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263화 (263/318)

바다 건너 다른 세상에서 이곳까지 왔던 이들.

결코 좋은 뜻을 지니고서 찾아온 손님들이 아니다.

오히려 굉장히 불순한 의도를 품고서 찾아온 이들이다.

침략자. 그래,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다.

그 침략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걸 포기하고 남았다.

당장 같이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어떻게든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큰 화를 당할 수 있어서.

말 그대로 ‘어쩔 수 없이’ 남았다고 보는 게 맞다.

허면 제국에서는 그런 그들에게 어떤 대접을 할까.

아니, 대접은 무슨. 전부 죽여 없애지 않으면 다행이다.

망명자들처럼 극도로 몸을 낮추고 부탁조로 애걸한 자들이 아니다.

감히 이 땅을 식민지로 삼겠다는 생각을 품었던 놈들이다.

심지어 그걸 본인들 입으로 시인하기까지 했으니 할 말도 없다.

그래서. 원래라면 모조리 쳐내는 게 맞겠지만.

설령 목숨은 보장해도 그 외의 자유는 박탈하는 게 당연했겠지만….

“혹시 뭐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이쪽 언어와 그쪽 언어가 비슷하면서도 다르군요. 아주 먼 옛날에는 우리들 조상이 같았던 건 아닐지, 그런 생각이 문득 듭니다.”

“지내는 데에 불편한 부분은 혹 없습니까?”

오히려 제국은 그들을 열과 성을 다해서 보살피고 있었다.

어딘가에 모아두고 꽁꽁 가두어두거나 감시하는 것이 아닌.

한 마을을 지정해주고 그곳에서 지내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매일 같이 찾아와서 혹 필요한 것은 없는지.

불편한 게 있다면 어떤 식으로 처리해야 할 것인지.

그런 부분들을 조사해선 계속 해소해주고 있었다.

덕분에 이쪽 사람들은 혼란스럽다 못 해 불안감까지 느꼈다.

자신들이 결코 좋은 뜻으로 온 게 아닌데, 왜들 이리 잘 해주는 걸까.

혹시 전부 죽여 없애기 전에 벌이는, 일종의 불안감 지우기 작업일까?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들에게 이렇게 잘 해줄 수가….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곳 분들은 다들 선하고 좋은 분들이랍니다.”

오늘도 일용할 양식과 함께 찾아온 성녀였다.

처음에는 먹을 것으로 무슨 수작이라도 부리는 건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그 의심을, 성녀는 미소와 따스한 말, 그리고 위로로서 지워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니 언제부터인가 이들은 성녀를 진심으로 따르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배를 일격에 침몰시켜버린 정체불명의 강자.

그 강자가 성녀 앞에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같이 기도를 올리고 있다.

거기만 봐도 절대 악마조차 다스리는 신성한 존재로 비칠 지경이었다.

거기에 자신들의 불안한 생각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그 모든 걸 어루만지며 진심으로 대해주는 게 너무나 고마웠다.

따지고 보면 자신들은 악독하기 짝이 없는 침략자들인데.

저리 선의를 베풀며 항상 나서주는 것에 큰 감명을 받은 것이다.

“마을 건설은 어떤가요, 형제님. 잘 진행되고 있나요?”

성녀의 질문에, 얼떨결에 이주촌의 촌장이 된 가이가 입을 열었다.

“네, 성녀님. 참으로 부끄럽게도 많은 분들이 도움의 손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자신들을 돕는 건 성녀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뒤를 받쳐주는 교단부터 시작해서, 이 거대한 제국의 주인인 황실.

거기에 한 번도 만나지도 못 한 두 개의 대공가까지 손을 내밀었다.

덕분에 가이를 위시한 그들은 대체 왜 이러나 싶었다.

아무리 잘 쳐줘도 겁을 먹고 항복한 놈들 밖에 되지 않는데.

자신들의 기술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 전쟁 부분이 한계인데.

심지어 마력석도 전부 털어줘서 뭐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머지않아 포크만이 찾아냈다.

“성녀님.”

“아, 카일 형제님. 오늘도 와주셨군요!”

바로 저 남자가. 자신들을 수장시키려고 했던 바로 저 청년이 대답이었다.

성녀가, 교단이, 제국과 황실이, 두 개의 대공가가.

그렇게도 나서서 자신들을 도와주는 이유는 바로 저 카일 때문이었다.

“이게 또 은근히 운동이 되거든요. 마침 기말고사도 전부 다 끝났고, 운동만 하기엔 좀 심심하기도 하니 성녀님을 도울 일 좀 찾아보고 있었답니다.”

얼마 전부터, 성녀와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카일.

그는 이주촌을 건설하는 데에 굉장히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자금이나 자재를 조달했는가? 그건 아니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분명 큰 조력자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건 다름 아닌, 사람 수십 명 분의 효율을 보이는 노동력이었다.

분명히 건장한 뱃사람 서넛이 붙어도 겨우 들 것 같은 자재를.

카일은 헛차. 하고 기합 한 번 넣어서 나르고 있었다.

그것도 한 손에 하나씩 해서, 하루 종일 걸릴 일을 30분 만에 말이다.

“가이님. 알아보니, 제국에서 떠오르는 신성 소리를 듣는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보라고. 저런 사람을 보고서도 그냥 둘 수 있나?”

자신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조사해보니 이쪽 대륙의 서쪽, 남쪽, 그리고 동쪽까지.

