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여인을 본인이 무조건 택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사라졌다.
그래서 편해질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 쑥맥 -
여인들에게, 미래의 며늘아가들에게 보내는 시어머니의 편지.
거기에 쓰여 있던 단어는 다름 아닌 쑥맥. 그게 무엇을 뜻하겠는가.
아닌 척 하지만 결국 운동 외엔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잘 해보라는 뜻이다.
우리 아들 어떻게든 잘 구슬려서 너희들에게 푹 빠지도록 하고.
너희들도 어렴풋이 눈치챘겠지만 존 나센 남자들이 다 그렇다고.
이후 너희들끼리 경쟁을 해서 하나를 골라내라는 ‘선배’ 의 조언인 것이다.
[ 아쉽게도 그 자리에 없으니 할 수 있는 게 없군. 대신 기대해, 카일. 아주 재미난 소식을 들고서 귀환할 테니까. 그게 내 청혼 선물이 될 거야. ]
당장 황녀부터 그렇게 나오는데 다른 여인들은 어떨지 뻔한 상황.
“카일. 이번 주말에 작은 파티가 하나 있는데, 내가 아직 파트너를 구하지 못 해서요.”
가장 먼저 엘가가 나서서 선수를 쳤다.
다른 여인들 눈치 볼 것도 없고, 서로 그럴 이유도 없으니 이제는 무차별 사격이다.
그리고 그 사격 대상은 당연하게도 카일이었고 말이다.
“작은 파티가, 규모가 어느 정도죠.”
“얼마 안 될 거예요. 한 마흔 명?”
“그 마흔 명이 나름 이름 좀 알려진 가문의 자제들이나 영애겠고요?”
“아마도 그럴 것 같네요. 그래서 갈 건가요, 아니면 말 건가요?”
꾸욱―
제 손목을 붙잡고 있는 엘가의 손에 힘이 슬쩍 들어간다.
어차피 내놓아야 할 답은 하나인데 뭘 그리 망설이냐는 듯이.
“네, 가야죠. 파트너가 없다는데, 제가 당연히 파트너 해야죠. 그런데….”
“아, 티샤나 성녀님이라면 걱정하지 마요. 이미 다 이야기했으니까.”
“….”
여유가 생기니 이제는 본인들끼리 순서까지 정해서 계속 사격이다.
정실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존 나센 식 경쟁은 결혼을 확정한 이후부터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존 나센의 대모, 남작 부인이 확답을 해주었다.
즉, 아카데미 생활을 즐기고 있는 지금 당장은 미친 듯이 매달릴 이유가 없다는 것.
지금 중요한 것은 일단 카일의 마음부터 완전히 흐물거리게 만드는 거다.
그 사이, 사이에 본인 관리도 철저히 하면서 부족함이 없도록 하면 그만.
경쟁이 시작되면 그 때는 이러고 싶어도 시간이 부족하게 된다.
그러기 전에 어떻게든 여자로서, 이 쑥맥을 열심히 조련하는 말이었다.
‘설마, 아버지도 이러셨다는 건가?!’
카일이 속으로 비명을 지르든 말든, 엘가는 상관하지 않았다.
이것은 모두 어머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다. 하라고 등까지 떠밀고 있다.
그렇다면 응당 그 뜻에 따르는 게 며느리의 할 일 아니겠는가!
“엘가 공녀. 어서 와요.”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배님.”
“뭘요. 어머나, 파트너 분이 그 카일이네요?”
파티에 나아가니 모든 이들의 시선이 꽂히는 건 당연했다.
이미 황실 연회로 이쪽에 대한 이야기는 퍼질 만큼 퍼졌다.
네 명의 여인 사이에 끼어버린 존 나센의 카일이다.
그 넷은, 황녀부터 시작해서 차기 대공과 성녀, 그리고 주술계의 샛별.
원래부터 인지도가 있던 이부터 대번에 떠오른 이들까지 다양하다.
