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책임이 제게….”
“아이고, 남작님. 아닙니다. 괜찮으니 고개를 드시죠!”
방금 전 반파된 항구는 제국 소유의 항구가 아니다.
일단 제국 관리 하에 있긴 하지만 정확하게는 남쪽 독립 영주의 것.
그렇기에 지금과 같은 일은 커다란 외교적 문제로 변질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당사자가 존 나센 남작이라는 것이지만 말이다.
“전혀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항구 상태가 좋지 못 해서 새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여기 항구, 다른 곳에 비해서 비교적 최신에 만들어진 곳 아닌가?
분명히 그렇게 들은 기억이 있는 카일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리 말했다가 저 독립 영주가 ‘왜 그러세요!’ 라고 울 것 같아서.
“그래도 배상은 해야 할 듯 하니 제국에 말을 해서….”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저는 절대적으로 괜찮습니다.”
존 나센 남작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많이 모르는 게 남쪽 사람들.
하지만 카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이들 중 하나다.
남쪽 섬에서도 실력자로 꼽히는 파도잡이를 개작살 내놓은 청년.
파르달 섬까지 무슨 놀러가듯 헤엄을 쳐서 닿고야 만 사람.
이미 거기서 ‘존 나센’ 이 붙은 무엇이든 경기를 일으키는 단계에 이르렀다.
한편, 성녀의 친절한 말에 감복하여 남기를 선택한 자들.
정확히는 거기에 이제 존 나센이 한 스푼 들어가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 자들은 성녀의 곁에 거의 찰싹 달라붙어있는 중이었다.
“간만에 보는군요, 성녀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것으로 항구를 반 없애버린 존 나센 남작.
그 남자가 존대까지 쓰면서 안부 인사를 건네고 있다.
비록 표정은 여전히 공포를 자아내는 무표정이었다지만.
말이라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게 그들이 보기엔 기적 그 자체였다.
“네, 그동안 잘 지냈답니다. 존 나센 남작님. …아, 아니지. 아버님.”
거기에 성녀는 조금도 긴장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 따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환한 미소까지 지으면서 공손히 인사만 할 뿐이었다.
사람들은 거기서 진정한 천사의 재림을 보았다.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악마 앞에서, 자신들을 지켜주는 천사 말이다.
역시 신은 존재했어. 그 신의 사자가, 어쩌면 저 여성분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다 못 해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현재, 그들은 진심으로 그 교단이란 곳을 방문하고 싶었다.
이 천사가 머물고 있다는, 신대륙의 종교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궁금해서!
“여러분.”
한편, 영주와 이야기를 다 나눈 존 나센 남작은 다시 배로 다가갔다.
그러자 미처 하선하지 못 한 사람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자리에 주저앉는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카일은 조용히 남작 뒤에 서있었다.
설마 아버지가 무장도 안 하고 약해빠진 저들을 해칠 리는 만무하고.
반대로 저들이 제 아버지를 자극하는 일을 막고자 하고 있었다.
“신기한 방식으로 돌아가는 물건이 있다고 해서 와보았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자동으로 사람 입에서 사죄부터 나오게 만드는 능력이었다.
지금이라도 하선하겠다고 할까, 사람들이 막 갈등하던 무렵.
“그걸 보니 생각난 건데, 여러분에게 부탁할 게 있습니다.”
“무, 무엇입니까! 부탁하실 게 있으시다니!”
“말씀만 하세요! 무엇이든 다 가능합니다!”
살 길이 열렸다고 생각하니 사람이 참 간절해진다.
그 안타까운 광경에 카일은 그저 하하, 하고 웃을 뿐이었다.
“황제 폐하께 듣자하니 그 슈트라는 것, 마력석이라는 것으로 움직인다고요.”
“그렇습니다. 마력석은 마나의 힘을 품은 원석인데, 이것을 이용하면 순간적으로 사람이 낼 수 있는 몇 십 배에 해당하는 능력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고작이요.”
순간 뇌에 과부하가 찾아오는 사람들이었다.
사람이 낼 수 있는 능력의 몇 십 배를 낸다고 하면 엄청난 일인데.
지금 이 남자는 그 몇 십 배를 ‘고작?’ 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곧 그들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손가락 튕기는 거 한 번으로 항구를 반파시키는 괴물인데.
몇 십 배 정도는 아무 감흥도 안 서는 일이겠지. 암, 그렇고말고.
“아무튼, 그 슈트 만드는 능력으로 무언가를 좀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데.”
“무엇입니까. 말씀만 하시길. 무엇이든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자 존 나센 남작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놓았다.
그것은 몇 십 장의 설계도였는데, 카일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것들이었다.
‘아이고, 아버지.’
하지만 사람들의 눈에 보기엔 이게 뭐야, 싶은 것들.
급기야는 ‘혹시, 무기인 건가? 우리들에게 무기 제작을 시키는 건가?!’ 라고 오해까지 하는 단계에 이르고 말았다.
“저, 저기. 귀인이시여. 아무리 그래도 저희가 무기 제작은 좀….”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건 저희 선을 벗어난….”
“무기가 아닙니다. 무슨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무기가 아니다. 그 말에도 사람들은 도통 믿지 못 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이내 존 나센 남작이 내민 설계도를 보고서 어? 하고 탄성을 흘린다.
정말로 무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슈트 같은 것도 아니다.
이것은 마치, 마치… 운동 할 때 쓰는 기구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몸에 최대한 과부하를 줄 수 있는 방식으로 고안한 겁니다.”
도대체 이런 건 또 언제 준비한 건지.
심지어 다시는 없을 세상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잇는 존 나센 남작이었다.
