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대로 해라. 그래, 이렇게 조언을 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적당하게 다가가라.’ 의 연장선이었을 뿐.
이안더러 정말로 ‘평소 하던 대로만 해라.’ 라고 말한 게 아니었다.
만약 이안을 그대로 두었다면, 레토라는 경쟁자 때문에 긴장해서.
혹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택하면 어찌 하나 초조해서.
되지도 않는 식으로 과하게 오버를 했을 확률이 아주 높았다.
해서 평소 하던 대로만 하라는 말을 해준 것이다.
‘그런데, 설마 그렇게 이해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거지.’
절로 오, 세상에. 라는 탄식이 흘러나온다.
그러니까 이 인간은 지금, 정말 좋아하는 여자를 앞에 두고서도.
원래 대하던 대로 대화하고, 행동하고, 그랬다는 거 아닌가.
레토가 치고 올라가기 전에 우위를 점해야 하는 상황인데.
심지어 카일 본인이 밀어주기까지 했으니 더욱 잘 되어야 하는데.
이 남자는 결정적인 순간에 또 눈치가 없고 말았다.
“이안. 잘 들어요. 내 말은 그게 아니고요.”
결국 자신이 했던 말의 진짜 뜻을 알려주는 카일이었다.
대체 내가 왜 이것까지 알려주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안이잖아. 원작에서 성녀조차도 혈관 마크를 띄웠다는 그 인간.
이 정도면 오히려 양호한 편이다. 그래, 이 정도면 무난하지.
“…혹시 막, 하던 대로 하라고 해서 검술 훈련할 때도 막 몰아붙였어요?”
제발. 제발 그랬다고 말하지는 말아줘. 제발.
너 거기서까지 평소대로 했다고 하면 죽빵 한 대 맞는 거야.
“…아니. 그, 거기까지는 평소대로 못 하겠더군.”
“잘 했어요. 와, 십 년 감수했네. 진짜 잘 했어요, 이안.”
존 나센 남작령에 있을 때, 그리고 존 나센 남작 밑에서 굴려질 때.
무언가 크게 감명을 받은 것이 있는지 이후론 넬도 존 나센 식으로 굴렸던 이안이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넬이 여자라는 걸 모를 때였다.
평소에는 높낮이 차이가 없는 목소리를 좀 내다가.
넬이 지치거나 느려지기라도 하면 바로 우레와 같은 고함 소리 장전.
그렇게 몰아붙이고 또 한계까지 내몰면서 또 다시 한 단계 성장.
‘거기에 또 하필 아버지한테 이상한 걸 배웠어.’
잘 하면 잘 했다고 최소한 칭찬이라도 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이안을 담당했던 인물은 다름 아닌 존 나센 남작이었다.
무언가를 해내면 ‘잘 했다!’ 가 아니라 ‘우리 그 다음으로 넘어가자!’ 가 먼저 나온다.
이걸 또 뭐 좋다고 그대로 받아들여서 넬에게도 적용한 이안이었다.
‘…그 모든 걸 최근까지 유지했다면 이건 무조건 지는 싸움이었지.’
이안이 나쁜 남자 컨셉으로 밀고 갈 만한 인물도 아니고.
덤으로 넬이 그쪽 취향에 빠진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부드러운 마음, 따스한 진심을 보내는 쪽에 더 마음이 기울 터.
당연히 이안의 기존 단련 지도 방식은 절대 지양해야 할 것이었다.
“지금 넬은 어디 있어요. 시험 다 끝난 거 아니에요?”
“그렇지. 내가 알기론 레토와 함께 역사 공부를….”
“아니, 잠깐만. 지금 레토랑 같이 있다고요?”
카일의 반문에 이안이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덕분에 ‘당신은 뭐하고 둘이 있는 건데요!’ 라는, 카일의 고함을 들어야만 했다.
