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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전투종족-256화 (256/318)

황궁 뒤뜰, 그곳에서 두 남자가 한가로이 걸음을 옮기고 있다.

한 쪽은 제국의 절대자. 그리고 다른 한쪽은, 미래의 절대자.

“태자.”

“예, 부황 폐하.”

황제의 부름에 황태자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버지이지만, 동시에 황제. 저 존재가 스러져도, 아니 그 이후에도.

자신은 영원히 저 존재의 뒤편에 서있을 것이다.

전쟁으로 제국을 크게 확장했고, 와중에 적절한 협상으로 피해를 최소화했으며.

무엇보다 그 이후론 제국의 내정을 확고히 다지기까지 한 부황이다.

“동쪽의 일은 어떠하냐.”

“부황께서 예상하신 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각 부족들이 더는 제국과 싸울 그 어떤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열성적으로 제국과의 관계 개선에 힘쓰고 있습니다.”

“5황녀가 제법 노력을 한 모양이구나.”

그 말에 황태자는 미소를 짓고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혹시 그곳에 가서도 강자들을 상대로 시비를 걸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정말 그러다가 사고라도 치면, 또 다시 전쟁이 날 수도 있는 법.

하지만 5황녀, 제 막내 여동생, 율리카 황녀는 그런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제국의 황녀답게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당당하게 귀환했다.

“그렇습니다, 부황 폐하. 들리는 말로는 유목 부족들 사이에 5황녀를 추앙하는 무리도 일부나마 생겨났다고 하더군요.”

“네가 걱정이 많겠구나. 그 아이에게 세력이 생겼다니 말이다.”

황제의 농담에 황태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고 반문했다.

솔직히, 아직 철이 없던 시절이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도 권력으로는 제어가 안 되는 강자 중의 강자인데.

거기에 들러붙은 세력까지 커지면 그때는 제국이 조각날 수도 있다.

‘허나, 지금은 아니다. 그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그것조차 확신을 지니지 못 하고 의심과 걱정을 하던 때는 지났어.’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그 여유는, 더 넓은 시야를 지닐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넓은 시야에서 무엇이 보이느냐. 그건 황녀를 꽉 쥐고 있을 한 청년이었다.

“이제 그 아이에 대한 걱정은 전부 접어두었습니다.”

“그러느냐.”

“예, 부황 폐하. 그보다는 녀석의 시댁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 그게 걱정입니다.”

황태자의 말에 몸을 돌린 황제가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농담 반, 그리고 진담 반이 섞인 황태자의 속내를 알아차린 것이다.

“네게 무거운 짐을 떠넘긴 것 같구나. 태자.”

“아닙니다, 부황 폐하. 오히려 폐하께서 제 짐을 덜어주셨습니다. 부황 폐하가 아니셨다면, 이렇게 무언가를 논하고 있을 수조차 없었을 겁니다.”

제국 역사에 영원히 남을 수많은 업적을 세운 현 황제이다.

그 중에서 무엇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황제는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그 이름을 입에 담을 것이다.

“북쪽의 존 나센은 처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 바위가 깎여나가고 사람이 변하며, 세상이 바뀔지언정 그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을 거다. 내 장담하마.”

“소자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힘을 지녔지만 그걸 휘두르는 대신 더 갈고 닦기만 하는 자들.

그것을 휘두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되도록 숨기는 사람들.

존 나센은 그런 곳이었다.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먼저 선을 넘지 않는 이상 그들 또한 그러할 것이니라. 그러니 태자, 너는 아무 걱정 할 것이 없다.”

걱정할 것이 없다. 그 말에 황태자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확실히, 그 말대로 그들이 선을 넘을 걱정은 하지 않는게 맞다.

부황이 장담했듯이 그럴 인물들도 아니지만, 혹 만에 하나 정말로 그런다면.

그런 걱정 할 시간도 없이 순식간에 제국이 사라질 테니까.

“존 나센 이야기가 나와서 그러한데, 승작을 논의하고 싶다는 사자를 보내셨다 들었습니다.”

“과거 그들과 한 약속을 바꾸려 하니 응당 그래야지. 당시에도 고작 남작 작위 주려고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어떻게든 울타리 안에 두고 싶은 제국과, 그게 귀찮은 북쪽 사람들.

결국 승자는 제국이었고 북쪽은 존 나센 남작령이 되어 제국의 안에 자리했다.

비록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수확이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피해가 있었지만 지금 보니 그건 합당한 대가였다.

보아라. 이후 제국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못 해도 일곱 개 이상의 제국 군단이 피를 흘려야만 얻을 수 있었던 결과였다.

서쪽 왕국 연합, 남쪽 섬의 독립 영주들, 그리고 동쪽의 유목 부족까지.

제국에선 내실을 다지느라 적당하게 평화를 모색하고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존 나센이 나타나 얍. 하고 기합을 내지르니 모든 게 끝이 났다.

“요즘 들어선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막내와 카일, 그 둘 사이에서 어떤 손주가 나올까.”

“아….”

황제의 그 말에 황태자는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상상만 해도 벌써부터 아찔해질 정도로 엄청난 조카가 나올 듯 하다.

부디 매제를 닮았으면 한다. 혹 제 동생을 닮아버리면 퍽 곤란할 테니.

그랬다간 정말 어떻게 감당도 안 되는 무시무시한 조카님이 될 것 같았다.

