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헉! ]
황녀가 마시고 있던 말 젖을 그대로 뿜어버린다.
맛이 시큼해서? 아니다. 딱히 맛에 민감한 황녀는 아니다.
그녀가 갑자기 이러는 원인은, 바로 카일이 내놓은 대화 주제.
[ 카일. 지금, 지금 뭐라고 했어? ]
“여자 셋이서 사이좋게 나갔다고요.”
[ 설마 또 연합이야? 아니, 나 견제 그만 하겠다더니…. ]
“그건 아니에요.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어요.”
[ 어떻게? ]
이걸 이야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째 남의 이야기를 너무 여기저기 떠벌리는 느낌인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카일은 결국 현 상황을 말하고 말았다.
‘어차피 말 안 하면 황녀는 무조건 말하라고 귀찮게 할 성격이니까.’
아마 또 다시 세 여자가 자신만 빼두고 무언가 꾸미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면서 ‘혹시 너도 결국 나를 밀어내는 거냐.’ 말까지 들을 수 있다.
괜한 소리 들을 바에 차라리 그냥 솔직히 말하는 게 낫다.
[ …아니. 남의 연애사에는 왜 그렇게 열정적인 거래? ]
그리고 카일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황녀는 정확한 점을 짚어냈다.
솔직히 카일도 대체 왜 티샤와 엘가가 그러는지 이해가 잘 안 가는 상황.
“저도 정확히는 모르죠.”
[ 모르는데 등은 왜 떠민 거지? ]
“티샤랑 엘가님이랑 전부 너무 적극적이어서요. 그리고 왜 그러는지 정확하게 모르는 거지, 어느 정도 감은 잡히는 것 같아서 그런 거고요.”
단순히 남의 연애는 참견만 해도 재미있어서 그러는 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두 여자는, 그래도 나름 같이 지낸 벗이 행복해지기를 바라서.
본인들도 이제 겨우 행복을 찾았으니 다른 이들도 그러기를 원해서 그럴 수도 있다.
“티샤는 이안이랑. 그리고 엘가는 레토랑. 알게 모르게 많이 친하니까요. 본인들은 맞다고 할 수도 있고, 또는 아닐 수도 있다고 하지만 아무튼 나름 서로 챙기는 사이예요.”
[ 그러니까, 그 사내 둘이 하는 짓이 너무 답답해서. 그걸 티샤와 공녀가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도와주자는 마음으로서 나서는 거다. 이 말이군. ]
그렇다, 라고 카일이 대답하자 황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대체 얼마나 답답한 인간들이기에 그 여자들이 나서는 것이냐고.
본인은 도통 이해가 안 간다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황녀님. 그, 넬 기억하죠.”
[ 기억하지. 기억을 못 할 수가 있나? 카일, 네가 황실 연회에 와서는 황제 폐하께 대뜸 벌을 내려달라고 했던 이유잖아. 그거 때문에 폐하가 얼마나 놀라셨는지 모르지? ]
그 부분에 대해서는 카일도 할 말이 없었다.
황제에게는 죄송하다고 이미 사죄까지 했지만 그래도 좀 과하긴 했다.
“아무튼, 그 넬이요. 황녀님도 언제부터인가 여자라는 거 눈치 챘죠?”
[ 확신은 못 했지만 의심은 하고 있었지. 솔직히 너무 티가 나잖아. ]
넬과 가까이 지내지 않은 황녀도 얼추 눈치를 채고 있었단다.
물론 그 황녀의 눈썰미가 보통 사람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좋긴 하지만.
아무튼 가까이서 지낸 이들이라면 넬에 대해서는 눈치를 챌 법도 하다는 뜻.
“참고로 이안이랑 레토는 끝까지 몰랐어요. 넬이 여자라는 거.”
[ …그 셋이 항상 카일, 네게 단련을 같이 받지 않았어? ]
“그랬죠.”
