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266화 (266/318)

“아팠어.”

“그러니까 누가 이기지도 못 할 거 이 악물라고 했습니까?”

전력을 다 한 황녀와, 적당히 한 번 부딪쳐준 카일.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의 것으로 나타나고 말았다.

쯔쯧, 하고 혀를 차며 카일은 황녀의 손을 봐주었다.

이미 손에 가득하던 상처들은 마법으로 말끔하게 치유되었다.

지금은 살짝 붉은 기운이 감도는 것 외엔 특이할 것도 없다.

그래도, 일단 다쳤으니 봐주는 게 당연하다.

누구 때문도 아닌, 자신으로 인해 입은 상처 아닌가.

그게 당연한 수순이었든. 혹은 허락한 일이든.

“다행히 흉은 안 생기겠네요.”

“당연하지. 마법으로 싹 고쳤잖아.”

“치료 마법이 전지전능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큰 상처는 간혹 흉터를 남기기도 한다.

치료 마법도 따지고 보면 인간의 자연 회복을 극대화시키는 것.

당연히 상처가 크면 클수록 남는 흉터도 커질 수밖에 없다.

황제의 허락을 받고, 제대로 한 판 할 때는 기분이 참 좋았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황녀와 일격을 나눌 때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한 차례 부딪침이 마무리되니 자신은 멀쩡한데 황녀만 다쳤다.

무인으로서 다치는 건 숙명이라지만, 본인이 그 부상을 입히는 건 좀 그렇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사람 마음이란 게, 참 무섭네.’

이젠 눈치 볼 필요 없이, 잘 대해주어도 상관이 없는 여자로 바라보면서.

다른 건 몰라도 자기 손으로 다치게 하는 건 영 껄끄러운 게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남이 또 황녀를 다치게 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더 싫고.

“카일. 너 표정 이상해. 왜 자꾸 미안한 얼굴을 하는 거야?”

“미안하니까 미안한 표정을 짓죠.”

“그러니까 뭐가 미안하다는 건데.”

설명을 하려니 당연히 얼굴이 화끈거린다.

황녀 앞에서 ‘당신은 내 여자라서! 다치는 게 마음이 아프다!’ 라는 말을 내뱉기가 굉장히 부끄럽고 또 난처해진다.

여태까진 황녀랑 아주 잘만 치고 박고 싸웠으니까.

“…황녀님 몸에, 상처 늘리는 거요.”

계속해서 보채는 황녀 덕분에, 카일은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유를 듣자 황녀는 ‘엥?’ 하고 탄식을 흘린다.

“뭐라는 거야. 여태까지 나 잘만 메다꽂았잖아.”

“그렇게 강조 안 해주셔도 됩니다. 흠흠, 아무튼! 다른 분들은 엄청 소중하게 대해주려고 노력하는 중인데. 황녀님만 무슨 싫어하는 사람 대하듯 하고 있는 느낌이라서요.”

“아하. 이해했어.”

고개를 끄덕거리던 황녀가 말을 잇는다.

“하지만 내가 괜찮아. 그러니까 카일, 너도 괜찮아.”

“….”

전혀 이해를 못 하신 거 같은데요.

당신이 괜찮다고 해도 내가 불편하다고요, 내가요!

“카일, 너 나 싫어해?”

“이젠 아니죠.”

“그러면 너 나 다치게 하고 싶어?”

“제가 미쳤어요? 그런 짓을 왜 해요.”

“내가 그런 것처럼, 카일. 너도 나를 좋아하는 거지?”

카일의 얼굴이 붉게 변하든 말든, 부지런히 직구만 날리는 황녀.

덕분에 카일은 끙끙거리며 대답만 할 수밖에 없었다.

“…네. 좋아하죠. 아주 많이요.”

“그러면 된 거잖아.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다치게 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러면 전부 나를 위해서 해주는 거니까 미안하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 아니야?”

“그게 그렇게 되긴 하는데….”

하아, 한숨을 내뱉은 카일은 황녀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다른 분들은 ‘존 나센’ 식으로 대할 생각이 전혀 안 드는데. 이상하게 황녀님은 그런 식으로 자꾸 대하는 것 같아서. 황녀님은 괜찮다고 해도 제가 미안하잖아요.”

오붓하게 데이트를 즐기는 것도 아니고. 같이 파티에 참석하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반짝이는 추억을 쌓는 것도 아닌, 피와 먼지가 가득한 대련이라니.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게 너무 막 대하는 느낌이 없잖아 있다.

“에? 카일. 혹시, 대련하는 게 싫은 거야?”

“대련 자체는 좋죠. 하지만 황녀님은….”

“네가 아무나하고 대련을 해줘?”

그 물음에 카일은 잠깐 고민한 후 고개를 내저었다.

존 나센은 결코 아무나하고 겨루어주지 않는다.

그만한 자격이 있는 자. 혹은, 그만한 노력을 한 자.

오직 그들에 한해서만 진심으로 나서줄 뿐이다.

“다른 10강들하고도 거의 안 하고. 그나마 교단의 프리실라 단장 정도잖아? 그리고 그, 누구더라. 황실기사단에서… 아, 맞아. 이안, 걔는 대련이라기보다는 그냥 너한테 일방적으로 맞는 것 같고. 레토였나? 공녀 옆의 그 남학생. 걔도 이안이랑 마찬가지인 것 같고.”

“이안과 레토를 일방적으로 구타한 적은 없습니다만. 저는 그저….”

“그걸 구타라고 부르는 거야.”

팩트로 두들겨 맞는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하지만 이건 진짜 억울한데. 주먹 날리는데 못 막아서 맞는 걸 어쩌라고.

“아무튼 결론은, 절대 네가 나를 막 대한다는 게 아니라는 거.”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이상한 표정도 짓지 말고!

