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성녀님이 오늘부터는 학생 신분으로 아카데미에서 지내게 되셨다고요.”
“네. 엘가 자매님. 그렇게 되었답니다.”
환하게 미소를 짓는 성녀. 덕분에 엘가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뭐라고 하고 싶은데, 저리 환하게 웃으면 그러지도 못 한다.
아주 어릴 적부터 짊어지고 있던 의무를 이제는 내려놓기 시작한 성녀다.
아마도 교황이 허락하고, 성녀이기에 말도 안 되는 일을 허락했을 터.
이렇게 순식간에 일이 처리된 걸 보니 교육성. 아니, 황실도 관련되어 있을 거다.
‘겨우 황녀 저하를 멀리 보냈더니 성녀님이 이렇게 가까이까지.’
황녀와 성녀는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좋은 부분도 있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 둘 모두 카일과 공유하는 게 적다는 것이었다.
예로 들어 강의가 재미가 없다고 해도, 과제가 너무 많다고 해도.
황녀도, 성녀도 거기에 제대로 공감하기는 어렵다.
과거 아카데미를 다녔던 기억을 되짚는 황녀와.
그냥 같은 아카데미에서 지내고 있다는 게 전부인 성녀.
그에 반해 똑같이 아카데미에 있고, 똑같이 강의를 듣는 자신과 티샤는 우위를 점한다.
하지만 이런 식이면, 이제는 성녀도 보다 더 확실하게 개입할 수 있다.
‘카일의 눈치를 보니까 성녀님께 무슨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것 같던데.’
눈치 하나는 확실히 빠른 엘가다. 그녀는 진작 그걸 파악하고 있었다.
일단 이성적인 호감은 아니다. 애정은 분명한 것 같은데, 무언가 다른 애정이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는 것 같은 느낌.
표현이 좀 이상하다고 할 수 있지만 엘가 입장에선 그게 가장 정확한 비유였다.
분명 성녀에게 시선이 가있긴 한데 당최 이해를 할 수가 없는 눈빛이었으니까.
“엘가 자매님? 차가 다 식겠어요. 얼른 드세요.”
“아. 네. 성녀님. 감사합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지만 결론은 결국 하나, 어쩔 수가 없다는 것.
이미 교단과 황실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면 더는 왈가왈부할 수 없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차라리 이게 나을 수도 있다.
라이벌은 가장 가까이에 두고서 지켜보는 것이 좋다.
티샤도 그래서 친하게 지내며 밥도 같이 먹고, 과제도 같이 하고 하는 게 아닌가.
“오늘 강의를 처음 들으셨다고요, 성녀님.”
“네.”
“어떠셨나요? 생각한 것만큼 흥미로우셨나요?”
“네! 재밌었어요! 왜 다들 아카데미에 다니는 건지 알 것 같아요!”
환하게 웃으면서 좋아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껏 쌓은 경계심이 죄다 허물어진다.
진짜 위험한 상대다. 무슨 끼나 다른 속내를 지닌 게 아니다.
그냥 선하고, 화사하기만 한데 그 앞에 서면 그냥 전부 녹아내린다.
이게 진짜 성녀가 지닌 힘이구나. 잘못하면 같이 휩쓸리겠구나.
엘가는 살짝 입술을 깨물고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
한 번만 더 휩쓸리면 성녀에게 카일을 양보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오자마자 쪽지 시험이라는 걸 봤어요!”
“…어머.”
그 경계심이 또 다시 허물어진다.
이렇게 공감이 가는 화제를 꺼내놓다니. 이건 반칙이 아닌가.
“너무 갑작스러워서 혼났어요. 혹시 다른 강의에서도 이러시나요?”
“가끔 그러시는 분들이 계세요. 학생들이 강의에 집중을 하지 못 하면 최후의 방법으로 동원하는 식이죠. 그렇게 하면 학생들이 바로 집중을 하니까.”
“아하. 그렇군요. 하지만 자주 써먹기는 힘들 것 같아요. 학생들에게 너무 힘들어요!”
안 돼. 안 되는데. 저기에 휩쓸리면 안 되는데….
