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241화 (241/318)

넬을 찾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실내 연무장에서 조금만 이동하면 닿는 곳, 실외 연무장.

그곳에서 공강 시간 때마다 검을 휘두르는 건 그녀가 유일하니까.

“아! 카일님! 그리고 이안님까지! 단련을 전부 마치신 모양입니다!”

한창 검을 휘두르다 말고 쪼르르 달려와서 바로 고개를 숙이는 넬.

이러지 않아도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본인에게 당당할 수가 없다고.

카일님의 말씀에 따라 무릎을 꿇는 것 대신 이리 하고 있는 거라고.

넬의 그 강력한 주장에 카일은 결국 수긍하고 말았었다.

“검술 훈련은 잘 되어가나요?”

“네, 카일님. 스승님. 그러니까 이안님께서 너무 잘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몇 년 안으로 검술로는 무조건 최강이 되는 이안이다.

아마 최연소 10강 타이틀도 노려볼 법 하지 않을까.

‘솔직히 아버지가 가르쳤는데 그 정도는 기본이지.’

일단 그 부분은 지금 당장 중요한 부분이 아니니 패스.

카일은 넬에게 잠시 이야기나 좀 하자고 하며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 뒤를 이안이 말없이, 하지만 굉장히 긴장한 기색으로 뒤따른다.

“어, 하실 말씀이 혹시 길거나 하는 겁니까?”

“왜요, 넬?”

“카일님께선 제게 이야기할 게 있어도 이 근처에서 하셨습니다. 얼른 대화 마무리하고 가서 검 한 번 더 휘두르고, 루틴 한 번 더 돌리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랬었구나 싶다.

덤으로, 넬이 여자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음에도.

강해지고 싶다는 말에 눈이 돌아가서 너무 몰아붙였나 생각이 문득 든다.

레토는 물론이고 이안조차도 초반엔 힘들어서 적응을 못 했는데.

그걸 넬은 군말 없이 버티고 또 버텨서 여기까지 오는 데에 성공했다.

“그, 전부 넬 잘 되라고 한 일인 건 알고 있죠?”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다, 카일님. 카일님이 없으셨다면 저는 이안님의 검술 훈련을 반도 따라가지 못 했을 게 분명합니다. 검을 휘두르는 것은 결국 제 팔, 제 팔을 지탱하는 것은 두 다리. 그 두 다리와 팔을 이끄는 게 튼튼한 육체이니까요.”

생각해보니, 존 나센에 갔을 때 다른 누구도 아닌 레아가 넬을 맡았었다.

그걸 떠올린 카일은 ‘누님이 이걸 보셨다면 꽤 뿌듯해 하셨을 텐데.’ 라고 중얼거렸다.

이후 카페에 들어서자 주인장이 경기를 일으킨다.

저번처럼 미리 언질을 주고서 찾아온 것도 아니고.

카일이 왔다면 그 후 미래의 대공, 현 성녀, 미래의 주술 천재가 오는 것이니까.

“걱정 마세요. 오늘은 이게 끝입니다.”

“저, 정말이죠? 카일 학생? 나 또 심장 벌렁거리게 만들지 말고요.”

“정말 안 와요. 잠깐 이야기만 하다가 갈 겁니다.”

이쯤 되면 차라리 카페를 대신할 공간을 하나 만드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실내 연무장은 신성한 곳이니 무조건 패스고.

“앉아요, 넬.”

“네. 감사합니다. 카일님.”

일부러 넬의 자리를 챙겨주며, 카일은 이안을 보고 눈짓을 했다.

나중에 지금과 같은 상황에 쳐할 때 멍하니 있지 말고 똑같이 따라하라고.

지금처럼 사소한 부분을 챙겨주는 게 큰 점수를 딴다는 뜻으로 말이다.

끼익, 덜컹-.

‘아니, 야, 이 자식아. 좀 보라고! 보고 배워! 나중에 써먹으라고!’

카일의 그런 안타까운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안은 그냥 제 자리의 의자를 빼서 엉덩이를 붙일 뿐이었다.