[ 그런데도 몰랐다고? 네가 이야기를 하고 나서 알았다고? ]
카일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황녀가 이마를 짚는다.
그리고는 ‘세상에. 뭐 그런 사내가.’ 라고 중얼거린다.
저 황녀조차도 저렇게 장탄식을 내뱉을 정도다.
이러니 티샤와 엘가가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안달이 난 걸 수도 있다.
[ 티샤와 공녀의 행동이 이제야 좀 이해가 가네. ]
“그렇죠?”
[ 네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냥 본인들 일이나 잘 할 것이지, 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런 사내들이 벗이라면. 도와주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아. 어쩌다가 그런 인간들만 꼬였을까. ]
혀를 찬 황녀는 본인이 뿜어낸 말 젖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못 보일 꼴을 보였다면서 부끄러워하는데, 그 모습이 또 은근히 재미있다.
“그러고 보니, 동쪽에서는 저 말 젖으로 술과 음료를 대신한다고 들었는데.”
[ 맞아. 물이나 술보다도 더 흔해서 그런지 다들 많이 마시더라고. ]
“맛은 어때요?”
[ 부족마다, 그리고 주는 사람마다 그 맛이 가지각색이야. 어떤 건 연하고. 어떤 건 진하고. 또 어떤 건 부드럽고 가끔 시큼한 맛이 돌 때도 있어. 덕분에 적응이 전혀 안 돼. ]
어지간해서는 먹을 것으로 투정을 하지 않는 황녀다.
그런 그녀가 저런 말을 할 정도면, 정말 적응하는 데에 애를 먹고 있긴 한 모양이다.
“동쪽 상황은요?”
[ 순조로워. 이대로만 간다면 한 달 안에 끝날 것 같아. ]
“다행이네요. 또 이상한 놈이 등장해서 방해는 하지 않을까 했는데.”
카일의 말에 황녀는 실소를 내뱉을 뻔 했다.
얼마 전에 존 나센이 단체로 몰려와서 동쪽을 뒤엎었는데.
대체 어떤 미친놈이 그 상황에서 정말로 다시 싸우자고 하겠는가.
장담하는데, 그런 말을 했다간 생존한 전사들이 가만 두지 않을 거다.
[ 아무튼, 난 이만 가봐야겠어. 한창 나를 환영하는 연회가 베풀어지고 있는데 카일, 네가 갑자기 연락을 해서 급하게 받으려고 달려온 거거든. ]
“정말요? 아, 괜히 연락 드렸네. 얼른 가보세요.”
[ 오늘은 사랑한다는 말 안 해줘? ]
“매일 해주면 감상이 떨어질까 그러는 건데요.”
그러자 황녀가 정색을 하며 본인은 절대 아니라고 말한다.
언제, 어느 때고 말해도 항상 좋으니까. 감상이 떨어질 일 따위 없으니까.
자신이 제국으로 귀환하기 전까지 매일 해달라고 보채기까지 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그러니까 부디 체통 좀 지키세요, 황녀 저하.”
오늘도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여주어야 겨우 만족하는 황녀였다.
*
[ 그러면 저도 다시 운동이나 하러 갈게요. ]
그 말을 끝으로 마법 통신구 너머에 있던 카일이 사라진다.
황녀는 이제 텅 비어버린 통신구를 여전히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항상 이렇다. 통신이 끝나도 얼굴을 볼 수 없게 되면, 매번 아쉽다.
통신을 하기 전에는 이런 말을 하고, 저런 말을 들어야지. 하다가도.
막상 카일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그 계획들이 와르르 무너진다.
“황녀 저하? 아직이십니까?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미안. 바로 나가.”
제국의 황녀가 당도하였음을 축하하는 부족들의 연회 자리.
그 주인공이 갑자기 막사 안으로 들어가선 나오지 않는다.
이러면 동쪽 유목 부족들도 불안함을 느낄 가능성이 커진다.
해서 기사들이 찾으러 오니 바로 막사 바깥으로 향하는 황녀였다.
