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260화 (260/318)

대공에게서 ‘야근은 없다.’ 의 약속을 받아낸 후.

카일은 티샤의 손을 잡고서 제도의 야경을 즐기러 갔다.

처음에는 무척 난처하다는 표정이었던 티샤였다.

갑자기 찾아온 건 정말 반가운데, 아직 본인은 할 일이 많다.

그것도 맨입으로, 강제로 하는 것도 아니다.

무조건 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선입금을 받았다.

일단 받은 게 있으면 그만큼의 값은 치러야 하는 게 도리.

해서 카일을 말려보려고 했지만 그는 들어주지 않았다.

하다못해 존 나센에도 치팅 데이가 있는데, 휴식은 필수라고 말하면서.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요?”

티샤가 그리 묻자 카일은 뭐가 문제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에 티샤는 볼을 긁적거리며 제 걱정을 털어놓았다.

“약속을 하고서 이루어진 관계인데, 제가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다른 일을 하는 것 같아서요. 당장 주술 관련 방어 연구에 대한 진전을 내주어야 하는데….”

“그 기한이 오늘 안까지였나요?”

그러자 티샤는 그건 아니라고 대답했다.

명시된 기한은 없지만, 되도록 빠르면 좋은 일이라고.

그리 덧붙이자 카일은 그러면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빠르면 좋다. 그건 기한이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네요.”

“하지만….”

“오늘 밤을 샌다고 해서 끝이 나나요? 끝이 나면, 오늘 계획은 포기할게요.”

“그건 아니에요. 오늘은 어림도 없죠.”

당신도 그리 말하면서 뭘 그리 신경을 써요.

카일의 그 말에 티샤는 그건 그렇네요, 라고 미소를 지었다.

“밤새서 되는 일 별로 없어요. 그냥 푹 쉬고, 다음날 꽉 채워서 제대로 하는 게 좋죠. 거기에 오늘 안으로 끝내야 하는 일도 아니잖아요?”

“하지만 걱정이에요. 이런 식으로 자꾸 카일의 도움을 받으면….”

“뭐가 어때서요. 남들이 뭐라고 해도 아무 문제없어요.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닌 것도 아니고, 진짜로 사귀고 있는데. 심지어 어머니께서 존 나센으로 직접 초대까지 하셨는데. 존 나센과의 연을 자랑하지 않으면 언제 써먹으려고요.”

한 마디로, 존 나센이라는 뒷배를 쓰는 거에 망설이지 말라는 뜻이었다.

당신이 저자세로 나갈 일 전혀 없다고. 그러지 말라고 이렇게 하는 거라고.

존 나센의 울타리 안에 가족으로서 새로이 그 자리를 틀었다면.

응당 존 나센의 보호 안에서, 그 이름을 내밀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마음 놓고 쉬어요. 당장 기말고사도 코앞인데.”

“으으! 시험 이야기는 하지 말아줄래요?!”

“왜요?”

“이번엔 정말 공부 하나도 못 했단 말이에요!”

꼭 저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1등을 하던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카일이었으나, 곧 그걸 거두었다.

어차피 여기서 그 말을 해봤자 돌아올 대답은 뻔하니.

*

제도의 야경은 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관으로 꼽힌다.

건국절 이후 한 해를 마무리하는 느낌도 있고, 먹거리가 가장 풍부한 때이기도 하다.

힘껏 길러낸 각종 작물들은 그 맛과 영양가를 뽐내고.

살이 오른 가축들과 어패류들은 산해진미로서 부족함이 없다.

그렇게 형성된 제도의 거대한 야시장이, 야경의 주무대가 된다.

이 날만큼은 일반 평민들 사이를, 귀족들도 거리낌 없이 돌아다닌다.

정말 큰 무례가 아닌 이상 사소한 문제는 넘어가주는 게 암묵적인 룰이다.

그 정도로 제도의 밤은, 활기찬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와아… 제도란 이런 곳이었군요.”

“저도 처음 보네요. 음, 그래요. 확실히 좋은… 음.”

치이익!- 촤악!-

지글지글!-

이런 생각이 들면 안 되는데, 괜히 왔나 싶다.

자신은 그냥 화려한 야경과 아름다운 제도의 모습만 상상하고 왔는데.

생각해보면 사람이 모이는 곳엔 응당 먹거리가 모이는 걸 잊고 있었다.

‘이건 좀 심각한 유혹 아니냐고.’

저런 길거리 음식 중 가장 잘 팔리는 것은 역시나 튀긴 요리.

그게 육류든, 생선이든, 심지어 채소든 가리지 않고 뛰어난 맛을 자랑한다.

값은 저렴하고 그러면서도 따뜻하고 맛있는 걸 보장하는 음식이다.

저러니 사람들이 너도 나도 죄다 거리에서 튀기고, 튀기고, 또 튀긴다.

‘…진짜 튀김 냄새 하나는 죽이네.’

킁킁, 하고 고소한 튀김 향을 맡은 카일이 침음을 흘린다.

이렇게 냄새만 맡으면 참 좋은데, 먹는다고 생각하니 괴롭다.

맛은 있을 텐데 먹은만큼 움직여야 할 테니까.

“…카일.”

그런 카일의 속내를 알아차린 건지, 티샤가 미소를 짓는다.

“지금 그 생각하고 있죠.”

“무슨 생각요?”

“저거 먹으면 얼마나 운동을 해야 할까.”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니 ‘뻔하죠.’ 라고 답한다.

그러더니 대뜸 튀김 상점으로 가선 몇 개를 사서 집어온다.

“티샤?!”

“아까 그랬잖아요. 좀 쉬면서 하는 거라고. 그러면 오늘은 치팅데이라는 거니까, 하루 정도는 이렇게 조금은 나쁜 짓 해도 되는 거 아닐까요?”