심지어, 넬 옆자리도 아니고 카일의 옆이다.

‘이 새끼 혹시 일부러 이러는 건가?’

라는, 상당히 타당한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카일은 포기하지 않았다.

일단 넬의 자리를 봐준 후 이안의 옆으로 다가간 그는.

“이안.”

“왜 그러지?”

“여기 말고, 저리 가서 앉아요.”

“…넬의 옆에?”

“얼른요.”

쟤가 좋다면서. 그러면 쟤 옆에 가서 앉아야지.

내 옆에 앉으면 그림이 이상해지잖아, 이 답답한 것아.

절로 이마에 손을 얹고 한숨이 푹푹 나오는 순간이었다.

“알겠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안이 말은 잘 들어준다는 것.

왜 가야 하느냐, 따위의 눈치 제로 질문이 안 나온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자, 넬. 이제부터 내가 뭐 하나 물어볼 건데요.”

“경청하겠습니다, 카일님.”

“그런 진지한 모습 그대로, 대답도 정말 진지하게 해주었으면 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해서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하는 넬을 바라보며 카일은 말을 이었다.

“잠깐 옆에 좀 봐요.”

“옆 말씀이십니까?”

시키는 대로 옆으로 고개를 돌린 넬이 이안과 딱 시선이 마주친다.

“….”

그 이안을 잘만 바라보는 넬과는 별개로, 이안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린다.

아무래도 넬보다는 이안 쪽 마음이 훨씬 더 말랑해진 모양이었다.

“옆에 누가 있죠?”

“이안님이 계십니다.”

“그렇죠. 이안이죠. 그러면, 넬. 이안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카일의 그 물음에 넬은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좋으신 분입니다. 너무 좋은 분입니다. 제게는 카일님과 함께, 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기사로서 그 꿈을 펼칠 수 있도록 해주신 분이며 특히나 검술 부분은….”

“워워. 진정하고. 알았어요. 아주 잘 알았는데요. 내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에요.”

그러자 넬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라고 반문한다.

어째 이 남자나 이 여자나 비슷한 부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술 스승으로서. 은인으로서 말고요. 친구로서도 말고.”

“그러면….”

“이성으로서 어떠냐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후의 상황은 침묵, 침묵, 그리고 침묵 뿐이었다.

카일은 넬의 대답을 기다리느라, 이안은 바짝 긴장해서는 숨소리도 못 냈고.

가장 중요한 넬은 열심히 카일의 그 질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어… 저, 카일님. 혹시 제가….”

“잘못 들은 것도 아니고, 질문 잘못 한 것도 아니고. 다 아니에요. 맞게 들었고 맞게 물어본 거예요. 자, 그러니까 정말 진지하게. 농담 하지 말라는 말도 하지 말고요.”

“그, 으….”

“최선을 다해서 대답한다고 했잖아요. 그 약속은 지켜야죠.”

본인이 내뱉은 말이니 넘어갈 수도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기사를 꿈꾸는 넬에게 있어 자신의 말은 지켜야 하는 법.

거기에 카일 또한 은인이니 그 은인의 부탁을 농담으로 치부할 수도 없다.

“….”

넬이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이안을 바라본다.

내심 이안도 그런 넬을 마주보며 무언가 분위기 좀 냈으면 하는데.

그런 카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안은 그냥 시선만 피하고 있었다.

우리 이안이 갈 길은 아직 멀고도 험한 것 같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카일이 다시 한 번 입술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멋진… 분입니다.”

“잠깐만. 넬. 뭐라고요?”

“멋진 분. 멋진 남성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나요?”

중요한 부분이다. 단순히 넬의 마음을 알아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넬의 속내를 보는 것으로서 이안의 마음도 크게 흔들 수 있기에.

혹시나 또 이 인간이 눈치 없이 굴지 못 하도록.

“때로는 엉뚱한 분이기도 하지만, 검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는 세상 진지하신 분입니다. 검을 휘두를 때, 그 모습이 그렇게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또요?”