“제 말이요. 시험을 볼 거면 미리 좀 말을 해주던가! 하다못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도 시험 날짜를 고지하고서 준비 시간을 준 다음 시험을 치르는데. 아무리 간단한 쪽지 시험이라지만 당일날 알려주는 게 어디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성녀님?”
“엘가 자매님 말씀이 백 번 옳아요! 저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학생들 입장에선 너무 부담이죠. 거기에 과제까지 내어주신다고 하니 학생들이 비명을 질렀어요.”
“그럴 만 해요! 쪽지 시험도 봤는데 과제?! 너무 하잖아요! 성녀님. 혹시 그 교수, 생긴 건 이렇고 막 표정이 이런 교수 아니었어요?”
엘가의 열정적인 모습에 성녀가 으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곧 답했다.
“네. 맞는 것 같아요. 엘가 자매님이 말씀하시는 교수님이 유명하신 분인가요?”
“유명하죠. 저번 중간고사부터 아주 대단했어요. 시험 범위가 글쎄, 학기 초부터 중간고사 전날까지 배운 범위라고 한 교수랍니다.”
“어… 그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범위가 그 정도면….”
“심하죠! 덕분에 하루를 꼬박 책만 들여다봐야 했어요. 운동도 제대로 못 하고요!”
“히익! 그, 그러면 카일 형제님이 실망하셨을 텐데!”
“그러니까요!! 운동을 쉴 수밖에 없다고 하니 카일이 얼마나 슬퍼했는데!!”
성녀의 영향력에 아주 제대로 휩쓸렸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이성은 외치고 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이후 엘가는 다음 강의에 들어가기 전까지, 거의 한 시간을 넘게 이야기했다.
이렇게 편하게 대화를 하는 상대는 카일을 빼면 거의 없는데.
성녀와는 먼 사이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사이도 아니라고 여겼는데.
그 따스한 목소리와 표정, 그리고 분위기에 완전히 흐물흐물해졌다.
‘으, 으아아! 이제 그만 말해야 하는데!’
혹시 이게 전부 성녀의 노림수라면 정말 무서운 것이다.
사람을 계속 끌어들이는 저 화술하며, 적절한 화제 선택하며.
와중에 또 계속 활기를 넣어주는 맞장구와 가끔 나오는 본인의 이야기까지.
말 그대로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마저 대화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들이었다.
“아아! 죄송해요, 엘가 자매님. 강의가 있으셨다고 했잖아요! 혹 늦으신 건 아니죠?”
지금도 봐라. 자신이 먼저 ‘이만 가봐야겠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
강의가 있다는 걸 기억하고 있다가 제시간에 떠올려서 언급하고 있다.
“아, 아뇨. 성녀님. 딱 지금 일어서면 늦지 않게 강의실에 갈 수 있답니다.”
“다행이네요. 저 때문에 늦으신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어요!”
그래, 저 말도 안 되는 미소. 저것만 보고 있으면 그냥 확 녹아내린다.
동성인 본인조차도 미워할 수가 없게 만드는 그런 힘을 지닌 여자인데.
하물며 이성인 카일이 보기에는 저것보다 몇 배, 아니 몇 십 배는 더 강하게 다가올 거다.
황녀와는 또 다른 유형의 강적이다. 그래, 견제를 해야 마땅한 적인데….
“저는 다음 강의가 없어서요. 자매님만 괜찮으시다면 같이 가도 될까요? 다행히 강의 참관 자격도 있어서, 강의실에 들어가도 문제가 없거든요. 엘가 자매님과 더 이야기도 하고 싶고요!”
그래. 대체 저렇게 다가오는 사람을 어떻게 밀어낼 수 있단 말인가.
리더로서 지녀야 할 덕목 중 하나인 선한 영향력.
꼭 지니고 싶은 그걸, 아무래도 성녀는 타고난 모양이었다.
‘그래서 황녀 저하와 친구가 된 걸 수도 있겠죠.’
고개를 내저은 엘가는 결국 현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네. 성녀님. 같이 가주신다면 저도 참 즐거울 것 같네요.”