“물론.”

어느 순간 웃음기를 싹 지우고서, 엄한 목소리를 내는 황제.

“정계의 흔들림이 없도록 대비도 해야 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카일과 맺어질 여인은 5황녀만이 아니다. 그녀는 일부에 불과하다.

차기 리토리오 대공, 그리고 교단의 성녀, 마지막으로 주술계 신성까지.

한쪽만 이어져도 정계 쪽에서 굉장히 흔들릴 법한 부분들이다.

그걸 카일은 혼자서 전부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긴장해야 한다.

존 나센은 정계에 뜻이 없다고 하지만 그걸 이용할 이들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

“폐하.”

이 때, 멀리서 시종장이 굉장히 다급한 걸음걸이로 뒤뜰을 가로지른다.

평소였다면 얌전히 기다리다가 황제와 황테자의 휴식 시간이 끝난 이후에.

혹은 그게 아니더라도 최대한 조용히 말을 건넬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보다도 더 놀란 얼굴빛이다.

심지어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까지 맺혀있다.

“무슨 일인가.”

“폐하. 지금, 지금 즉시 가셔야 할 듯 합니다.”

“가다니.”

“그게… 저, 존 나센 남작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어?

순간 그 외마디 탄식이 황태자는 물론이고, 황제의 입가에서도 튀어나왔다.

그 남자가 갑자기 왜? 그것도 어떤 말도 없이 이리 갑작스럽게 왔다고?

순간이었지만 황태자의 머릿속에 온갖 으스스한 상상들이 펼쳐졌다.

그건 황제도 마찬가지였는지 대번에 낯빛이 굉장히 어두워졌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혹시 승작 건의가 마음에 안 들었나?

하지만 분명 희망적인 대답을 했다는 사자의 서신까지 받은 후다.

미쳤다고 그 자가 거짓이라도 고한 게 아니라면 이럴 수가 없다.

“사실인가? 정말로, 존 나센 남작이 오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방금 전 급하게 올라온 소식입니다.”

“지금 위치는.”

“그게… 저, 황공하오나 현재 상황에선 자세히 알 방도가 없습니다. 첫 보고는 분명 북쪽이었는데, 잠시 후 보고가 이미 중앙 지역입니다.”

세상에.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

“음.”

황궁 앞에 다다른 다곤 존 나센 남작은 가볍게 몸을 한 번 풀었다.

혼자 조용히 온다고 왔는데, 어쩌다 보니 제국이 너무 놀란 것 같다.

그 부분이 조금은 미안해져서 중앙 지역에 들어선 후론 최대한 천천히 왔다.

물론 그 천천히 온다는 건 순전히 그의 기준에서였지만 말이다.

“존 나센 남작. 황궁 방문을 환영합니다.”

잠시 후 시종장이 직접 나와서 남작을 영접하기 시작했다.

말이 시종장이지, 따지고 보면 어지간한 후작 정도는 될 수준이다.

그런 인물이 연신 굽신거리는 광경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일.

하지만 시종장은 이걸 전혀 치욕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되려 자신이 이 일을 맡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남작의 방문 소식을 듣고선 굉장히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너무 갑작스레 찾아와서 무례를 범한 건 아닌지 걱정이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그렇다. 정말 그렇다. 두 말 하면 잔소리일 정도로.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고개를 끄덕거린 존 나센 남작은 시종장을 따라 안쪽으로 향했다.

잠시 후, 대전 앞에 다다른 시종장이 존 나센 남작이 왔음을 알린다.

그러자 안에서 기다리던 황제가 안을 들이라고 답했다.

들어가도 좋다는 말에 존 나센 남작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시오. 존 나센 남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인사를 건넨 존 나센 남작은 흘끗 주변을 둘러보았다.

황제의 곁으로 언제 모인 것인지, 제국 10강이 전부 모였다.

심지어 어지간해선 움직이지 않는 교단의 프리실라 단장까지, 전부 다 말이다.

정말 만일을 대비한 것. 아, 혹시 존 나센 남작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냐고?

설마. 이건 그냥 조그마한 상처라도 입혀보자는 식에 불과하다.

최소한 싸워는 보고 죽든 말든 하는 게 맞지 않냐는 것이다.

그만큼 존 나센 남작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무서운 일이었다.

혹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래서 방문했다면 더더욱 공포스럽다.

“혼자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애들과 함께 계신 줄 알았다면 나중에 오는 건데.”

애들, 이라는 말에도 10강 중 어느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 한다.

모욕적인 뜻으로 내뱉는 언사가 아니다. 그냥, 정말로 그래서 그런 것 뿐이다.

“별 일 아니오. 그냥 잠시 전할 말이 있어서.”

이 인간은 갑자기 왜 온 걸까. 심지어 그 어떤 소식도 없이.

카일이 제국에 머물면서 저 남자도 많이 유해진 것 같았는데.

설마 그 모든 것은 폭풍이 닥치기 직전의 고요. 폭풍전야였단 말인가.

“이번에 온 사자에게서 들었습니다. 그, 새로운 사람들이 제국에 왔다고 하던데.”

“…새로 온 자들이라면, 혹시 다른 대륙의 사람들을 말하는 거요?”

황제의 말에 남작은 고개를 끄덕거린 후 말을 이어나갔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한 번 보고 싶더군요.”

그렇게 말하는 남작의 눈동자엔 섬뜩한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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