저 카일이라는 청년의 주먹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제국에 이미 엄청난 빚을 달아둔 셈이다.

그 상황에서 카일이 이곳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면.

응당 그 덕을 본 황실은 무슨 행동이라도 취하는 게 맞았다.

“그리고 대공가와도 연이 있다고 하고요.”

“교단에선 아예 명예 성기사 직까지 줘야 한다는 말도 있답니다.”

자신은 저 나이에 겨우 군 막내로 잡일만 했던 것 같은데.

어이가 없었지만 곧 받아들이게 되었다.

세상 누구든, 카일의 저 몸뚱이를 본다면 바로 고개를 끄덕거릴 테니.

아무튼, 덕분에 이주촌 건설이 예상보다 배는 더 빨리 진행되었다.

황실과 바이엔 대공가가 지원해준 자금과.

리토리오 대공가에서 보냈다는 각종 자재와.

교단에서 기꺼이 내어준 양식들까지 더해지니.

순식간에 말끔한 마을 하나가 만들어지는 건 일도 아니었다.

*

오늘도 보람찬 노동 겸 선행 겸 과부하를 끝내고서.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던 카일 곁으로 성녀가 다가왔다.

“고생 많으셨어요, 카일 형제님.”

“별 거 아닙니다. 저야 뭐, 이런 일 항상 했으니까요.”

“후후. 그렇겠군요.”

“제가 보기엔 성녀님이 더 고생이 많으십니다.”

“저도 항상 하던 일이니까요. 어려운 형제자매들을 돕는 건 당연하답니다.”

성녀의 대답을 들은 카일은, 잠깐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 힘드시지는 않습니까?”

“네?”

“저도 가끔은, 운동을 하다가 힘들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러자 ‘카일 형제님께서요?’ 라고 놀란 듯 반문하는 성녀였다.

매사 항상 운동에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던 카일을 기억하는데.

너무나 운동을 사랑하는 광경을 보여주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카일이 운동을 하다가 힘들다는 생각을 한다니?

“가끔은 그런 법이 있으니까요. 아무리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라도 최소한 한 번 이상은 그 불길이 잦아지는 순간이 있지 않습니까?”

“아… 확실히, 그러네요. 형제님의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성녀.

자신의 행동이 힘들었던 순간이라. 힘들었던 순간, 그 순간이….

“혹시 없으시다면 어쩔 수 없고요.”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고, 좀 오래 전이라서. 그러니까….”

과거의 과거까지 되짚은 성녀는, 겨우 그 때를 떠올릴 수 있었다.

정확히는 성녀로 지목을 받고 나서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던 때였지만.

“확실히, 그랬던 적이 있네요. 네, 카일 형제님의 말씀대로. 저도 한 번은 그 불꽃이 꺼질 듯 연약했던 순간이 있었답니다. 왜 이래야 하는지, 언제까지 그래야 하는지 말이죠.”

말을 이어나가던 성녀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 때는 왜 그리도 모든 게 싫었던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다른 이들을 돕는 걸 왜 해야 하나 싶고. 남들 일에 왜 희생을 해야 하나 싶었던.

지금 떠올려보면 굉장히 부끄러운 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러면 아니시라는 겁니까?”

“네. 지금은….”

지금은 괜찮다. 아무렇지도 않다. 그렇게 답하려던 순간.

성녀는 문득 이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아는 카일은, 뜬금없이 이상한 질문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황녀라면 또 모를까. 최소한 카일은 그런 적이 없었다.

“음….”

저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냐는, 그런 질문을 하는 무언가 있을 거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성녀는 살짝 말을 바꾸었다.

“지금은, 아주 가끔. 아주 살짝이지만, 힘들 때도 있긴 하죠?”

티샤, 그리고 엘가와 함께 지내면서.

아주 조금은 여인으로서의 눈치를 지니게 된 성녀였다.

“그러시군요.”

마침 카일이 미소를 짓자 성녀의 예상은 확신으로 변했다.

우리 형제님께서, 무언가 원하시는 게 있구나. 하고.

“실은, 제가 이렇게 저 사람들을 돕는 이유 말입니다.”

“네. 카일 형제님.”

“성녀님이 얼른 여기에 대한 걱정을 그만 하셨으면 해서. 그래서 그렇답니다.”

“아… 아아?”

성녀가 대답 대신 요상한 반문을 내뱉자 카일이 미소를 지었다.

“아카데미 쪽도 전부 끝났겠다, 성녀님과 하루 정도는 좀 편히 있어보고 싶은데. 매일 다른 분들을 위해 고생하시는 분이라서. 제가 조금이라도 그 일 줄여드리고, 하루는 같이 쉬고 싶어서 그랬다는 말씀입니다.”

그 순간, 성녀의 머릿속에서 티샤와 엘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언젠가 카일이 다가오는 때가 있을 거예요. 그 때 확 낚아채세요.”

“다른 분도 아니고 성녀님이니까,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랍니다. 요즘 카일이 적극적이거든요? 그럴 때 놀라서 움츠러들면 그 사람도 같이 조심스러워져요. 그러지 마세요, 성녀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반문했었다.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래서 그랬었는데.

지금 보니까 두 여인이 아무래도 자기 생각을 해준 모양이었다.

“…그, 그러면요. 카일 형제님.”

성녀는 두 여자들의 조언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내일. 내일 하루는, 온전히 저를 위해 써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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