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황실 근위기사단장.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연무장에 위치한 두 남녀 때문이었다.
“준비는 되셨습니까. 황녀 저하?”
“응. 충분해.”
“카일 공자도 준비되셨습니까?”
“네. 준비 끝났습니다.”
현 제국 10강의 일원과, 그 10강을 능히 상대할 수 있는 인물.
그 둘이서 연무장에 마주 보고 선 이유는 단 하나다.
‘대련인지. 아니면 결투인지.’
일단 확실한 건, 저 두 사람은 결코 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하니 살의를 품고, 혹은 명백한 적개심을 지니고 싸우지는 않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실 기사단장은 그야말로 초긴장 상태.
그 이유는 연무장 바로 앞쪽에 위치한 황제 때문이었다.
“폐하.”
초조한 얼굴빛을 하던 그는 황제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여러 의미가 함축된 의미로서 제 황제를 불렀다.
“걱정할 것 없다. 단장.”
“하오나….”
“그대의 의무는 오로지 나를 보호하는 것이지. 그 충심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또한 무시하고자 하는 생각도 없다. 다만, 오늘은 그리해도 좋을 것이다. 모두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어차피 죽기 살기로 싸울 게 아니라면 능히 제 힘 정도는 제어할 수 있다.
황녀도, 그리고 카일도. 설마 미쳤다고 황제에게 위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을 대비하여 이미 황제의 주변엔 보호 마법이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황제가 이렇게 가까이 자리한 이유는 또 있었다.
다름 아닌, 이번 주술 연구에서 결계 부분이 드디어 완성되었기 때문.
황제는 그 소식에 반색하며 친히 그걸 시험해보고자 했다.
제국 10강과, 그에 준하는 이들의 대련을 바로 앞에서 지켜보는 것으로서 말이다.
바이엔 대공과 티샤의 말에 따르면 위기의 순간 나타나는 결계라 했다.
보호 주술의 일종으로서 한 지역을 능히 감싸고도 남는 것이라고 했던가.
‘이게 정녕 제대로만 작동한다면 마법에 너무 많이 기댄 현 상황을 바꿀 수도 있다.’
결계와 비슷한 것은 마법에도 당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 정도의 대규모 지역 방어 마법은 시전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주술처럼 한 번 걸어두면 알아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
황제는 직접 보고 싶었다. 제국이 어떤 것에 투자를 한 것인지.
진전은 얼마만큼 되었으며 얼마나 강력한 효과를 지닐지 말이다.
“두 사람 모두, 시작하거라.”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카일과 황녀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이제부터 황제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고, 당장의 싸움에만 집중하겠다는 뜻.
직후 몸을 날린 황녀가 그대로 주먹을 휘두른다.
단순한 주먹질에 불과할 수도 있겠으나, 체술로는 10강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다.
콰아앙!!-
대기를 찢어발기는 굉음이 연무장 전체로 퍼져나간다.
웅! 하는 거대한 진동과 함께 땅이 잘게 떨릴 정도였다.
‘허어.’
황제는 물론이고 기사단장조차 속으로 탄성을 흘렸다.
저렇게 엄청나고도 무시무시한 위력이라니.
보고만 있어도 절로 손이 잘게 떨릴 정도였다.
그 강력한 공격을, 황녀 앞에 선 카일은 한 손으로 막아냈다.
아무 충격도 없는 듯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던 카일이 입을 연다.
“이게 끝은 아니겠죠, 황녀님?”
“설마. 이제 시작이지.”
붙잡힌 팔을 오히려 중심축으로 삼는다.
공중에서 한 바퀴 크게 돌리며 몸에 회전을 준 황녀.
그리곤 보는 이들의 등골을 섬뜩하게 만드는 돌려차기를 선보였다.
쿠쾅!-
다시 한 번 엄청난 굉음과 진동이 연무장을 휩쓸고 지나간다.
황제가 걱정이 된 기사단장이었으나, 정작 황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저런 모습은, 과거 북쪽에서 이미 많이도 보았던 것.’
