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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전투종족-262화 (262/318)

솔직히 말하자면, 파티는 여전히 가기 싫은 곳이었다.

시끄럽고, 온갖 향수 냄새 때문에 머리는 지끈거리고.

와중에 술과 각종 자극적인 음식들은 단련에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이야기 속에 숨겨진 칼들을 휘두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정치와 권력은 카일 입장에선 전혀 상종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파티 할 시간에 헬스장 가서 운동이라도 해라. 그게 천 배는 낫겠네.’

왜 인간들은 생산적인 일을 안 하고 소비만 하는 일을 하려는 걸까.

파티에 가서 하는 일이라곤 술 마시고, 떠들고, 누구 흉보고. 그게 전부이면서.

차라리 종일 춤만 춘다면 또 이해라도 하겠다.

춤이란 것이 또 은근히 열량을 많이 잡아먹는 일종의 유산소 아니겠는가.

물론 그러기 위해선 정적인 게 아니라 동적이어야 할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최소한 오늘만큼은 달라야만 했다.

‘혼자서 파티장에 간다고. 뻔하지. 또 데려가기는 미안하다, 이거야?’

차라리 그냥 평소처럼 은근히 부탁이라도 할 것이지.

그랬다면 못 이기는 척 따라가서 적당히 어울려주었을 텐데.

그게 엘가, 당신에게 어울리는 모습인데 왜 그러지 않았어.

초대장을 받아둔 것이 신의 한 수였다.

만약 받지 않았다면 남의 파티에 침입하는 꼴이 되었을 것이다.

뭐가 되었든 일단 받아두면 언젠가는 쓸데가 있다는 말은 진짜였다.

“…끄응.”

평소라면 절대 입지 않았을 예복까지 걸쳤다.

거울 앞에 서보니, 진짜 가관이다. 이러고 운동을 하면 바로 터져버리지 않을까.

이걸 고향 사람들이 봤다면 그게 뭐냐고 웃어댔을 것이다.

그리고 리어와 레아는 당장 벗으라며 인상을 찡그렸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입어야만 한다. 아마 부모님도 이해하실 거다.

특히 어머니라면, 오히려 그래야 한다며 등까지 떠미셨을 거라고.

카일은 그리 생각하며 파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누가 누구를 배려해. 당장 급한 건 엘가, 당신이면서.’

어차피 자신도, 그리고 존 나센도. 세간의 평가 따위는 쿨하게 무시한다.

그들이 뭐라고 떠들든 아무 상관도 없다. 애당초 그들과 사는 세상이 다르니까.

그래도 떠든다? 그러면 가서 인상 한 번 써주면 된다.

하지만 리토리오는 다르다. 그 가문의 후계자인 엘가는 다르다.

불쾌해도, 달갑지 않아도, 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그래서 무시하고 살 수만은 없다. 그래서 들을 수밖에 없다.

다른 이들 수군거림, 이상한 오해, 그리고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의혹들.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람의 입까지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카일도 어느 순간 얼추 눈치는 채고 있었다.

누구는 부러워서, 누구는 오지랖이 넓어서, 또 누구는 시기를 해서.

그 이유들로 자신과 엘가의 관계를 은근히 깎아내리는 행위.

당연히 불쾌했다. 당연히 짜증이 났다. 하지만, 엘가가 있으니 나서지 않았다.

그녀가 알아서 처신할 건데 굳이 본인이 나서면 악영향만 줄 것 같아서.

허나 엘가는 반대로, 혹 카일이 불편해할까 최대한 그걸 피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그냥 같이 가자고, 평소처럼 하면 될 것을.

너무 싫어하는 듯 하니 그냥 혼자서 감당하는 것으로 결정해버렸다.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어울려 주겠다는데.’

내 여자가 이상한 소리 듣는 꼴, 절대 못 넘어간다.

심지어, 이제는 존 나센의 가족이 될 사람이기도 한데.

수준도 낮은 것들이 떠드는 헛소리, 듣게 하고 싶지 않다.

그 해결 방법이 너무나 간단한데 피하는 게 답답했다.

해서 카일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을 감행했다.

“…어, 어어? 카일 공자?”

“네. 접니다. 초대장도 받았으니, 들어가도 되겠죠?”

“어, 어어. 당연하죠. 되고말고요. 들어가세요.”

파티장 안으로 들어가며 카일은 복장을 한 번 점검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하다못해 옷의 주름 하나까지.

자신의 모든 것이 엘가의 평판에 영향을 줄 것이다.

그러니까 허투루 할 수 없다. 미래의 대공이다.

내 여자, 존 나센의 울타리 안에 들어온 가족이다.

너희들이 떠드는 그 어떤 것도, 답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서로가 엮이면 이득이라서. 그러니 지극히 당연한 만남이라고?

원하는 것이 있어서 만난, 수지타산을 따지는 정략적인 혼인이 될 거라고?

개소리. 틀렸어. 네놈들은 절대 쥐지 못 할 여인을, 내가 쥔 거다.

너희 같은 여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가질 남자를, 엘가가 가진 거다.

“갑자기 웬 과음이랍니까. 적당히 마셔요.”

“…카일?”

혼자서 잔만 기울이고 있는 엘가의 손을 붙잡았다.

굉장히 크게 놀란 듯, 엘가의 두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한다.

“뭐, 뭐예요? 당신이 왜 여기에….”

“왜요. 제가 뭐 못 올 곳이라도 왔습니까?”

내 여자가 파티에 가는데, 같이 가서 당신 어깨 더 펴줘야 하는데.

충분히 고생했고, 그럴 자격이 있으니 그리 해도 충분한데.