티샤가 먼저 튀김 하나를 입가에 아앙! 하고 베어문다.

고소한 냄새가 확 뻗어나가며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그러죠. 오늘은 치팅데이하죠, 그냥.”

차라리 티샤가 말렸으면 모르겠는데, 눈앞에서 먹으니 못 버티겠다.

결국 그 유혹에 넘어가 예상치 못 한 열량을 쌓고 마는 카일이었다.

‘내일 유산소 더 해야겠네.’

참으로 슬픈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감당해야지.

이후로도 카일과 티샤는 야시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경 삼매경에 빠졌다.

간단하게 먹고 마시고, 길거리 공연을 바라보며 박수도 좀 쳐보고,

그러다가 사람들과 부딪쳐서 사과도 하고, 혹은 사과도 받고.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결코 그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닌.

두 남녀에겐 지금 이 시간이 딱 그러하다고 할 수 있었다.

“쌀쌀하진 않아요?”

“전혀요? 북쪽에 있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선선한 수준이죠.”

한 눈에 야경이 들어오는 곳에 앉은 두 남녀.

그렇게 잠깐 멍하니 앞의 풍경을 바라보던 티샤는.

“편하네요.”

카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곤 기분이 좋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고마워요. 카일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책상 앞에 앉아있었을 거예요.”

“가끔은 이렇게 기분 전환도 하고 그래요. 누가 뭐라고 하면 제 이름 대고.”

“누가 들으면 카일이 엄청 대단한 귀족인 줄 알겠어요.”

“뭣하면 제 아버지 성함 대도 좋고요.”

“…그냥 카일 이름을 대는 걸로 할게요.”

존 나센 남작 이름을 들먹이면 상대가 기절하지는 않을까 싶다.

솔직히, 티샤도 아직 존 나센 남작이 아주 조금은 무서웠다.

“어쩌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요.”

“정신없었죠. 시작부터 참 다사다난했고.”

“그 눈치 없던 이안이 그렇게 변할 줄은 몰랐어요.”

눈치 없는 건 여전하던데요?

카일이 그렇게 답하자 티샤가 아핫! 웃음을 터트린다.

“그래요, 맞아요. 여전히 눈치는 없죠. 그래도 많이 변하긴 했잖아요?”

“…그러네요. 일단 중량도 잘 치고, 체력도 더 좋아지고.”

“카일?”

“농담이고요. 요즘 넬이랑 어떻게든 뭐 좀 해보려고 노력하더라고요.”

“의외였어요. 설마 그 이안이 여자한테 빠질 줄은.”

고개를 끄덕거린 티샤가 살그머니 카일의 손을 붙잡는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뭐가요?”

“1학년이 끝나고, 방학에요. 어머님께서 우리 전부를 초대하셨다는데.”

“며느리들이 보고 싶다고 하셨으니까요. 가서 같이 좀 지내면서, 조금 더 안면을 트고, 다시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면 될 것 같은데.”

“결혼도 안 했는데 조금 이상해요.”

언젠가 카일과 결혼을 할 것이다. 그래, 꼭 하고 말 거다.

허나 아쉽게도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일단 학업과 본업에 열중해야 한다.

카일도 그걸 원하고 있다. 존 나센에서도 그리 하라고 해주었다.

그러니 모든 게 끝난 후 본격적으로 첫 번째 자리를 두고 경쟁하라는 게 아닌가.

“반드시 첫 번째의 첫 번째는 제가 차지하고 말 거예요.”

“응원할게요, 티샤.”

“다른 사람들은 응원 안 할 건가요?”

“그,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요. 티샤를 응원하는 만큼 엘가님이랑, 성녀님, 그리고 황녀님도 전부 응원해야죠.”

그 대답에 티샤가 ‘칫!’ 하고 일부러 소리를 내어 입술을 삐죽거린다.

그럴 거면 응원하겠다는 말은 왜 하냐고 장난스레 투덜거리면서 말이다.

덕분에 카일은 그게 장난임을 알면서도 또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누구는 해주고 누구는 안 해주면 나중에 뒷감당이 전혀 안 된다.

지금도 4등분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데 아예 인수분해 당할 수도 있다고.

그 절절한 의견에 티샤도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장난인 거 알면서 꼭 그래야 해요?”

“저도 반은 장난인데, 반은 진짜로 급한 일이라서요.”

으으. 그냥 처음 만났을 때부터 확 낚아채야 했는데.

이안이 곁에 붙어있어서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어!

티샤는 속으로 이안의 등짝을 몇 번이나 때렸다.

“그래도, 티샤랑 무조건 결혼은 할 겁니다.”

“당연하죠. 그러면 설마 안 하려고 했어요? 아, 안 한다고 해도 상관은 없어요. 어차피 제가 무슨 수를 써서든 했을 테니까. 뭣하면 사랑의 마음을 품게 만드는 주술 연구라도 해서!”

“농담 너무 진지하게 하면 진담 같아요.”

“농담 아닌데요?”

그 말에 카일이 웃으면서 ‘알겠어요, 알겠어.’ 하고 고개를 돌리는 찰나.

갑자기 티샤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두 손을 내밀어 카일의 얼굴을 붙잡는다.

그리고는 휙! 소리가 날 정도로 옆으로 돌려선 자신을 바라보게 만든다.

“엑.”

“농담 아니라고요.”

직후, 마녀의 키스가 존 나센 막내의 입술에 작렬했다.

이전처럼 부드러운 게 아닌, 굉장히 화끈하고 정열적인 키스였다.

‘…역시 마녀는 마녀구나.’

갈 곳을 잃고 허공에 붕 떠있는 카일의 두 손이, 그의 감정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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