그 때에 비하면 굉장히 작고 여리다고 할 수 있다.
저 두 사람이 자신을 생각해서, 그리고 서로를 생각해서.
최대한 힘을 내지 않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튼 견딜 만 하다.
“단장.”
“예, 폐하.”
“본격적으로 해도 좋다고 알리게.”
“…알겠습니다.”
더 이상 왈가왈부하는 것은 불충이라고 보일 수도 있다.
애당초 이 주변에 마법사들도 대기 중이고, 이번에 바이엔 대공이 본인의 이름까지 걸고서 성공 여부를 보장한 결계라는 주술도 준비가 끝났다.
해서 단장은 앞에 놓여있던 파란색의 기를 힘껏 흔들기 시작했다.
“저건 무슨 뜻이랍니까?”
“이제부터는 정말 제대로 부딪치라는 거야.”
“괜찮을까요? 저나 황녀님은 몰라도….”
“폐하도 무슨 생각이 있으시겠지. 우린 그냥 하라면 하면 돼.”
그리 말한 황녀는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이후 몸을 한 번 강하게 당기곤 다리 간격을 넓혔다.
이대로 한 번에 몸을 날려서 그대로 부딪치겠다는 듯이.
“황녀님.”
카일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걸로 일단 끝입니다. 나중에 다른 말하기 없어요.”
“안 한다니까? 난 이걸로도 충분해. 오히려 이게 더 좋은걸.”
티샤나 엘가는 자신의 애정 표현을 굉장히 갈구했다.
그리고 성녀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같이 찾기를 원했다.
모두가 조금씩 달랐지만 결국 그 마지막에 원하는 건 같았다.
카일. 자신들이 마음에 품은 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더 좋은 시간을, 더 아름다운 추억을, 그렇게 조금씩 쌓는 것으로.
하지만 황녀는 그딴 건 모르겠고 제대로 또 한 판 붙어보자는 게 전부였다.
어차피 연인간의 일들이야 나중에 지겹도록 할 것이 분명한데.
지금은 그보다 못 다 한 육체의 대화를 나누는 게 먼저 아니겠냐고.
솔직히 카일 입장에선 예측이 빗나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육체의 대화 어쩌고만 해도 예전의 일이 떠올라서 아찔해졌다.
얼른 네 것으로 해달라느니, 대뜸 옷을 벗었다느니.
이번에도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빠져나가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정작 황녀는 이젠 그런 급한 기색이 사라졌다.
어차피 결혼하는 건 확정이고, 정실도 한 번 정해지면 끝이 아닌데.
조급하게 굴어서 이도저도 아닌 시간을 보낼 바에 확실하게 하나씩 하겠다는 것.
“그보다, 긴장 좀 해주면 안 되는 거야?”
“긴장할 수준이 되면 하는 거죠. 벌써부터 긴장을 어떻게 합니까.”
제국 10강, 그것도 체술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실력자인데.
황녀는 카일의 그 말을 들으면서 실소를 내뱉고 말았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지는 않다.
오히려 저럴 말을 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덤으로 그 자격이 있는 남자가 이제 곧 제 남자가 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좋았다.
“그러면, 간다?”
훌쩍 몸을 날린 황녀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땅 밑으로 꺼지거나 하늘 위로 치솟은 게 아니다.
그냥 정말로 빨라서, 모두가 시야에서 놓쳤을 뿐이었다.
‘오.’
카일 하나만 빼고 말이다.
‘이건 좀 두근두근한데?’
알아차리지 못 한 건 아니다. 그렇기에 경우의 수는 여러 가지가 있다.
막거나, 아니면 피하거나. 그도 아니면 살짝 흘려내고 카운터를 날리거나.
하지만 카일은 그 경우 중 어느 것도 고르지 않았다.
저렇게 묵직하면서도 정직하고, 또 아름다운 공격이 날아오는데.
그걸 왜 막을까. 왜 피할까. 그리고 왜 흘려보낼까.
