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존 나센 남작님.”
황실의 사자가 고개를 숙이며 안부를 묻는다.
원래라면 ‘어디의 누구는 지엄한 황명을 받들라!’ 라고 큰 목소리로 외치고.
그 앞에 선 귀족은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그 황명을 받드는 게 맞다.
하지만 이곳이 어디냐. 존 나센 남작가다.
말만 남작가, 제국의 귀족 가문이지 실상은 완전히 독립된 곳이다.
충성을 바치는 봉신 가문도 아닌 협력 관계라 보는 게 맞다.
더군다나 세상 어느 누구라도 해도, 설령 분노가 조절이 안 되는 자라고 해도.
저 거구의 중년 남성을 앞에서 보고 있노라면 절로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잘 지냈습니다. 요즘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상쾌하기도 하군요.”
“그, 그렇습니까.”
존 나센 남작이 웃으면서 대답하다 사자가 덜덜 떤다.
추워서? 그럴 리가. 공포감이 밀려들어서. 죽음이 손짓하는 것 같아서.
서쪽 몬스터를 토벌하면서 산 하나를 지운 일이나.
동쪽에서 그 강력한 가한을 먼지로 만든 전적이 있는 남자다.
그게 아니더라도, 과거 제국을 상대로 웃으면서 싸우던 자들의 리더다.
오죽했으면 존 나센의 모태가 되는 북쪽 사람들과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면.
못 해도 현 제국 전력의 두 배 정도는 보존되었을 거라는 평가도 있다.
아무튼, 그 무시무시한 남자가 웃는다고 해봤자 부드러워질 수가 없다.
본인만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고서도 일부러 저러는 것인지.
사자는 존 나센 남작의 미소에 덜덜 떨리는 손발을 억지로 제어하느라 힘들었다.
절대 저 남자의 신경에 거슬리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
만에 하나 실수를 한다면 그건 황제가 달려와도 막아주지 못 할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한동안 황실 사자가 온 적은 없었는데. 아, 혹시?”
혹시, 우리 존 나센 한테 막 선전포고라도 하러 온 건가?
라는 기대감이 서린 눈빛으로 사자를 지그시 쳐다보는 존 나센 남작.
“황제 폐하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거기서 또 다시 죽음의 기운을 느낀 사자는 급히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이 영광스러운 존 나센이 남작위에 머무는 것은 제국으로서 참으로 안타깝고, 또 말이 되지 않는 일이라 하시며 승작 건을 논의하고자 하십니다!”
이것도 생각해보면 굉장히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황제가 승작을 하고 싶으면 하는 것이고, 아니면 아닌 건데.
승작 건으로 찾아와서는 그걸 논의하고자 한다니. 이 무슨 일인지.
제국 역사를 통틀어 아무리 찾아봐도 이런 적이 없다.
하다못해 초기 대공들도 초대 황제가 황가와 연을 맺게 해주며 동시에 대공 작위를 내렸다.
논의? 제국의 절대자가 작위를 올려주는데 왜 논의를 하겠는가.
그래. 바로 이곳, 존 나센만 빼고 말이다.
“승작이라. 이미 오래전에 이야기가 끝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남작위면 만족한다. 그 이상은 괜히 귀찮기만 할 뿐이다.
우리들을 귀찮게만 하지 않는다면 우리들도 협조를 해줄 수 있다.
그 조건들에 의해 최대한 잡음이 없는 가장 낮은 작위를 받은 것인데.
“혹시 우리들에게 무언가 따로 원하는 거라도 있습니까?”
존 나센 남작은 정말 궁금해서 한 번 물어본 것이었다.
하지만 사자 입장에서는 그 말이 어떻게 들렸느냐.
“지금 우리 귀찮게 하겠다는 거냐?”
사자가 기겁을 하며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라고 외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절대 존 나센 분들을 귀찮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그런 일은 아니니 그런 생각을 부디 하지 않았다면 좋겠다고 전하셨습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그리 확답을 해주니 다행이군요.”
존 나센 남작은 그리 말한 후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7분 남았다. 7분 후에는 유산소를 한 번 하러 가야 한다.
“실은, 존 나센 남작가의 막내 자제 분께서 제국의 5황녀 저하와 연인 관계이지 않습니까.”
“그랬지요.”
“거기에 리토리오 대공가의 공녀이자 차기 대공이 될 분도 계시고, 현 교단의 성녀님도 계시며, 최근에 주술 분야에 매우 뛰어난 모습을 보이며 귀족 작위까지 받아야 한다는 말이 도는 티샤 양도 있습니다.”
우리 막내가 이렇게 여자가 많았던가? 큰놈이랑 딸아이보다 먼저 결혼하겠구나.
며느리가 넷이라는 말에도 남작은 크게 놀라지 않는 모습이었다.
“좋은 소식이군요. 그래서요.”
“이런 부분으로 볼 때 막내 자제 분도 그렇지만, 아내가 될 여인들 쪽에서 보기에도 남작위는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아, 오해는 하지 마시길. 제가 말씀을 드리는 건….”
이해한다며 남작이 손을 휘휘 내젓는다.
아예 관심을 끊고 살고 있지만, 제국 상황을 아예 모르는 건 아니다.
황제의 적녀, 그리고 차기 대공, 성녀, 신흥 귀족까지.
그곳의 여인들과 혼인을 하는데 남작위는 분명 초라한 것이 맞다.
