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하루를 온전히 자신을 위해 써달라는 성녀의 말.
다른 여인이 그 말을 해도 심장이 두근거릴 것 같은데.
성녀가 그 말을 하니 카일도 이번만큼은 굉장히 긴장이 되었다.
‘혹시 막 이상한 거 부탁하면 어떻게 하지?’
이전까지는 하지도 않았던 걱정이지만, 이제는 다르다.
성녀 곁에 누가 있느냐. 엘가, 티샤. 그리고 황녀다.
다들 언제 한 번 자신을 어떻게 해볼까, 하는 생각을 지닌 이들이다.
그리고 성녀는 그 여인들 곁에서 알게 모르게 조금씩 동화되었다.
아직 그녀들만큼은 아니지만, 방심해서는 안 된다.
당장 얼마 전만 해도 유혹 아닌 유혹을 해대서 혼쭐이 났었다.
최애캐의 예상치 못 한 공략? 이걸 어떻게 참는단 말인가.
‘거기에 마침 또 주말이기도 하고.’
과연 성녀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생각을 하고서 하루를 오롯이 자신을 위해 써달라고 한 걸까.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카일은 주말을 맞이했다.
“끄억.”
“카일 형제님?”
그리고 예상대로, 성녀는 또 다시 무의식적으로 카일의 명치를 후려갈겼다.
평소와는 다른, 굉장히 수수하고 단출한 복장.
허나 그 차이가 성녀의 아름다움을 배로 건너뛰게 해주었다.
오히려 예복을 벗어던지니 더더욱 성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이런 옷은 너무 오랜만이라서. 어떤가요? 혹시 이상한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 잘 어울리십니다.”
예의 상 한 번 해주는 말이 아니었다.
이건 진심 백 퍼센트, 그리고 사심 백 퍼센트가 더해진 말이었다.
“카일 형제님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너무 기쁘네요.”
밝은 미소를 지은 성녀가 ‘그러면 가볼까요?’ 라고 묻는다.
“아. 성녀님. 그런데 어디로 가시려는 건지 말씀을 안 해주셨습니다만.”
“아하. 그렇군요. 제가 깜빡했네요. 죄송해요, 카일 형제님.”
죄송할 것까지야 당연히 없는데. 카일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리고는 ‘오늘 카일 형제님과 꼭 가고 싶은 곳은요!’ 라고 운을 뗀다.
카일은 생각했다. 과연 어디로 휴식을 취하러 가는 것일까.
혹 티샤처럼 제도 구경이라고 하고 싶어 하는 걸까?
복장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일단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어디를 가도 이목을 확 잡아끄는 외모와 숨길 수 없는 아름다움.
고귀한 자태에서 뿜어지는 범상치 않은 기운까지.
성녀는 어디를 가도 ‘성녀’ 로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게 굉장한 부담감, 내지는 스트레스로 왔을 수도 있다.
최소한 하루 정도는 성녀가 아닌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지내고 싶지 않을까?
성녀가 향하는 대로 이동 마법진을 이용하고, 다음으로 마차를 타고.
그렇게 한참을 달려 마차에서 내리고 한 시간 가까이 걷기까지 했다.
시골이었다. 누가 봐도 시골이라 부를 만한 곳이었다.
사람보다 나무가 많은 곳. 높은 건물보다 낮은 집들이 더 많은 곳.
인위적인 번쩍임보다 푸르른 자연의 기운이 더 짙은 장소였다.
혹시 이 근처에 성녀만 알고 있는 휴식 장소가 있는 건가?
아니면 기도를 위해 가끔 찾곤 했던 비밀 공간이라도 되는 걸까?
‘…그런데, 잠깐만.’
머지않아 그는 자신의 예상이 완벽하게 빗나갔음을 깨달았다.
‘지금 성녀님이 가는 곳… 고아원 방향 아닌가?’
지나가는 길에 굉장히 낡은 표지판을 보았다.
이리로 쭉 가면 고아원 하나가 나올 것이라고.
설마, 했다. 하루를 온전히 내어달라는 말까지 한 성녀인데.
마치 편히 쉬려는 것처럼 성녀의 예복까지 벗어던지기까지 했는데.
가고자 하는 곳이 휴식을 위한 곳도 아니고, 즐거움을 위한 곳도 아닌.
또 다시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위하고자 하는 곳이라니.
“저, 성녀님?”
결국 의문을 이겨내지 못 한 카일이 급히 성녀의 손을 붙잡았다.
“카일 형제님. 왜 그러시나요?”
“지금 우리. 그, 고아원 쪽으로 가는 것 같은데….”
“네? 아, 맞게 가고 있는데요. 왜 그러시나요?”
맞게 가고 있다는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순간 카일의 머릿속이 혼란의 안개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이상하네. 분명 어제 말할 땐 하루 같이 쉴 생각이 없냐는 뜻으로.
그 의미를 담아서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이야.
심지어 성녀 본인도 카일의 속내를 눈치 챈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하루를 내어달라는 말까지 한 것이 아니었던가.
“오늘 하루는 휴식을 취하려고 하셨던 게 아니었습니까?”
물어볼까, 말까. 그렇게 고민하고 고민하던 카일.
결국 돌려말하지 않고 딱 직설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카일 형제님이 무슨 생각이신지 알 것 같네요.”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성녀가 손을 잡는다.
“일단, 같이 가요. 가서 말씀 드릴게요.”
*
“안녕하세요. 그, 오늘 자원 봉사를 하려고 했던….”