“남녀 사이가 참 좋아 보이네요.”
“후후. 그런가요? 어때요?”
슬그머니 카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서 그리 묻는 엘가.
그러자 귀족 영애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 말을 받았다.
“마치 사이좋은 부부 같은데요! 어머나. 실례되는 말이었을까요?”
“아뇨! 전혀 그렇지 않답니다. 선배님!”
“오호호!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아무튼, 참 보기 좋아요!”
이것이 바로 귀족들의 처세술이란 말인가.
카일은 내심 귀족 영애의 대답들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 후 파티에서 있었던 일들은, 뻔하디 뻔한 것들이었다.
카일과 엘가의 관계에 대해 묻고 또 묻는 귀족들.
거기에 확답을 피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미 눈빛과 분위기로 확답을 해주는 엘가.
그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엘가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는 카일까지.
‘이제는 휩쓸리지 않을 명분도 없으니까.’
이런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면, 이 여자에게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된다.
이 순간에 이런 행동을 하면, 다른 여자들이 경계를 하게 된다.
뭐 이런 식으로 카일을 붙잡고 있던 억제력이 이젠 모두 사라졌다.
지금은 모두가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카일을 끌고 다니는 시기다.
그래. 남작 부인의 말대로 지금은 일종의 치팅 데이.
언젠가 다가올 존 나센의 경쟁을 대비한 휴식 시간이다.
“카일.”
“네, 엘가님… 어어.”
지금 이 상황도 그쪽의 연장선이다.
엘가가 술에 취했는가? 아니다. 얼굴이 아주 살짝 붉어진 게 끝이다.
인사불성이 된 것도 아닌데 갑자기 휘청거리다가 품에 안겨든다?
아주 그냥 의도가 훤히 보이는 행동이 아니던가.
“어머, 어머.”
물론 파티에 참석한 귀족 학생들은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취하신 거 아니죠.”
카일의 물음에 엘가가 씨익,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거린다.
“술에는 안 취했죠. 대신, 당신이라는 남자한테 취한 것 같네요.”
“…그런 말, 엘가님한테 그닥 안 어울려요.”
“안 어울린다는 말 치고는 얼굴이 굉장히 붉은데요.”
“이건 술기운 때문에….”
“거짓말. 몸에 안 좋다고 한 모금도 입에 안 댄 것도 알고 있어요.”
할 말이 없던 카일이 속으로 끙끙거리다가 겨우 내놓은 핑계는.
“그, 냄새만으로도 취할 수 있습니다.”
“아하. 그래서 얼굴이 붉어진 거다?”
“…좀 무리수였죠?”
“심하게요.”
엘가는 그리 답하곤 카일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
당연한 말이지만 엘가의 경우는 시작에 불과했다.
심지어 지금 상황에 비하면, 엘가는 정말 신사(?)답다고 할 수 있다.
“저, 티샤. 정말 이래도 되는 거예요? 도서관인데.”
“도서관에서 책 가지고 운동하는 카일이 할 말은 아니잖아요.”
당연히 모를 줄 알았는데. 하도 주술 공부에 열중해서 심심해서 그랬는데.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건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런데요. 왜 카일이 여기서 운동을 했는지 알 것 같아요.”
“이유를 알 것 같다고요?”
그냥 딱히 할 게 없어서. 책 읽는 것보다 책 가지고 운동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정말 존 나센스러운 이유만 가지고 있던 카일로서는 살짝 당황스러웠다.
물론 티샤가 보기에는 애매하게 잡아떼려는 모습으로 비쳤지만 말이다.
“뭔가 굉장히 새로운 걸 하는 느낌이에요.”
“지금 우리처럼요?”
카일의 말에 티샤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더 안으로 파고든다.
그렇다. 이 둘은 현재, 도서관 한쪽에서 서로를 꼭 끌어안은 상태였다.
정확히는 티샤가 파고들면 카일은 그걸 다 받아주는 형식이지만.
