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의해 손을 희롱당한 카일은 다급하게 주변을 살폈다.
어차피 학장실이라 둘 이외엔 아무도 없는데도 자동적으로 나오는 반응.
그만큼 방금 전 황녀가 벌인 일은 서로에게 전혀 좋을 게 없는 일이었다.
만약 이걸 누군가 봤다면 그냥 ‘어머!’ 하는 수준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귀족이 평민 여성을 희롱하는 것도 온갖 욕을 처먹을 일인데.
자그마치 황녀의 몸에 손을 대는 건 그 이상으로 끔찍한 상황이다.
아무리 황녀가 원했다고 해도, 혹은 그렇게 유도했다고 해도.
충분히 힘으로 빼낼 수 있었는데 왜 멍하니 있었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황녀님. 그러다가 저 진짜 난처해집니다.”
“내가 미쳤다고 아무 곳에서나 그러겠어?”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바깥이라고 안 새겠냐고요.”
“모르지. 정말 안 샐 수도 있는 일이잖아.”
어떻게 한 마디를 안 져주는 황녀였다.
한숨을 내뱉은 카일은 일단 바깥으로 나가자고 제안했다.
제 근무실을 빼앗긴 학장에게도 미안한 일이고.
황녀도 슬슬 떠날 채비를 해서 당장 오늘 출발해야 할 테니까.
“그래서 왜 대답이 없니?”
“아, 제발 좀. 누가 보면 제가 진짜로 희롱한 줄 알겠어요.”
“희롱한 건 맞잖아? 자의였든 타의였든.”
“제가 저번에 이렇게 직진만 하지 말라고 말씀을 드렸던 것 같은데요?”
부탁이 아니라 일종의 경고였다.
들이대는 것 자체를 막지는 않겠으나 과하게 그러지는 말라고.
부담감을 넘어 기껏 쌓아두었던 호감가지 잡아먹을 테니까.
“카일.”
하지만 다음 이어진 황녀의 말에 카일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이러는 이유는 다 너 때문이야.”
“갑자기 제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네가 이렇다 할 확답을 주지 않으니까. 최소한 마음이라도 받아주고, 정실이든 첩이든 무언가 약속이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이러다가 그냥 내쳐지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 정도로 넌 지금 아무 것도 안 해주고 있다고.”
황녀의 그 말에 카일은 순간 봉으로 머리를 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나만 그런 게 아니야. 다른 여자들도 똑같아. 전보다 더 다가오고 있잖아. 그럴 수밖에 없어. 여전히 너는 답을 주지 않으니까. 주려는 듯 하다가 뒤로 빠지고, 주는 것 같다가도 결국 애매모호한 것들이 전부지. 듣는 사람은 속이 탈 수밖에 없어.”
“그건….”
뭐라고 말을 하려던 카일은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자신의 행동을 생각해보면 황녀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단 하나도 없었다.
이제까지 최대한 여인들의 마음을 내치지 않으면서 받아주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그것들은 그냥 선택을 유예했을 뿐이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속 눈치를 살피고, 그 이상의 확실한 답은 주지 않은 채.
‘이건… 빌어먹을. 로판 속 남자 주인공이랑 다를 게 없었네.’
카일은 반성했다. 스스로를 질책했다.
절대 그런 주인공들 같은 짓은 안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여태까지 나름 잘 하고 있다고 여겼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 가면 누군가는 지칠 수도 있어, 카일.”
“그럴 수도 있죠.”
“당장 혼인을 하면 좋겠지만 거기까지는 안 바라. 대신, 확답은 주는 게 좋다고 생각해.”
황녀는 거기까지 말한 후 본인도 슬슬 가봐야겠다며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을 말없이 보고 있던 카일은 ‘황녀님!’ 하고 그녀를 불러세웠다.
“응?”
“잠시, 잠시 할 말이 있어서.”
황녀를 붙잡은 카일은 잠깐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황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첫 번째는….”
“기대도 안 했어. 그랬다면 아무 것도 안 하고 기다리기만 했겠지.”
“….”
“뭐야. 설마 그것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던 건 아니지? 내가 아는 카일 답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던 황녀는 다시금 카일을 마주보며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차피 넌, 다른 사람들 신경 안 쓰잖아. 그러면 그냥 네 마음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닐까? 막말로 내가 첩이 된다고 해서 황제 폐하가 분노하실 것 같지는 않은데.”
그건 모르는 일이죠. 세상 어느 부모가 본인 딸이 첩이 되는 걸 반기는데요.
라는 말이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치솟았으나 억지로 참아냈다.
누군가 정실이 된다면 누군가는 첩이 되어야 한다.
그게 이곳 사회의 통념이고,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두 달이야.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마음 정리를 해주면 좋겠어. 그런데도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면… 몰라. 그 때는 나도 그냥 막 해버릴 거니까 각오해.”
귀엽기도 하면서 또 은근히 무서운 선전포고를 하는 황녀였다.
“나 진짜 가볼게. 이러다가 늦으면 황태자 전하한테 한 소리 듣거든.”
“…황녀님.”
“응?”
여인을 붙잡고서는 그대로 황녀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잠깐의 작별을 위한 키스, 저번에 남아있던 입맞춤 건.
그도 아니면 이왕 희롱한 거 확실하게 하자는 이상한 결론으로 인해 나온 행동.
무엇이든 좋았다. 이제부터 정말 정신을 차리겠다는 뜻이었다.