남작 본인은 그 초라함에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제 아이들에 대한 건 다르다. 어찌 되었든 자식이고, 부모이지 않은가.
생판 남과 이어질 때, 그래도 조금이나마 더 나아보였으면 한다.
“으음.”
평소였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거절했을 존 나센 남작.
하지만 그가 오늘만큼은 바로 거절하는 대신 고민하는 기색을 보인다.
거기서 사자는 다시 한 번 황제의 혜안에 감탄하고 말았다.
“존 나센 남작도 결국 부모다. 자식이 결혼할 때, 조금이라도 더 잘나보였으면 하는. 세상 그 무엇도 부술 수 있는 강자이나 지극히 평범해지기도 하는 부모 말이다.”
“이제 슬슬 승작을 논할 때가 되었어. 솔직히 나도, 내 딸아이가 남작 가문의 자제보다는, 못 해도 후작가의 아내로. 그리고 아이는 후작가의 손자, 손녀가 되었으면 하고 말이야.”
황제도 딱히 정치적인 의도를 노리고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제 딸이, 그리고 정치적인 파트너가 되었던 리토리오 대공가의 공녀가.
주술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가능성을 세운 천재 학생이.
그리고 교단의 성녀로서 살아온 한 소녀를 위한 것이었다.
물론, 그 순수한 의도로서 하는 일이 결과적으로는 정치적으로도 좋을 것이다.
황실에도, 대공가와 교단과의 관계에서도, 그리고 주술을 인정한다는 뜻에서도.
겉도 속도 그저 따스한 마음으로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이득을 찾는, 정말이지 제국의 황제다운 생각이었다.
“…승작을 하게 된다면.”
마침내 존 나센 남작이 슬그머니 입술을 뗀다.
“황제께서는, 어디까지 생각 중이신지.”
“아, 네! 폐하께서는 못 해도 후작위가 맞지 않겠냐고 하셨습니다.”
“후작위라. 알기로 후작위가 제국에선 실질적으로 가장 높은 귀족 작위라고 들었는데.”
그리 말하는 남작의 얼굴은 썩 기분이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작위가 올라가면 그만큼 귀찮아지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해서 여태까지 여유롭게 운동을 하던 삶에 혹 방해가 생기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을 하다 보니 표정 관리가 쉽사리 되지 않는다.
“원래라면 황실과 이어지는 곳이니 공작 작위까지도 생각하셨습니다.”
“제국 건국 이래 공작 작위는 딱 세 곳으로 제한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제국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법이지요.”
사자는 은근히 남작이 승작 건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바라는 눈치였다.
황제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응당 그에게도 좋은 일이니 당연한 일.
“지금 당장 확답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생각을 좀 하고 싶군요.”
바로 긍정이 나오지 않은 건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이 정도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굉장히 좋다.
당장 거절하는 게 아니라 생각해보겠단 말이 나올 거라고 예상도 못 했는데.
“그리 말씀해주시니 폐하께서도 굉장히 기뻐하실 겁니다.”
무척 즐겁게 웃으면서, 사자는 이 분위기를 좀 더 이어가려고 했다.
단순히 황제의 뜻만 전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 존 나센과의 친선을 더 도모해야 한다.
그렇기에 이렇게 직접 황명을 받은 사자가 찾아온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남작님. 혹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식 말입니까.”
“얼마 전 제국 남쪽에서 굉장히 좋지 못 한 일이 있었습니다.”
좋지 못 한 일이라고 해봤자 운동 못 하는 것보다 대단한 게 있을까.
라고 생각하며 남작은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음, 이제 2분 남았군.
“바다 건너 새로운 대륙에서, 이상한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서, 굉장히 불온한 생각을 품은 불청객들도 함께 왔지요.”
“그렇습니까. 제국이 퍽 난처했겠군요.”
“정확히는 그럴 뻔 했습니다. 남작님의 막내 자제 분께서 가뿐히 막아주셨습니다.”
사자의 말에 남작의 눈매가 슬쩍 올라간다.
관심이 조금은 더 생긴 눈치에 사자가 재빠르게 말을 잇는다.
“이번에 온 망명자들의 말에 따르면, 바다 건너 대륙은 마법을 다른 쪽으로 굉장히 많이 발전시켰다고 합니다. 거기에 마력석이라는, 이곳에는 없는 자원을 이용하여 각종 분야에 이용한다고도 합니다. 이를테면 마력 대포라던가 신체 능력을 향상시키는 슈트라던가….”
꿈틀-.
순간 남작의 이마 위에 커다란 힘줄 하나가 솟아났다.
아마 그 광경을 리어나 레아가 보았다면 사자의 입을 틀어막았거나.
그도 아니라면 황급히 몸을 돌려서는 도망이라도 쳤을 것이다.
다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자는 그걸 미처 알아차리지 못 했다.
“…그래서요. 그것들을 가져온 그놈들을, 어찌 했습니까?”
“일단 접근하던 함선들은 카일 자제분께서 일격에 모조리 수장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슈트인지 하는 것들은 ‘이런 요망한 것들은 당장에 사라져야 한다!’ 라고 외치시며 두 손으로 꾹꾹 뭉쳐서는 아예 금석문으로 만드셨더군요.”
“금석문이라.”
“예. 인간의 노력과 단련을 평가절하 하는 악마의 물건이라고 하셨던가.”
이어지는 사자의 말에 의하면, 카일이 ‘이게 바로 존 나센 척화비다!’ 라고 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