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나센 남작령의 일과는 다른 곳과 다르지 않다.
마땅히 일을 해야 할 자들은 일을 하고, 업무가 있는 자들은 업무를 본다.
운동에만 미쳤다고 하지만 하루 종일 그것만 붙잡고 있지는 않다.
응당 본인의 일을 다 마치고서. 그 후에 남는 시간을 전부 투자하는 것이다.
“으음.”
양은 그리 많지 않지만, 어찌 되었든 남작령 내부의 일들.
존 나센 남작은 이런저런 고민 끝에 업무를 전부 마무리했다.
다른 이들 같았다면 휴식을 취하던가, 아니면 여유를 즐기던가.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냈을 테지만 존 나센 남작은 달랐다.
‘지금쯤이면 잘 가고 있으려나. 마음 같아선 바로 찾아가고 싶지만.’
얼마 전에 이곳 대륙으로 건너왔다는, 또 다른 대륙의 사람들.
사실 존 나센 남작은 누가 무슨 목적으로 건너왔든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그것은 제국이, 황제가 고민할 일이지 자신이 할 일이 아니니까.
그래. 적어도 그들이 가져온 것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
성스러운 육체 단련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이상한 것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다행히도 자신의 막내 아들, 카일이 잘 처리했다고 한다.
감히 이딴 걸 들이고서 좋은 소리를 들을 줄 알았냐고.
아예 두 손으로 꾹꾹 뭉개버려선 이것을 멀리한다는 척화비까지 세웠단다.
참으로 마음에 드는 일처리였다. 박수까지 쳐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다음 일에 존 나센 남작은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과부하가 걸리는 반대 방향으로 힘을 주는 운동 기구.
건너편 대륙의 사람들은 그런 기구를 만들 기술이 있었다.
참으로 혐오스러운 그 기계가, 반대로 더 큰 과부하를 줄 수 있는.
존 나센에 꼭 필요한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해서 남작은 그들을 처벌하는 대신, 순순히 돌려보내 주었다.
어차피 카일이 정리를 하기도 했고 이쪽이 바라는 것도 있다.
그렇다면 얌전히 보내주어서 더 큰 이득을 취하는 게 옳은 일이었다.
“그렇단 말이죠. 그러면, 언제쯤 완성한다고 하던가요?”
“시간이 된다면 저도 가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저도요! 와아, 그런 기구는 상상도 못 했는데!”
마리아 남작 부인부터 시작해서 첫째인 리어, 둘째인 레아까지.
과부하를 두 배 이상으로 받을 수 있다는 기구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다.
그건 남작령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단련이란 매일 해도 전혀 지겹지 않은, 너무나 즐거운 것이지만.
매번 쓰는 기구는 응당 지루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
무게를 늘린다고 해도 언젠가는 무게를 더 늘릴 수 없는 선이 온다.
그 때가 되면 극히 적은 자극으로 최대한 많은 양으로서 승부를 보는.
썩 달갑지 않은 단련 방법을 취해야 할 것이 분명했다.
현재의 존 나센 남작이 바로 그런 경우에 속했다.
봉에다가 달 수 있는 원판도 한계가 있고, 기구에 올릴 추도 한계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저들에게 제안한 기구는 정말 신의 한 수였다.
이러니 언제쯤이나 그들이 제 고향에 도착할까.
언제 그 기구들을 만들기 시작해서, 언제 완성품을 내놓을까, 하는.
이런 행복하고 두근두근거리는 생각을 하는 건 당연했다.
“남작님.”
얼른 가서 최대한의 과부하로 운동할 생각에 부풀었던 찰나.
닐 영감이 슬그머니 집무실로 들어와선 무언가를 내민다.
“막내 도련님께서 보내신 겁니다. 굉장히 급하게 보내신 것 같은데.”
“막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존 나센 남작은 서신을 받았다.
원래라면 ‘운동 할 시간이니 다 하고 보겠다.’ 라고 말했을 테지만.