“어어….”
서로의 거리가 멀어지고, 잠깐의 키스가 끝이 난 후.
황녀는 멍하니 서서 침음을 흘리고만 있었다.
지금 본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카일이 무슨 짓을 했는지.
분명 몸으로는 받아들였는데 머리로는 아직 받아들이지 못 한 모양.
“책임지라면서요.”
“어, 어?”
“그래서 도장 찍었습니다. 쾅, 하고. 황녀님 뜻이 아닌 제 의지로.”
“그, 어… 나야 좋은 일이긴 한데… 갑자기?”
“덕분에 정신 좀 차렸거든요. 머리가 좀 맑아지는 느낌이네요.”
그렇게 말한 카일은 황녀를 다시 붙잡고선 가볍게 안아주었다.
“잘 다녀오세요. 조심하시고, 이상한 남자한테 눈길 주지 마시고.”
“미쳤어? 널 두고 내가 왜?”
“그건 그렇네요. 제가 있는데 무슨 남자가 눈에 차겠습니까.”
서로 마주보고 웃으면서, 두 남녀는 만남을 마무리했다.
황녀를 마중하고서 다시 아카데미 본관 쪽으로 향하는 길.
그녀의 말은 카일에게 많은 부분들을 일깨워주웠다.
본인의 마음과 행동이,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는 건 큰 충격이었다.
잘 대처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따지고 보면 로판 속 주인공과 다를 게 없지 않았던가.
밀어내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안아주지도 않았고.
눈치를 못 채지는 않았지만 확답을 해주지 않았으며.
믿지 못 했던 건 아니지만 확신을 주지 못 했다.
‘이대로는 안 돼. 티샤도, 엘가도, 그리고 황녀와 성녀까지. 전부가 나만 바라봐주고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이렇게 멍하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카일은 생각했다. 그러면 내가 여태까지 망설인 이유는 뭔가.
혹시 그 넷 중에 싫은 상대가 있어서? 아니다, 그건 아니다.
처음이라면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모두가 다 좋다.
티샤와 성녀는 말할 것도 없고 엘가와 황녀도 그 마음에 다 넘어갔다.
‘내가 망설인 이유는, 역시나 그거 때문이지.’
여인 넷을 품에 안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도 인정이 된다.
문제는, 여자 넷을 안는다면 그 중 하나는 유일한 자리에 앉게 되고.
나머지 셋은 그 하나보다는 못 한 위치에 놓인다는 것이었다.
‘그래. 내가 망설이고 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을 수도 있고, 그녀들에게 미안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결국 그 때문에 미루고, 망설이고, 그러고 있었던 것이다.
황녀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다. 반박할 곳도 없다.
이제 정말로 더는 미룰 수 없다. 망설여서 좋을 게 없다.
확답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그 부분이 아직도 망설여진다.
‘힘든데.’
혹 누군가 조언을 해줄 사람은 없는 걸까.
주변을 둘러봐도 눈치 없기론 둘째 가라면 서러울 이안과 레토가 전부다.
걷는 길 내내 고민에 빠져있던 카일은 결국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일말의 희망을 걸고서, 편지 한 통을 써서 보내기 시작했다.
솔직히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답답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막막한 때에는 누군가에게라도 한 번 기대고 싶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대상이 무조건 자신의 편을 들어줄 가족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냥 철없는 막내아들의 투정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거라도 좋다. 이렇게 속을 한 번 비워내면, 좋은 영향이 있을 테니.
펜을 내려놓은 카일은 곧장 서신을 보내기로 했다.
목적지는 이곳 아카데미에서 멀리 떨어진 곳, 바로 자신의 고향 ‘존 나센’ 이었다.
*
답장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빨리 찾아왔다.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라고 생각하며.
카일은 자신의 이름으로 날아온 가족들의 서신을 재빠르게 확인했다.
- 왜 고민하고 있는 건지, 이 엄마는 이해를 못 하겠구나. 카일. -
그리고 답장은, 아버지도 형도 아닌 어머니가 보낸 것이었다.
- 카일. 우리 사랑스러운 막내. 너는 존 나센의 아들이란다. 그리고 존 나센에는, 정실도 첩도. 제국의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아.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거니 -
어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 여자는 한 명으로만 하시라는 건가.
그건 좀… 난처한데, 라고 생각하며 카일이 다음 부분으로 눈을 내렸다.
- 영원한 정실도, 첩도 없어. 무한 경쟁이다. 무엇이든 항상 싸워서 쟁취하는 거야. 이 엄마가 네 아빠를 어떻게 차지한 것 같니? 전부 제친 거란다. 압도적으로, 그래서 첩 자리조차 감히 생각하지도 못 하도록 말이야. -
…이런 과거사가 있었다는 건 처음 듣는데?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남자가 싸운 게 아니었단 말이야?
- 지금 당장의 정실? 지금 당장의 첩? 그게 무슨 소용이니? 노력해서 지키거나. 노력해서 쟁취하거나. 그게 존 나센의 방식이야. 언제든 그 자리는 바뀌는 거고, 누구든 그 자리를 가질 수 있어야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압도적인 노력과 단련으로 이루어지는 거란다. -
그 부분을 읽는 순간, 카일은 비로소 광명을 찾은 느낌이었다.
- 너도, 그 아이들도. 가족이 되면 모두 존 나센이니까. 존 나센의 방식으로 하면 된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