“이대로만 만들 수 있다면 바랄 게 없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고향에 있는 기구만으론 한계를 느끼는 터라, 무언가 다른 방식의 과부하를 찾고 있었지요.”
“그, 이해는 했습니다. 했는데… 이걸 정말 움직일 수 있을지….”
“그건 우리가 걱정할 문제지요. 그리고 그런 마인드로 하면 더더욱 좋습니다. 움직여야 정상이 아니라, 그 반대로 움직이지 않아야 정상인 것으로 만드는 것 말입니다.”
평소엔 그리 과묵하던 존 나센 남작이 말이 많아졌다.
그 뜻은 남작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흥분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대체 무슨 기구의 설계도를 가져오신 거야, 하는 생각을 한 채.
카일은 흘끗 설계도를 살펴보고선 자신도 모르게 ‘오.’ 하고 박수를 쳤다.
정확하게 힘을 주어야 하는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마력석.
가만히 정체되어 있는 것을 밀고, 당기며. 그렇게 해서 과부하를 얻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아예 더 나아가서 반대로 작용하는 힘과 싸워 이기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당신들이 왔다는 곳으로 가보고도 싶습니다.”
남작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버렸다.
안 돼. 그러지 마. 무서워. 제발 그러지 말아주세요.
당신이 왔다간 우리 세상은 한 달도 버티지 못 하고 없어질 거예요.
“하지만 그러기엔 포기해야 할 운동이 너무 많아서, 참 아쉽습니다.”
살았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우리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군요. 역시, 신은 존재해!
“그래서, 건너갈 때 들 시간만큼 이제부터 운동을 하고. 당신들이 도착한 후 부탁한 것을 만들 시간이 되었을 때, 그 때 한 번 가보려고 합니다.”
“예? 아니, 아버지. 잠시 만요.”
이번에 놀란 쪽은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카일도 이건 처음 듣는 소리였기에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다른 곳으로 가신다고요? 아버지가 왜요.”
“기다릴 수가 없지 않느냐. 더 강력한 과부하를 줄 수 있는 기구가 그곳에 있는데. 또 언제 기다려서, 어느 세월에 이곳까지 온단 말이냐.”
“…그래서 그럴 바에 차라리 아버지께서 직접 가시는 게 낫다는….”
“바로 그렇다, 막내야.”
아이고, 아버지. 진심으로 그러시는 거군요. 더 무서워집니다.
“남작령은 어쩌고요.”
“네 형이 있지 않느냐.”
“어머니께서 허락은….”
“이거, 네 엄마가 그려준 거다. 알게 모르게 네 엄마도 요즘 기구들이 퍽 재미가 없다고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런 참에 이런 기회가 다가온 것이다.”
그제야 카일은 왜 남작이 이렇게 기대 만발인지 알 수 있었다.
더 큰 과부하가 오는 운동 기구라는 말에 흥분한 것일 수도 있지만.
거기에 덤으로, 은근히 애처가인 아버지가 어머니께 드릴 선물로 생각한 것도 있던 것.
새로운 운동기구. 존 나센 사람으로서, 이 얼마나 가슴 뛰고 벅찬 일인가!
‘솔직히 나도… 조금. 아니, 좀 많이 기대되긴 하네.’
당장 리어나 레아도 새 기구만 보면 무슨 불을 발견한 인류처럼 신기해 했다.
그 기질을 어디서 물려받았겠는가. 당연히 남작과 남작 부인이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가고 싶은데 참는 것이다.”
“수영해서 가시려고 했죠?”
“어찌 알았느냐?”
남작의 반문에 카일이 어깨를 으쓱거린다.
“아버지면 이틀도 안 되어서 가실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버지’ 시잖아요. 가는 도중에 조금이라도 운동 더 하시려고 할 테고. 그러면 하늘로 날아가시는 것보단 수영이 몸에 더 많은 과부하가 걸리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간단하죠.”
“그래. 네 말대로, 간간히 수영도 하고, 그러다가 몸이 좀 뻐근하면 근육도 좀 풀어줄 겸 가볍게 순간이동 좀 하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이 정도면 한… 엿새 만에 갈 수 있을 것 같다만.”
그러자 얌전히 듣고 있던 사람들이 황당한 표정이 된다.
방금 본인들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당최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들.
자신들이 이곳까지 오는 데에만 몇 달이 걸렸다.
늦장을 부린 것도 아니고 역풍 때문에 늦은 것도 아니다.
쉬지 않고 계속해서, 꾸준히 나아가 마침내 당도한 것인데.
그러고도 몇 달이 걸릴 정도로 긴 항해 시간이 걸렸는데.
‘수영? 수영을 해서 가겠다고? 미친 거 아니야?’
‘순간이동이라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었어!’
‘도대체 저 인간들. 정체가 뭐야! 아니, 인간이 맞긴 해?!’
충격을 먹고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이들.
거기에 카일은 한 술 더 뜨고 말았다.
“음. 아버지라면 확실히 엿새면 될 것 같네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타박하는 것도 아니고.
하하! 웃으면서 장난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닌.
정말로 진지하게, 몇 번이고 심사숙고한 끝에 나온 대답이었다.
“여러분. 그러면 빨리 돌아가셔야 하겠네요. 부지런히 가서 상황 설명하고, 그거 만들고, 그러다 보면 아버지께서 미리 루틴 다 돌리시고도 이미 남았을 시간 같은데?”
“아니면 조금 더 천천히 갈 수도 있다. 그러면 한… 열흘?”
“섬에 들려서 맨몸 운동이라도 좀 하신다면 그 정도 걸리시겠네요.”
후일, 본국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그곳엔 악마보다 더 한 것이 살고 있다.’ 라고 말하는.
아주 중요하면서도 무시무시한 부자의 대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