이 서신을 보낸 게 다름 아닌 막내였으니 물러서준 것이었다.
“음.”
서신을 받은 존 나센 남작이 안의 내용들을 읽기 시작했다.
아주 꼼꼼하게, 혹시나 놓치는 내용이 있지 않도록.
“…뭐라고 쓰여 있는 겁니까?”
은근히 궁금하다는 낯빛으로, 닐 영감이 질문을 던진다.
이런 식으로 카일이 서신을 보낼 때마다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예로 들자면 얼마 전 있었던 동쪽으로의 즐거운 나들이라던가.
“으음.”
그런데 오늘은, 존 나센 남작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서신을 보고 또 보고. 그러면서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남작님?”
“닐 영감. 가서 식솔들 좀 이곳으로 와달라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닐 영감이 빠르게 자리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잠시 후, 마리아 남작 부인이 가장 먼저 나타났다.
“막내한테 서신이 왔다면서요.”
“그래요. 한데, 내용이 조금 이상해서.”
“무슨 내용이기에 그런 건데요?”
남작에게서 서신을 받아든 남작 부인이 빠르게 내용을 읽어간다.
그 사이, 리어와 레아도 비슷하게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아.”
도통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의 존 나센 남작과는 다르게.
남작 부인은 카일이 보낸 서신을 읽자마자 이해했다는 표정이 되었다.
“부인은 이해가 된 겁니까?”
“네. 이게 뭐 어려운 일인가요? 오히려 바로 이렇게 해야죠.”
라고 말한 남작 부인은 카일의 서신을 리어와 레아에게 내밀었다.
그걸 받아든 남매는 사이좋게 안에 적힌 내용을 읽어나갔고.
“…이게, 큰 상관이 있는 건가?”
“오라버니. 무슨 말이에요. 당연히 큰 상관이 있는 거죠!”
남작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리어.
그리고 남작 부인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레아로 나뉘었다.
“이상하군요. 막내는 아카데미 졸업 이후에나 존 나센 식으로 첫 번째 제수씨를 가리겠다고 한 거 아니었습니까?”
“나도 그렇게 알고 있다. 첫째 며느리를 정하는 건, 졸업하고 나서 하겠다고.”
남작과 리어의 말에 남작 부인이 쯔쯧, 혀를 찬다.
“아니죠. 오히려 카일이 잘 생각한 거예요. 여인에게 있어서 나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건데. 이건 시간이 가면 한쪽에 결코 공평하지 않은 부분이 될 거예요.”
“어머니 말이 맞아요, 아버지. 그리고 오라버니! 여자에게 나이는 진짜 민감한 거라고요!”
아예 테이블까지 탕탕! 하고 두드리는 레아까지.
존 나센 가족들이 갑자기 한 자리에 모여 이런 논의를 한 이유.
그것은 카일이 보낸 서신에 적힌 이 내용 때문이었다.
-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황녀님의 나이를…. -
- 이것은 공평하지 못 하다고 판단,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크게 앞당겨야 할 듯…. -
- 아마도 제가 보기엔 다음 년도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시작해서…. -
존 나센의 첫 번째 며느리를 정하는, 더 나아가 무한 경쟁의 신호탄을 쏘는.
그 시기를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앞당기자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리 되면 제수씨들만 갑자기 곤란해지는 거 아닙니까.”
“나도 그걸 걱정한 거다. 며늘 아가들이 대부분 졸업 후를 생각하고 있을 텐데.”
“그건 동서들이 우리 남작령에 오면 설명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래요. 아이들에겐 미안하지만, 경쟁은 공평해야 하는 법이죠.”
남작 부인과 레아의 말에, 남작과 리어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사실 그 공평이라면 당장 하는 건 세 여자들에게 불공평한 게 아니냐는.
그 부분을 말하려고 했으나 재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나이’ 부분 언급이 될 때마다 묘하게 날카로운 눈매를 보이는.