아무튼 확실한 건, 도서관에선 이런 행위가 금지라는 점이다.
도서관에서 오직 책만 읽고 공부만 하던 티샤가 할 일은 절대 아니다.
“티샤가 이럴 줄은 몰랐어요. 도서관에서 시끄럽게 굴면 마치 당장 혼이라도 낼 것처럼 굴던 사람 같더니.”
“그러게요. 제가 왜 그랬을까요? 이렇게 흥미진진한데. 아, 다들 이래서 하지 말라는 행위를 더 하는 걸까요? 이거 굉장히 새롭네요.”
라고 말하면서 웃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진짜 마녀처럼 느껴진다.
이 정도면 아무리 쑥맥인 남자라고 해도 그냥 넘어올 것 같은데.
“아. 잠깐만. 누가 오는 것 같은데요?”
“어? 아니, 진짜네. 얼른 옆으로 좀….”
“가만히 있어요!”
몸을 일으키려던 카일과, 그런 카일을 더욱 강하게 짓누르는 티샤.
원래라면 카일의 승리가 당연하지만 힘으로 밀어낼 상대가 아니다.
무엇보다 한창 책을 찾던 두 학생이 바로 건너편까지 다가왔다.
“여기인데. 주술 관련 서적이 생각보다 엄청 많았구나.”
“상태가 조금 그렇다. 아무래도 마법부에 연락해서 보존 마법 좀 걸어달라고 해야겠어.”
“찾았다. 여기 이 서적에 담긴 주술이 결계인데….”
티샤를 시작으로 해서 사장되다시피 했던 주술이 갑자기 뜨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무언가 돈 냄새를 맡은 바이엔 대공이 사업 수완을 발휘한 것이다.
그가 눈여겨본 것은 바로 주술을 이용한 새로운 보호 체계.
마법사들을 항상 대동하자니 인건비가 만만치 않고.
보호 마법들만 들어간 마법 도구들을 만들자니 제작비용이 너무 높다.
마법이 널리 퍼져있다곤 하지만 그만큼 쓰이는 곳도 너무 많기에.
여전히 값싼 비용으로 아무 곳에나 사용하기엔 무리가 있던 것이다.
그 와중에 티샤가 직접 가능성을 제시했다.
주술이 아직 마법보다 대단하다곤 할 수 없으나 한 가지 부분으론 상용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마법처럼 무언가 대단하게 인식이 잡힌 것도 아니다.
따라서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에도 달리 큰 문제가 없다.
사술이라는 오해는 그 편리함만 증명하면 자연스레 없어질 터.
“…티샤를 꿈꾸는 주술계의 새싹들이네요.”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카일이 입을 열자 티샤가 쿡쿡, 웃음을 흘린다.
본인도 이리 될 줄은 미처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
그러다가 갑자기, 티샤가 빤히 카일을 쳐다본다.
그 눈길이 워낙 집요하고 또 노골적이다.
덕분에 카일은 또 왜 이러는 걸까, 속으로 몇 번은 더 중얼거려야만 했다.
“엘가님하곤 파티에도 같이 가고.”
“이미 다 이야기 끝났다고 했는데요?”
“물론 그렇죠. 하지만… 거기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생각하면 속이 좀 쓰려요.”
그러니까, 이 정도는 당연히 고려해줘야 한다고 속삭이면서.
“읍.”
티샤는 재빠르게 카일의 입술을 제 것으로 가득 훔쳐냈다.
바로 옆에서 아카데미 학생들이 주술에 대해 논하든 말든.
지금만큼은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티샤는 키스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이런 조용하고도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남들 몰래 하는 애정 행각이라니.
굉장히 낯부끄럽고, 또 헬스장에서 이런 짓 하는 연인들 많이 쫓아본 자신인데….
‘이런 짓… 충분히 할 만 하구나.’
순식간에 연인들을 이해하게 된 카일이었다.
아, 물론 그렇다고 신성한 헬스장에서 애정 행각을 허락하겠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