“그게, 기사만이 아니라 다시금 귀족이 되기 위해선 기본 소양이 필요하다고 했어. 그런데 넬은 이미 어릴 적부터 허울만 귀족이었지, 이렇다 할 교육을 받은 게 없다고 하더군.”
“그래서요. 설마, 그걸 레토가 봐주겠다고 한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이안이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 ‘나는 공부와는 영 거리가 멀어서 그거까지 붙잡을 수가 없었다.’ 란다.
“이 화상아.”
당장이라도 이안의 머리통을 한 대 내려치고 싶었다.
이안만 도와주고 레토는 도와주지 않는 것 같아서.
아니, 거의 방해만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내심 미안했는데.
이 꼴을 보자니 이안만 도와주는 것에 전혀 미안할 필요가 없었다.
혼자서 잘만 하고 있는 레토와, 전혀 못 하는 이안.
이 중에서 이안을 돕는다고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이 정도면 도와주는 게 맞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왜, 왜 그러냐.”
“그럴 때는 ‘나도 같이 공부를 하고 싶다.’ 라고 하면서 사이에 껴야죠.”
“…아.”
“그렇게 하면 넬 옆에 있으면서 레토 견제도 하고! 덤으로 검술만이 아니라 공부에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거였잖아요!”
“오, 오오.”
‘오오.’ 는 무슨 ‘오오.’ 야. 이 인간아.
카일이 이를 악물자 이안이 윽, 하고 침음을 흘린다.
“미안하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 했어.”
“이제부터는 하는 게 좋을 거예요.”
다음 이어진 카일의 말은, 굉장히 슬픈 내용이었다.
“레토와 넬이 결혼할 때, 뒤에서 ‘당신을 사랑했어!’ 라고 외치는 포지션 맡고 싶지 않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절대 안 그러고 싶다.”
“그러니까 잘 좀 하자고요. 도와주면 뭐가 보이기라도 해야 하는데, 이게 뭐냐고.”
적당하게 이안을 위협해준 카일은 그를 이끌고서 어딘가로 향했다.
이 둘이 도착한 곳은, 아카데미 내부에 마련된 일종의 스터디 룸.
바로 이곳에서 레토가 넬의 여러 학업을 봐주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원래부터 리토리오 대공가의 가신단 자제로 태어난 레토.
당연히 미래의 주군을 보좌할 수 있도록 각종 학업을 마스터했을 것이다.
이안처럼 무술 부분까지는 어떻게 하지 못 했다고 쳐도.
단순한 서류 업무부터 다음 후계자를 교육하기 위한 부분까지.
그야말로 미래의 대공가 가신으로서 준비가 되었다고 보는 게 맞다.
따라서 레토가 넬의 학업을 봐주는 건 문제될 게 없다.
거기서 이안이 ‘내가 맡아줄 수 있다!’ 라고 하는 게 문제다.
‘그래도 라이벌인 걸 알고 있으면, 어떻게든 틈을 찾았어야지.’
혀를 차며 카일은 넬과 레토가 한창 공부 중인 곳으로 들어갔다.
“집중하고 있는 중에 미안하지만, 실례 좀 할게요.”
“…해서 제국력 193년에… 아, 카일님?”
한창 넬의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던 레토가 벌떡 일어선다.
아직 시간 남았다고. 지금은 그냥 카일일 뿐이라고 해도.
레토는 언제부터인가 카일을 미래의 대공 반려로 여기고 대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벌떡 일어나선 예를 보이는 것이고 말이다.
“카일님! 오셨습니까!”
덤으로 넬도 화들짝 놀라서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토에게 있어 카일이 제 주군이 될 사람의 반려라고 한다면.
넬에게는 다시 한 번 비상할 모든 걸 만들어준 은인이었다.
“다들 자리에 좀 앉아요. 누가 보면 대단한 사람 온 줄 알겠네.”
“카일 님은 대단하신 분이 맞습니다!”
“알겠어요, 넬. 그러니까 이제 그만. 그만 하고 좀 앉죠.”
