던 분이 갑자기 왜 이러실까요?”
“죄송합니다. 그, 사실은 아까 전 스승님. 그러니까, 이안 님의 검술이 너무 대단해서….”
넬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레토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처음부터 알고 있던 사실. 그러나 한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
결국 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기사로서의 위치다.
그것으로 자신의 가문을 부흥시키고, 귀족 가문에 합류를 하는 것이다.
즉, 기사로서 이름을 알리지 못 하면 귀족이고 부흥이고 애당초 불가능하다.
지금 레토가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모든 지식들도.
넬이 훌륭한 기사가 되어야만 한다는, 그 선조건이 해결되어야 한다.
‘결국… 안 되는 건가.’
씁쓸한 마음이 생겨났다. 자괴감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조금이라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넬이라면, 분명히 그것을 알아차리고 굉장히 미안해 할 테니까.
‘나는 넬 양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은 거야. 그래, 그게 다야.’
왜 넬을 돕고 있는가. 그녀가 당당히 귀족 일원으로 복귀하기를 바라서다.
그렇게 해서 다시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그 과장에서 자신의 도움을 받고, 그걸 알아준다면 더 좋겠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이 욱씬거림은 어쩔 수가 없다.
조금은 기대를 했는데. 혹시, 라는 게 있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 자신은 결국 이안을 넘어설 수 없는 걸까?
‘사실, 이안 님이 보기엔 내가 갑자기 끼어든 걸 수도 있어.’
이안이 레토를 친구로 여겨 밀어내지 못 하는 거였다면.
레토는 자신이 끼어든 포지션이라고 생각해서 막 들이대지를 못 했다.
생각해보면 그럴만도 한 것이, 원래 이안과 넬은 계속 붙어 다녔다.
검술을 가르쳐달라는 넬. 그리고 그걸 수락한 이안.
이후로 이안이 가는 곳마다 항상 넬이 따라붙어 다녔다.
아직 여자라는 걸 몰랐을 때라곤 하지만 그건 확실했다.
당장 레토는 대공가의 일이 바빠서 움직일 수 없었을 때도.
두 사람은 함께 존 나센을 방문하여 그 힘든 시기도 함께 이겨냈다.
같은 고생을 하고, 검사로서 힘든 점을 알고 또 공유하는 사이.
보낸 시간도 많고 무엇보다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레토 입장에선, 당연히 자신이 굴러온 돌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후우우….”
한숨을 푹푹 내뱉으며, 레토는 터덜터덜 걸음을 떼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고 있지만 아무렇지 않는 건 또 너무 힘들다.
“레토 형제님?”
그렇게 아카데미의 인문관 근처를 지나고 있는데.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아… 성녀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어깨가 축 쳐져있으시네요.”
“예? 아, 아닙니다. 아무 일도요.”
급히 두 손을 내저으며 부정해보는 레토.
그에 성녀는 흐음?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인문관에는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혹 제 속내를 들킬까, 레토는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시험도 끝났겠다, 강의도 마무리되었겠다, 시간이 비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아카데미 측에서 제게 아카데미의 학생 분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도회를 부탁해서요.”
“그렇군요.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직 끝이 아니에요. 이제 다음으로 마법관에 가야 하는데… 그, 이쪽으로 가야 하나요?”
성녀가 어마무시한 길치라는 건 진작 엘가를 통해서 들었다.
해서 레토는 그쪽이 아니라고 말하곤 본인이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자신의 마음이 울적하다곤 하나 그건 별개의 일.
지금 눈앞에 서있는 성녀는 언젠가 엘가와 똑같은 위치에 있을 여인이다.
마법관으로 향하는 길, 레토는 슬쩍 대화 주제를 내놓았다.
“기도회라고 하시면, 기도를 올리는 게 주된 겁니까?”
“사실 기도가 주 목적은 아니에요. 학생들의 고민을 듣고, 거기에 부족하나마 조언을 하는 게 바로 기도회의 주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그렇군요.”
“네. 바로 지금처럼 말이죠.”
“예?”
“지금처럼, 레토 형제님의 고민을 듣는 거 말이에요.”
성녀의 말에 레토가 무슨 말이냐고 반문하려는 찰나.
혀를 찬 성녀가 그대로 레토를 끌고선 분수대 앞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 앞, 잔디밭 위에 그를 풀썩 앉히곤 그 옆에 같이 앉았다.
“성녀님?”
“기도회 시간까지는 아직 20분 넘게 남았어요, 레토 형제님. 그러니까, 제 걱정은 마시고 이제 본인의 걱정거리를 솔직히 털어놓는 것이 어떨까요?”
들킨 건가, 라고 속으로 중얼거린 레토.
그러다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민 주제는, 이미 하고 있던 것과 동일했다.
넬을 좋아하는데. 이미 이안의 위치는 확고한 상황.
해서 검술 대신 다른 것으로 틈을 벌리고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잘 통한 것 같아서 기분이 무척 좋았는데.
결국 이안의 무기인 검술은 결코 이길 수 없었음을.
하지만 이안을 탓할 생각은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애당초 중간에 끼어든 건 레토, 본인이니까.
그래서 더더욱 갈팡질팡이다. 더욱 헛갈린다.
“…부끄럽게도, 이런 상황입니다.”
성녀는 레토의 말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물끄러미 레토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짓는다.
“레토 형제님.”
“네, 성녀님.”
“다시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예?”
“검술.”
성녀의 말에 레토는 순간 황당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 했다.
검술을 다시 해보라니? 이안이 이미 꽉 잡고 있는 것인데.
그리고 그걸 다시 한다고 해서 무엇이 좋은 건지도 모르겠는데 말이다.
“이안 형제님보다 부족하다는 걸 걱정하고 계시겠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레토 형제님의 검술이 이안 형제님보다 못 하다고, 넬 자매님께서 말씀이라도 하셨나요?”
성녀의 물음에 레토는 그런 적은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성녀님. 그건 누가 봐도….”
“넬 자매님에겐 앞을 위한 스승도 물론 필요하겠죠. 하지만, 때로는 먼저 앞서나가서 자신을 이끌어줄 스승 외에, 옆에서 같이 걸어 나갈 벗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어….”
“언젠가 카일 형제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사람은 다른 누군가의 압도적인 것에 경외심과 동경심을 가지면서도, 또 나와 비슷한 이에게 동질감을 지니기도 한다고. 항상 남보다 더 멀리, 더 앞에 있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오히려 그보다도 더 빛나게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노력’ 이라고 말이죠.”
그러니까, 이안은 압도적인 검으로서 넬을 기쁘게 만든다면.
당신은 끈질긴 노력으로서 넬에게 든든함을 심어주라고.
나는 함께 걸어나갈 준비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성녀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요. 레토 형제님. 미안해하지 마세요. 당당하게 맞서세요.”
“무슨 말씀을….”
“이안 형제님께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넬 자매님에게, 이안 형제. 당신이 가장 잘 어울리는 최고의 남자임을 증명하라고. 그래서 증명하면 미련 없이 물러나는 거고, 만약 그게 아니라면 레토 형제님 본인이 더 낫다는 걸 역으로 증명할 수도 있는 기회가 될 테니까요.”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고. 형제님의 마음을 좇으라고.
성녀는 레토를 향해 잔잔한 미소를 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