“아이고. 사제님이 말씀하신 분이군요. 어서 오세요. 아이고, 참 고우신 분이 오셨네. 옆의 분은….”
“저와 함께 오신 분이에요. 오늘 같이 도와주실 거예요.”
성녀의 말에 고아원장으로 보이는 노파가 연신 고맙다고 말한다.
덕분에 카일은 그저 고개만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후, 성녀와 카일은 고아원의 일손을 돕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하고, 고아원의 낡은 곳을 고치기도 하고.
같이 음식을 만들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평소였다면 성녀가 왔다고 해서 다들 어쩔 줄 몰라 했을 것이다.
주변에는 보조하는 사제들도 있고, 호위를 맡은 성기사들도 있었을 터.
성녀의 봉사 활동은 항상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성녀가 아닌, 그냥 평범한 여인으로.
누구의 관심도, 호위도 받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할 일을 할 뿐이다.
“솔직히 말이죠, 카일 형제님. 어제까지만 해도 많은 고민을 했어요.”
잠깐 시간이 나자, 성녀가 오늘의 이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도 카일 형제님과 함께, 단 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요. 아직 가보지 못 한 도시 구경이라던가. 혹은 따르는 이 없이 조용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가 말이죠.”
“충분히 그러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게 더 하고 싶었어요. ‘성녀’ 로서 하는 게 아닌, 저라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돕고 싶었답니다. 의무감이 아닌, 오롯이 제 선택만으로.”
그러고 보면 성녀가 가는 곳엔 항상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따랐다.
호위 목적이든,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든, 성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덕분에 가는 곳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을 받아내야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그것은 그녀로서가 아닌 성녀로서.
모든 이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 확실하다.
‘성녀는, 그게 마음에 걸렸던 건가.’
정말이지. 이렇게나 변함이 없는 사람일 수가 있나 싶다.
기껏 자신이 나서서 이런 상황까지 만들어주기까지 했는데.
그런 카일의 속내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일까.
성녀는 부끄럽다는 듯 미소를 짓곤 말을 이었다.
“카일 형제님과 같이 오고 싶었어요. 성녀가 아닌, 그냥 저 자신으로. 솔직히 말씀드리면, 성녀가 아닌 상태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기도 해요. 이러는 게 가장 편하고, 또 즐거운 일이라서. 그저 생각나는 건 카일 형제님과 같이 하면 더 좋겠다. 이런 거였죠.”
“…정말이지. 성녀님은, 알다가도 모를 분입니다.”
“저도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도 저라는 사람을 잘 모르겠다고.”
어릴 적부터 한 명의 사람이 아닌 성녀로서 살아온 터.
무엇을 해야 진정 좋은 것인지 성녀는 아직 열심히 찾아가고 있다.
“그래도, 일단 한 가지는 확실히 아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네?”
“저랑 같이 오고 싶으셨다는 거. 이거 하나는 확실한 거 아닙니까.”
더 이상 성녀가 아닐 때, 어떤 식으로 지내야 할지, 그조차 잘 모르지만.
와중에 누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는 성녀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해서 카일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뜻하지 않은 봉사 활동 덕분에 살짝 아쉽던 찰나에.
의도치 않게 성녀의 본심을 아주 확실하게 깨달았으니까.
성녀는 ‘그게 그렇게 되나요?’ 라고 중얼거리다가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어찌 되었든 이곳에 카일과 함께 오고 싶었다는 건 맞다는 듯.
“이제부터 천천히 고민해보시죠. 성녀님. 나중에는, 어떻게 하며 지낼 것인지.”
“사실 생각해둔 게 하나 있어요. 나중에 이곳저곳을 돌며 건강한 몸을 지닐 수 있게 해주는 간단한 운동법을 알려주고 다니는 거예요. 어떤가요?”
제법 괜찮은 방법이다. 성녀는 다른 이들을 더 돕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카일은 다른 이들에게도 튼튼함을 전도하고 싶다는 생각.
이 둘이 적절하게 섞인 계획이라니. 확실히, 카일 입장에서도 반가운 일이었다.
‘아예 형님이랑 누님께 조언을 받아서 제국 사람들 위한 운동법이라도 개발해야겠다.’
아버지한테는… 음, 말씀만 드리자.
그 분은 그 의견 듣자마자 말도 안 되는 운동법을 추천하실 것 같으니.
‘그보다.’
카일은 옆에 앉아서, 미소를 지은 채 고아원 아이들을 바라보는 성녀를 보았다.
“성녀님.”
“네? 어, 어어.”
갑작스레 자신을 꼭 안아주는 카일 덕분에, 성녀는 굉장히 놀랐다.
보는 눈들도 있고, 바깥에서는 이런 게 너무 눈치가 보여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 은근히 피하곤 하지 않았던가.
“카, 카일 형제님?”
“그동안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참 많이,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 정말 많이 힘들고 또 외로웠을 것이다.
그녀 자신이 아닌, 오롯이 성녀로서 지내온 시간들.
본인은 괜찮다고 하지만. 항상 괜찮았을 수는 없는 노릇.
“고생했어요. 힐데.”
교황을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듣지 못 했던 말.
그리고 본인 스스로도 이젠 거의 잊어가던 이름이었다.
한동안 멍하니 카일의 품에 안겨있던 성녀.
곧 그녀는 정신을 차리곤 그 안쪽에 파고들었다.
“…감사해요, 카일 형제님.”
성녀 또한 천천히 손을 뻗어 카일을 안아주었다.
그 너른 등판을 다 안을 수는 없지만 이렇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