‘저런 건 정면에서 그대로 똑같이 깨부숴야 제 맛이지.’
카일은 황녀와 똑같이, 하체에 강하게 힘을 주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있는 힘껏. 황녀가 그랬던 것처럼 주먹을 뻗었다.
쿠과과과!!-
“어억!”
“폐, 폐하!”
근처에 있던 이들과 단장이 놀라서 황제의 곁으로 달려들었다.
그 직후, 엄청난 섬광과 굉음이 연무장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
투두둑- 투툭!-
“음.”
“으음.”
침음을 흘리던 두 남녀는, 잠깐 침묵하다가 동시에 말했다.
“아무래도, 좀 과했던 것 같죠?”
“좀 심했던 것 같아.”
간만에 서로의 의견이 정확히 일치하는 순간.
연무장 절반 이상이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다.
아예 연무장이었다는 흔적조차 싸그리 사라졌다.
황궁 안에 마련된, 가장 견고하게 지어진 장소인데.
심지어 각종 보호 및 강화 마법으로 더해지기까지 했는데.
이 두 남녀는 단 한 번의 부딪침으로 그걸 반파시켜버렸다.
만약 이곳에 사람들이 있었다면 대참사가 일어났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끝난 것이더냐?”
그 처참한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곳이 있었다.
다름 아닌 황제와 그를 수행하는 일행들이 앉아있던 자리.
더 정확히 말하자면 티샤가 완성해낸 결계 주술이 쳐진 장소였다.
“폐하.”
카일과 황녀가 바로 자리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다.
어찌 되었든 황제에게 큰 위해가 갈 뻔 했으니 당연한 일.
하지만 황제는 그저 웃으면서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되었다. 이곳에서 대련을 해도 좋다는 결정을 내린 게 짐인데, 그로 인한 모든 일들은 또한 내 책임이니라. 그러니 너희들은 얼른 일어서거라.”
그래도 명색이 황제에게 용서를 구하는 중이라, 카일은 한 번 더 망설여주었다.
한데 그와는 달리, 황녀는 ‘네.’ 하고 바로 벌떡 일어섰다.
덕분에 카일은 ‘아니, 그래도 그건 좀.’ 이라는 표정이 되었고.
반대로 황제는 그런 카일을 보며 ‘자네가 고생이 많겠군.’ 이라는 얼굴이 되었다.
“황녀는 물러가서 간단하게 치료라도 받거라.”
까진 곳 하나 없이 멀쩡한 카일과는 다르게, 황녀는 여기저기 상처가 났다.
해서 내려진 황명에 황녀는 군말하지 않고 바로 치료를 받으러 갔다.
“카일. 자네는 잠시 나와 좀 걷지.”
황제의 부름에 카일은 얌전히 그 뒤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행 인원들 모두가 점차 거리를 벌린다.
아마도 황제가 카일과 따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자리를 비우라고 한 듯.
“한 학기 동안 또 고생이 참 많았군. 학업으로도, 그리고 제국의 여러 일로도.”
“과찬이십니다.”
“과찬이라.”
답하는 카일도, 그리고 말하는 황제도, 어이가 없긴 했다.
동쪽 유목 부족을 그렇게 때려잡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제국 전력의 반 정도는 소모될 각오를 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그 강대한 적을, 카일의 주도 하에 몰아친 존 나센들은 한 달 만에 정리했다.
“황녀에게 들었다. 이번 방학에 여인들을 존 나센으로 초대한다며.”
어디까지 또 말하고 다니신 거야, 도대체.
카일은 은근슬쩍 황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황녀다. 황제의 하나뿐인 막내딸이다.
그런 아이를 정실이 아닌 첩으로도 둘 수 있다는 가능성 제기.
당연히 불쾌한 감정을 보여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잘 좀 부탁하겠네.”
하지만 황제는, 그런 불쾌함 대신 ‘미안함’을 드러냈다.
“폐하.”
“그리고 고생 좀 해주게.”
진심으로 카일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의 황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