황녀는 그리 말하면서 카일의 얼굴을 붙잡고 장난질을 쳤다.

“난 또 뭐라고. 그걸 걱정했던 거야?”

“걱정 안 할 수가 있냐고요. 혹시나, 만약에라도 황녀님이 서운해 하고 있다면….”

“내가 서운한 건 여자들이 자꾸 나만 견제하는 거였어. 너랑 싸우는 건 언제든 환영인데?”

“이러다가 매일 부부 싸움 하는 건 아닐는지 모르겠네요.”

카일은 그냥 장난으로 던져본 말이었다.

그런데 황녀는, 거기서 대뜸 무언가를 낚아챘다.

“부부? 뭐야. 우리 결혼하기로 한 거야?”

“예? 아, 그렇죠. 언젠가는 하겠죠. 그런데 제 말은 부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싸움이….”

“설마 이번 방학 때를 노려서 할 생각이야? 난 찬성인데.”

“황녀님. 제발 사람 말 좀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모든 건 아카데미 졸업 이후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

존 나센 몰라요? 하던 일은 일단 무엇이든 끝을 낸다.

그게 운동이든. 아니면 아카데미 생활이든!

‘누님이야 어쩔 수 없이 관두고 집으로 돌아오셨지만.’

아카데미 반파 사건은 아직도 전설적이라지.

거기에 요즘 존 나센이 아주 엄청나게 화제가 되어서 잊힐 수도 없게 되었다.

“…아쉽네.”

손가락을 살짝 오물거리며 아쉽다는 표정의 황녀.

거기서 카일은 본능적으로 이 여자가 굉장히 위험하다는 걸 느꼈다.

막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그런 위험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이성보다 본능을 택해서, 한 마리 표범처럼 상대방을 낚아챌까.

그리곤 기어코 과속을 하는 사태를 일으키지 않을까, 바로 그 위험이었다.

“안 돼요. 그러는 거 아닙니다. 진정하세요.”

“나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그래요? 그런데 왜 손이 자꾸 제 셔츠 안쪽으로 온답니까?”

여기가 무슨 아카데미 구석진 곳도 아니고, 자그마치 황궁 안인데.

이 황녀님이 미쳤나, 이러다가 황제 폐하께 걸리면 어쩌려고.

이거 불경죄로 잡혀가도 할 말이 없는 일인 건 알죠?

카일이 잽싸게 손을 쳐내자 황녀가 쳇, 하고 아쉽다는 기색을 내보인다.

그러고도 한 두어 번을 더 시도하다가 카일에게 저지를 당하고 말았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건데요. 이렇게 조급할 필요가 없다니까.”

“알아. 알고 있어. 하지만, 어쩔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뭐가 어쩔 수가 없는데요.”

“네가 아카데미를 졸업해도 20대 초중반이겠지만, 난 아니거든.”

거기까지 들은 카일은 아, 하고 탄식을 흘려야만 했다.

그래, 그걸 잊고 있었다. 자신과 엘가, 그리고 티샤, 성녀까지.

이들은 나이가 똑같지만, 황녀는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황녀는 카일 자신이나 그녀들보다 네 살이 더 많다.

즉,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가 되면 그녀는 20대 후반이라는 것.

여자로서 가장 아름다울 시기를, 그냥 덧없이 전부 보내고서.

슬슬 그 화려함이 덜해질 때 한창 물이 오른 세 여자와 경쟁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건… 이건 정말, 생각도 못 했다. 그래, 나이 문제는 누구나 다 민감한 법이야.’

카일은 다시 한 번 스스로를 타박했다.

은연중에 자꾸만 황녀에 대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중요한 부분을 잊고 있었을 리가 없다.

“물론 그 때가 되어도 자신이 없다는 건 아니야. 성녀도, 공녀도, 그리고 마녀도. 다 이길 자신이야 항상 있지. 그리고 내 신체는 다른 평범한 이들과는 다르니까. 하지만, 원래 그렇잖아. 남자도, 여자도. 한 살이라도 더 어렸으면 하는 걸.”

“알고 있죠.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여태 황녀가 보였던 모든 행동들이 이해가 가는 카일이었다.

물론, 황녀가 항상 나이 걱정을 했던 것은 절대 아니다.

단순히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했던 적도 적잖이 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이 걱정은 아주 최근에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카일 입장에선 그걸 알 리가 만무했다.

그저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며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것이 전부였다.

“…일단, 정말로 죄송해요. 황녀님. 제가 미처 거기까지는….”

“사과는 하지 마. 그러니까 더 슬퍼.”

“아, 네. 그러면… 음, 제가 다른 대안을 좀 생각해볼게요.”

대안. 그 말에 황녀의 두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

안타깝게도, 카일은 정말 대안을 생각하느라 그걸 미처 보지 못 했다.

“대안이라고.”

“네. 그러니까….”

“사실 가장 확실하고, 나도 만족스러운 대안이 하나 있긴 해.”

그게 뭔데요? 라고 말하려던 카일은 순간 흠칫했다.

황녀의 손길이 다시 한 번 셔츠 사이를 뚫고 들어온 것이었다.

‘이딴 게 대안…?’

카일은 바로 황녀의 손을 붙잡았다.

“동작 그만.”

“아, 왜.”

“밑장빼기는 안 된다고 했을 텐데요.”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오늘은 뺄 카드가 없어.”

“그건 또 무슨 말인데요.”

“안전한 날이라는 말!”

도대체 우리의 황녀님은, 분위기 좋게 끌다가 직진 뇌절을 한단 말이야.

한숨을 내뱉어도 몇 번은 내뱉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

어쩌다가 황녀의 만행을 목격해버린 황제였다.

가만히 황녀를 바라보던 황제는,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