때로는 단순히 경쟁만 하는 상대가 아니라, 보고 배울 수 있는 경쟁자도 있음을.
자신이 없는 무언가를 지닌 누군가와 같이 있는다면 더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대공으로서도, 그리고 한 사람의 연인으로서도,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
“오늘 떠나신다고요?”
한편, 또 다시 학장실로 호출된 카일은 그곳에서 황녀를 만나고 있었다.
이쯤 되면 그냥 학장실 말고 다른 곳에 좀 불렀으면 하는데.
또 다시 얼굴이 해쓱해져서는 급하게 자리를 이탈하는 학장을 보며.
카일은 언제 한 번 학장에게 선물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응. 오늘 바로 출발할 거야. 그래야 하루라도 일찍 오니까.”
황녀가 향하려는 곳은 다름 아닌 동쪽, 유목 부족들의 땅.
그 광활한 지역에 제국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옛날부터 제국은 자신들의 영향권에 들어간 지역을 신경 쓰고 있다는 뉘앙스를 주기 위해서.
중요도에 따라 일반 귀족부터 해서 직계 황족까지 파견하는 관행을 지녔다.
물론 위험성도 있으니 아주 강력한 호위를 붙이던가.
아니면 그 자체로 실력이 있는 사람을 뽑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 봤을 때, 황실 직계이면서 10강이기도 한 황녀가 최고의 인선이었다.
“내가 직접 폐하께 건의를 드렸긴 하지만 말이야. 카일, 솔직히 이거 다 너 때문이야.”
“인정합니다.”
이야기를 꺼낸 건 다른 여인들. 그리고 괜찮다며 바람을 잡은 건 카일 본인.
거기에 확실히 이득이 많다고 판단되어 황제에게 먼저 말을 꺼낸 황녀까지.
모두가 각자의 이해관계를 고려해서 내린 판단이라 할 수 있었다.
‘다른 여자들은 너무 강력한 라이벌을 잠깐 밀어내자는 취지겠고. 황녀는 오히려 내 부탁이 있으니까 간다, 라는 느낌으로 둘의 사이를 기정사실화하고 거기에 덤으로 황제에게 일종의 빚까지 만들어서 차후 본인이 원하는 걸 피력하려는 속셈이고.’
결정적으로 그 모든 걸 황제는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을 거다.
이러니 별 다른 말도 없이 바로 황녀의 동쪽행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는 거겠지.
“조심하세요.”
“뭐야. 내 걱정 해주는 거야? 어머나, 감격스러워라.”
솔직히 말하자면 황녀가 위험할 일은 없을 것이다.
가장 위험했던 적, 가한은 이미 존 나센 남작에 의해 재조차 남기지 못 했다.
그리고 그의 전사들 중 대부분은 완전히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다.
남은 건 너무 충격적인 패배에 대한 반발심을 지닐 자들.
실력은 거기서 거기지만 일단 남은 부족들을 선동할 수준은 되는 이들이다.
‘황녀 입장에서 보면 손쉬운 상대긴 하지만, 그래도 일이 터지면 황녀에게 좋을 게 없어.’
잘 해낼 거라고 믿어야지, 별 수가 있나.
여기서 또 따라가면 엘가와 티샤가 절대 안 된다고 붙잡을 거다.
저번에도 같이 붙어있었으면서 어디 또 붙어있으려고 하냐고.
“아, 카일. 가기 전에 잠깐 할 게 있어.”
그리 말하더니 갑자기 덥석 카일의 손을 붙잡는 황녀.
이게 무슨 짓인가 싶은 카일이 멍하니 서있던 찰나.
말캉-.
‘어?’
찰나였지만 생각지도 못 한 감촉이 손에 전해졌다.
그와 동시에 카일은 다급히 손을 빼내면서 소리쳤다.
“뭐, 뭐하는 겁니까!!”
“확인 도장.”
“예?”
“처녀의 몸을 희롱했으니까, 꼭 책임져야 해.”
희롱 당한 건 그쪽 가슴이 아니라 내 손인데요?!
라는 말이 절로 치솟는 걸 겨우 참아낸 카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