제 아내와 제 딸, 제 어머니와 제 여동생의 눈치를 본 것이었다.
“어쩌실 건가요. 막내 말대로 하실 건가요?”
“카일 말대로 하셔야 해요. 4년 후에 20대 초중반과 싸워야 하는 20대 후반이라니! 이건 솔직히 너무 잔인하다고 봐요! 저는 아예 지금 당장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라고요!”
“…알겠으니까, 그만 합시다. 레아, 너도 그만 하거라.”
존 나센 남작은 곧장 카일에게 보낼 답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번 방학에 다시 한 번 며늘아가들과 함께 오는 것 아니냐고.
그 때 사정을 설명하고 그들의 의견도 한 번 듣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어차피 조만간 종업終業 이니 그게 낫지 않겠냐고 말이다.
- 것보다 네 엄마와 네 누나가 어찌나 그래야만 한다고 성화인지…. -
와중에 막내에게 집안 소식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는 남작이었다.
*
‘역시, 예상대로 어머니와 누님이 격하게 동감을 해주셨군.’
존 나센에서 온 답장을 받아든 카일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럴 줄 알았다. 역시, 여자 나이 문제에 민감한 건 같은 여인들.
황녀의 상황을 알려주니 십분 동감하고 동의해준 것이다.
이것으로 일단 부모님의 허락은 받아냈다.
남은 건 네 명의 여자들에게 설명을 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
안타깝게도 그들. 엘가와 티샤, 성녀는 달갑게 여기지 않을 확률이 있다.
원래라면 3년이 넘게 시간이 남는 것이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진짜 경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그 전에 적당하게 단련을 하고 수준을 맞추려고 했을 텐데.
남은 시간동안 자신과 함께 여러 추억을 쌓아두려고 했을 수도 있는데.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는 경우까지 맞이하게 된 것이니 말이다.
‘어쩌겠어. 내 업보다, 업보. 다 감당해야지.’
후우, 한숨을 내뱉은 카일은 방을 나섰다.
시험도 끝났고, 이제 남은 2학기 시간은 일주일 정도.
그러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아카데미 생활을 즐길 생각이었다.
여기선 가끔 먹어주는 군것질도, 고향에 가선 불가능할 테니까.
‘무슨 최후의 만찬도 아니고. 어으, 고향에 돌아가면 좀 힘들긴 하겠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카일의 눈동자에 빛이 감돈다.
저 멀리서 터덜터덜 다가오는 이안을 포착한 것이었다.
“이안!”
“…아, 카일.”
“뭐예요. 그렇게 축 쳐진 모습은? 이안, 당신답지 않은데.”
매사에 항상 자신만만하게 임하던 이안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유독 힘이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
“왜요. 설마, 넬이랑 잘 안 되고 있어요?”
한 번 던져본 말이었는데, 이안의 얼굴이 말 그대로 울상이 되었다.
‘아이고. 진짜였나 보네.’
제 실수를 자각한 카일은 입을 다물었다.
혹시 이안이 화제를 돌리면 얼른 맞장구를 칠 준비를 하면서.
“…그래.”
하지만 이안은, 그딴 건 절대 모르는 남자였다.
“솔직히 말하겠다. 요즘, 넬이랑 잘 안 돼.”
“이런.”
“분명 나는 평소처럼 대하고 있는데, 부담스러워할까 자제하고 있는데.”
카일이 조언한 부분이었다. 너무 과하게 들이대지 말라고.
평소처럼 대하면서 적당한 시기를 옅보라고 말이다.
“설마, 너무 평소처럼 대한 건 아니고요?”
아니지? 너 혼자인 것도 아니고 레토라는 라이벌도 있는데.
평소처럼 하라는 건 부담감을 주지 말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다.
정말로 ‘평소처럼만’ 굴면서 넬을 보라는 뜻이 아니었다는 거다.
“…정말 평소처럼 대했는데.”
“아이고.”
카일은 이마를 짚었다.
어디선가 이안을 응원하던 티샤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