“…여태까지 다른 사심 하나 없이, 저를 봐주신 것도 좋았습니다. 덕분에 아무 걱정도 없이 검술에만 매진할 수 있었고, 기사라는 꿈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꽤나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온다. 이 정도면, 평타 이상인데.

“그렇다는데요, 이안.”

“아? 어, 들었다. 음, 들었고말고.”

“그러면 이안, 당신이 넬한테 해줄 말은 뭐 없어요?”

“무슨 소리지?”

“당신 넬 좋아한다면서요.”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묵직한 사실을 내려놓는 카일이었다.

덕분에 이안이 기겁을 하고, 넬도 앗? 하고 놀라선 이안을 바라본다.

“카, 카일. 그건….”

“이안. 넬 좋아해요, 안 좋아해요.”

“…좋아한다.”

“제자로서 좋아하는 거예요? 아니면 같은 검사로서 좋아하는 건가요?”

“…둘 다 맞기도 하지만… 둘 다 아니기도 하다.”

“그러면요. 어느 부분으로 해서 좋아하는 건데요.”

그 물음에 이안이 바로 대답을 하지 못 하고 망설인다.

여태까지 잘만 답해놓고 막판에 망설이는 걸 보니 속이 답답해진다.

‘여기서 망설이면 다 난감해져! 부끄러워도 일단 질러! 질러야 한다고!’

카일의 그 애타는 외침이 통한 것일까.

입술을 깨문 이안이 비로소 말했다.

“매력적인 여인, 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론은?”

“…이성으로, 좋아한다.”

퍼엉!-

아마 이 세상에 효과음이라는 게 있었다면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까 싶다.

넬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는 걸 보면 누구라도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아, 아… 으아아….”

넬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어쩔 줄 몰라한다.

이안 또한 일단 대답은 했는데 본인이 내뱉어놓고 부끄러워 죽으려고 한다.

“들었죠, 넬?”

“그, 그게….”

“그러면 방해꾼은 이만 사라져줄 테니 둘이 이야기 더 하고 와요.”

“에?”

“어? 아니, 잠깐. 카일! 카일!!”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이안을 내버려둔 채로, 카일은 잽싸게 카페를 나왔다.

여기서 더 있다간 엘가든 티샤든, 아니면 성녀든 누구 하나가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러면 기껏 조성한 오붓한 분위기를 망칠 수도 있으니 그건 아니될 말씀.

‘그리고 이렇게 붙여놓아야 나한테 들러붙지 않고 본인들이 알아서 헤쳐나가지.’

해줄 만큼 다 해주었다. 이 이상은 본인들이 처리하도록 한다.

이것이 바로 참된 소개팅 주선자의 모습 아니겠는가.

“어, 카일님. 카페에 다녀오시는 겁니까?”

이 때, 저 멀리서 레토가 다가오는 게 카일의 눈에 들어왔다.

“….”

잠깐 그를 바라보던 카일이 갑자기 레토 앞으로 달려간다.

그 광경에 레토가 흠칫 놀라서는 도망이라도 칠까 고민하는 찰나.

“레토.”

순식간에 앞으로 다가온 카일이 입술을 뗀다.

“네, 네. 카일님.”

“뭐 하나 물어볼게요.”

“아, 예. 뭐든….”

“혹시 넬 좋아해요?”

“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냐는 표정.

하지만 카일 입장에선 나름 중요한 질문이었다.

넬 옆에 누가 가장 많이 있었는가? 바로 이안과 레토다.

아직 넬이 남자라고 알던 때 셋이 하도 붙어 다니지 않았던가.

‘갑자기 나도 사실은 좋아하는데, 구도 나오면 진짜 이상해진다.’

아니지? 아니라고 해줘. 제발, 레토야.

“…그,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말이죠.”

“네네.”

“생각보다… 매력적인 여성분, 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아.”

이거, 생각해보니 어떤 방식으로든 틀어질 수 있는 로맨스 소설이었다.

그게 하렘이든, 순애든, 그도 아니면 역하렘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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