왜 갑자기 나를 생각한다고 그걸 포기해. 나는 그 꼴 안 봐. 아니, 못 봐.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 한 마디면 충분하다. 그래, 이것만으로도 엘가에겐 충분하다.

저기서 수군거리고 있던 귀족들에게 확답을 주는 것으로는.

시기심과 부러움에 어떻게든 흠을 찾아내려던 당신들에게는.

지금 이 말보다 더 확실하고 날카로운 것도 없을 것이다.

당황한 엘가가 카일에게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그런 그녀를 카일은 잽싸게 붙잡고는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저것들 굉장히 싫으니, 아예 이번 기회에 확실히 눌러두라는.

노력도 안 하는 것들이 어떻게든 상대방 깎아내리고 싶어서.

거기에만 몰두하다가 그딴 짓 아무 소용도 없음을 알려주라고.

“…그래요? 내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요.”

“제가 싫어하는 건 쓸데없는 소리가 나오는 파티이지, 엘가님과 함께 하는 그 자리 자체가 싫은 건 절대 아니니까요.”

그리 말한 카일이 천천히 손을 내민다.

엘가는 미소를 짓고선 카일이 내민 손을 꼭 붙잡았다.

너희는 이윤 관계 따져서 반려를 정하고, 정략혼을 맺었나?

이거 안타까워서 어쩌나. 우리 둘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데.

그냥 어쩌다 보니 이렇게 연이 닿게 된 것 뿐이야.

그런데 어쩌나? 그 우연히 일어난 인연이, 너희는 상상도 못 할 것이네?

너희는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가질 수 없는 엄청난 것이네?

“고마워요, 카일.”

“아내 기 살려주는 건 남편 의무니까요.”

“…그, 그렇게 갑작스레 말하기 있어요?”

“어차피 기정사실인데요. 받아들이기로 했으니 이젠 거칠 것도 없습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사이가 소원해질 것도 아닐 테고.

어차피 확정된 것이라면 빙빙 돌아갈 생각 따위는 없다.

엘가의 손등 위에 가볍게 키스를 한다.

억지로 하는 모습도, 혹은 지극히 사무적인 모습도 아닌.

애정을 담은 눈길과 극히 조심스러운 행동으로서.

“엘가 공녀. 저와 춤이나 한 곡 추시겠습니까?”

“…기꺼이 받아들일게요.”

스스로가 불어온 하렘, 그리고 스스로 택한 하렘이다.

그러면 이제 더는 우물쭈물하지 말고 내 여자 기 세워줘야지.

카일은 그리 생각하며 파티장의 귀족들을 훑어보았다.

아무래도, 자신의 계획이 썩 잘 들어 먹힌 모양이었다.

*

“고마워요.”

발코니에 서있던 카일이 고개를 돌린다.

그곳엔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한 채, 엘가가 서있었다.

“덕분에 어떻게 해줘야 마음이 풀릴까, 하던 놈들 콧대를 다 눌러놓았네요.”

한 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이 파티의 주인공은 철저하게 엘가와 카일이었다.

다른 누군가 그걸 채가는 건 카일이 허락해주지 않았다.

여태까지 꾹 다물고 있던 곳곳의 이야기들을 꺼내놓으며 사람들을 모았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다.’ 보다는 ‘이런 대단한 내가 좋아하는 이가 바로 엘가 공녀다.’ 라는 부분을 계속해서 강조하면서 말이다.

덕분에 엘가는 자연스레 모든 이들의 관심과 부러움을 독차지했다.

차기 리토리오 대공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제국이 그리도 관심을 지니는 존 나센과 혈맹으로서 맺어지는 동맹 관계까지. 부럽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것보다, 리토리오에는 적이 없다더니. 오늘 보니까 많은 것 같던데요?”

“정적이야 없죠. 하지만 이렇게, 사교계에선 다들 한번 씩 물고 뜯고 하는 거예요. 사람 안 보는 곳에선 황실 흉도 본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요. 뭐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이게 귀족 사회에선 또 은근히 중요한 거니까. 일종의 민심 판별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래서 파티가 싫다는 겁니다. 입으로 싸우고, 혀로 휘두르고. 이런 거 퍽 별로예요. 차라리 나가서 직접 싸우는 게 백 배, 천 배는 낫겠네.”

카일의 투정에 엘가가 미소를 짓곤 앞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더 고마워요. 내 기 살려주려고, 이런 불편한 자리에 오면서….”

“아니, 아니죠. 그게 아니죠.”

대뜸 엘가의 말까지 끊으며, 카일이 부족한 부분을 채운다.

“단순히 엘가님 기 살려주려고 온 게 아닙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제가 사랑하는 여자라서. 그래서 온 겁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을 빼먹으면 말이 이상해지잖아요.”

“….”

엘가가 멍하니 카일을 쳐다본다.

그러다가 이리저리 그를 살피더니 입술을 뗀다.

“…그, 카일. 정말 카일 맞죠?”

“이건 또 갑자기 무슨 소리랍니까.”

“아니… 요즘 묘하게 적극적이잖아요. 예전에는 그런 말 본능적으로 피하는 것 같았는데.”

그랬었지. 그래, 분명히 그랬었다.

이안 욕하고, 레토 흉보고, 그러면서 자신도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들 마음은 변하지 않을 텐데. 왜 선을 긋고 있었을까.

멍청했다. 부족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혹시 부담스러우십니까?”

“그건 절대 아니고요.”

“그러면 되었습니다.”

카일의 대답에 엘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그래요. 좋은 게 좋은 거지.’ 라고 중얼거리며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키스해줘요. 사랑을 담아서, 달콤하게.”

“기꺼이.”

이제는 피하지 않는 카일과, 이제는 마음껏 요구하는 공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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