그리고 황녀가 다시 돌아오자, 부족장들이 소리를 지른다.
“제국과 동쪽 평원의 영원한 혈맹을 위하여!”
“훠오오오!!”
피로써 맺어진 동맹. 정확하게는, 존 나센에 의해 뭉개진 후 정해진 굴복.
스스로 제국에 고개를 숙이고서 용의 눈치를 살피는 늑대라 부르는 게 맞을 것이다.
‘꼴에 그래도 자존심이 남아있어선.’
속으로 혀를 찬 황녀였지만 굳이 그걸 바깥으론 드러내지 않았다.
원래 이 세상은 그렇다. 다들 속내를 숨기고서, 겉으론 웃으며 지낸다.
제국도 아마 비슷할 것이다. 왕국 연합, 독립 영주들, 그리고 동쪽 부족들까지.
그들 모두를 믿는다며 포용하는 모습을 보이나 또 한편으론 대비할 것이다.
‘물론… 존 나센이 있는 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지만 말이야.’
기사에게서 술잔을 받아든 황녀가 연회의 중심으로 나아간다.
“자. 우리 용맹한 전사들. 오늘은 서로 아주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셔. 그대들이 그렇게나 기다리던 용께서, 늑대들의 당당한 모습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워오오오!!”
우렁찬 늑대의 소리와 함께 몇몇 전사들이 앞으로 나선다.
이윽고 그들 앞에 또 다른 전사 몇몇이 낑낑거리며 무언가를 들고 나온다.
그것의 정체는 바로 봉과 원판. 존 나센에서 쓰는 바벨과 유사한 것이었다.
“오늘의 영광스러운 도전을 감행할 전사들이여! 울부짖어라! 늑대의 영혼을 담아라!”
“워오오오오오오오오!!”
진짜 존 나센 사람들도 대단하지만, 이것들도 제정신은 아니야.
황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면서 저들이 하는 짓을 바라보았다.
현재 상황에선 아직 존 나센이 내어준 무게를 들 수 없다고 한다.
혹시나 싶어 황녀도 한 번 슬쩍 도전했지만 만만치 않은 무게였다.
이걸 너무나 가뿐하게 들었다는 존 나센 남작은 도대체….
새삼 존 나센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그 존 나센 남작에게서 인정을 받기 위해서.
그리고 동쪽의 전사들이 푸른 늑대의 후예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언제부터인가 이들은 존 나센이 제시한 중량에 도달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물론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물어보니 카일도 힘들었단다.
그 무게를 존 나센도 아닌 이들이 감당하려고 한다니.
“자, 도전을 시작하겠다! 이 연회에서, 늑대들의 영광을 증명하라!”
“흐으으!! 흐읍! 끄으으으읏!!”
전사 하나가 나서서는 봉을 쥐고서 안간힘을 쓴다.
일단 바닥에서 드는 것에는 성공했다. 성공했는데, 그 이상이 되지 않는다.
감당하지 못 하는 무게다. 더 고집을 부려봤자 몸만 상한다.
그걸 알아차렸는지 늙은 부족장도 바로 전사를 제지했다.
첫 번째 전사는 아쉽다는 표정과 함께 물러나고, 다음 도전자가 나선다.
하지만 두 번째 전사도 결국 전부를 들어올리지 못 했다.
다음도, 그 다음도. 전사들이 계속 도전했으나 성공하는 이는 없었다.
결국 마지막 전사까지도 무게를 감당하지 못 했다.
모두가 실패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실망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 눈을 더욱 번뜩이면서 노력과 의지를 활활 불태운다.
“용께서 봉을 내리시니, 우리 늑대의 후예들은 마땅히! 푸른 늑대와 같이, 용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 무게를 감당하고 우리들의 명예로움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워우우우!!”
후일 동쪽 부족들 사이에서 최고로 존엄하고, 가장 중요시 여겨지는 행사.
바야흐로 ‘용봉지회’ 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