자리를 권하니 넬과 레토 모두 얌전히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는 카일의 입에서 다음 말이 무엇이 나올지 기다린다.
‘…레토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따지고 보면 불공평하다고 할 수 있다.
이안은 계속 도와주고, 레토는 반대로 방해를 하는 꼴이니.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안을 그대로 두자니 너무 불쌍하다.
불공평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애당초 그런 놈과 경쟁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저쪽은 이미 100의 준비를 했는데 이쪽은 50은커녕 10도 겨우 넘긴 수준.
“실은 부탁할 게 좀 있어서요. 레토, 당신한테요.”
“무엇이든 말씀하시길.”
“지금 넬이 귀족으로서 무시 받지 않게 도와주고 있는 거잖아요?”
그러자 대답은 레토가 아닌 넬이 내놓았다.
얼굴을 붉히면서, 볼을 긁적거리면서 말이다.
“부끄럽게도 그렇습니다. 제가 생각보다 학업에 약해서….”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요. 원래 공부라는 건 죽을 때까지 하는 거니까.”
“엇. 레토 씨도 그런 말씀을 하셨었습니다.”
음, 확실히 둘 사이가 나빠 보이지는 않네.
레토가 딱히 뭔가 노리고 이러는 게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조금씩 친해지고 가까워지는 건 맞으니까.
“레토, 당신이 넬과 함께 봐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있어서.”
“…혹시, 이안 님인 겁니까?”
얼추 예상은 했다는 듯, 레토가 덤덤한 목소리를 낸다.
그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레토가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인다.
“예상했다는 눈치네요?”
“이안 님이라면 당장이라도 기사 작위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카일 님께서도 들으셨겠지만 얼마 전에 제국의 10강 분들께 좋은 평가를 받았으니 말이지요.”
일반 기사에서 멈춘다면 또 모를까, 제국 10강까지 갈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런 자에게 황실에서 미쳤다고 귀족 작위를 내리지 않겠는가.
잘못하다가 다른 쪽으로 돌아서기라도 한다면 그보다 더 한 피해는 없다.
“…해서 이안 님께도 조만간 귀족 작위가 내려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학업에 큰 뜻을 지니지 않은 그 분의 모습도 생각났고요. 자연스레 도움을 청할 쪽은 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워낙 논리 정연한 설명에 카일도 부연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저 바깥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이안을 부르는 게 전부였다.
이내 이안이 들어오자 넬이 반색을 하며 그를 맞이한다.
싫어하는 이를 만난 기색은 아니다. 굉장히 반가워하는 눈치다.
“스승님, 이안 님도 오실 줄 알았습니다!”
“아, 그래. 넬. 공부는 좀 어때?”
시바. 국어책을 읽어도 그것보단 낫겠네.
저놈은 대체 검술 없었으면 어쩌려나 싶다.
혀를 찬 카일은 레토를 돌아보며 슬그머니 말을 건넸다.
“저, 레토.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그러시죠.”
군말 없이 카일을 따라 나오는 레토.
그렇게 바깥으로 나서자 카일은 레토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레토.”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자꾸 이안만 도와주는 거요. 공평성을 유지해야 하는데, 저 인간이 자꾸 이상한 실수를 해서 나도 모르게 도와주고 있네요. 앞으로는….”
“괜찮습니다. 사실, 저도 이번 일은 공녀님께서 먼저 권하신 거여서 말입니다.”
“엘가님이요?”
카일의 반문에 레토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저와 이안님의 차이점은 학업에 있고, 다시 귀족이 되어야 할 넬에겐 그 부분이 부족하다. 그러니 그 부분을 이용한다면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다. 이렇게 조언을 해주셨답니다.”
“아하….”
알고 보니 이미 레토 뒤엔 든든한 조력자가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라면 이안 뒤에도 있어야 맞는데… 하필 주술 연구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
‘그러면 내가 도와줘도 문제가 없겠구나.’
오히려 가슴 한 구석이 편안해진 카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