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231화 (231/318)

발등으로 날아오는 구두를 피하기 위한 죽음의 탭댄스가 마침내 끝났다.

아직도 찍힌 발등이 얼얼한 느낌이다. 피만 안 나면 다행인 수준이다.

그럼에도 카일은 미소를 잃지 않고 끝까지 티샤를 잡아주었다.

‘솔직히 이건 너무 웃겨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또 굉장히 귀엽기도 했다.

언제 또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을까 싶다.

티사라면, 자신의 부족함에 절대 침묵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무조건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기어코 잘 해내고 말 것이다.

그 뜻은 언젠가는 춤마저도 결국 잘 추게 된다는 뜻이고.

오늘처럼 죽음의 탭댄스 대신 너무나 평화로운 춤 실력을 지니게 된다는 것.

‘아쉽지만 그게 티샤에겐 좋은 일이니까. 솔직히 발등 너무 아프다.’

슬그머니 주변을 살핀 카일은 바로 다음 할 일을 알아차렸다.

평범한 주인공들은 놓쳤을지도 모르지만 본인은 절대 아니다.

똑같이 고구마 먹다간 자기 욕 하는 꼴이 되니 당연한 일.

“다음에는 제가 한 곡 청해도 되겠죠, 티샤?”

“네? 무, 물론이죠!”

아예 대놓고 들으라는 듯 일부러 목소리 크기를 키웠다.

덕분에 엘가 때와는 달리 묘한 눈빛을 보내던 귀족들이 침음을 흘린다.

만약 카일이 영 별로인 반응을 보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연히 옆에서 허우적거리던 티샤라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을 거다.

듣자하니 넬처럼 몰락 귀족도 아니고 일개 평민에 불과하가도 하던데.

아무리 주술로서 리토리오 대공가의 감사 인사도 받고 존 나센의 인정도 받았다지만.

그래도 평민인데, 연회에까지 와서 꼭 저렇게 해야 하나, 라고 말이다.

하지만 카일이 직접 나서서 그 여지를 완전히 깨부수었다.

난 정말 즐거웠다. 나중에 또 추고 싶다. 거기에 여담 붙이는 놈들, 각오해라.

왈가왈부하는 순간 당신들은 춤 얼마나 잘 추는지 봐주겠다.

귀족들이 듣기에는 아마 그런 내용으로 들렸을 확률이 높다.

“카일.”

티샤를 데리고서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데.

뒤에서 황녀와 성녀가 다가오는 것이 카일의 눈에 들어왔다.

‘아, 잠깐. 설마 두 사람 전부 춤 신청은 아니겠지.’

춤이 싫어서? 아니다. 유산소는 이제 그만하고 싶어서 그렇다.

존 나센에게 춤은 춤이 아니라 움직이는 유산소 운동에 불과하다.

그리고 유산소는 그 존 나센 남작도 그리 좋아하지 않을 정도.

제발 유산소 좀 그만하게 해주세요. 차라리 중량이 낫겠어요.

속으로 간절하게 빈 것이 하늘에 닿았는지, 두 여자는 춤 신청을 하지는 않았다.

“좀 앉을까, 성녀님?”

대신 카일과 엘가, 티샤가 있던 자리에 대뜸 앉아버렸다.

‘…어.’

참고로 카일의 자리는 엘가와 티샤에 의해 중앙에 위치해있다.

그 양 옆으로 두 여자가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그런 그림이었는데.

‘잠깐만, 잠깐만? 이거, 그림이. 그림이 이상하잖아.’

그 옆으로 다시 황녀와 성녀가 앉아버렸다.

그러니까, 지금 카일 본인을 중심으로 네 여자가 둘러앉았다는 소리.

“보니까 카일이랑 한 곡 씩 춤이라도 춘 것 같은데.”

“네, 황녀 저하. 제가 가장 먼저 카일이랑 한 곡 췄답니다.”

“어어. 엘가 자매님이 춤을 추시는 건 한 번도 못 봤는데요.”

“잘 출 거야. 귀족들의 기본 소양이니까.”

“하지만 황녀님은 춤 못 추시잖아요?”

“성녀님? 나는 귀족이 아니라 황족이니까 그렇다고 해줘.”

황녀의 말에 티샤가 살짝 의외라는 눈빛을 띤다.

당연히 본인만 춤을 못 춘다고 여겼는데, 황녀도 별로라니.

의도치 않게 동지를 만난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일까?

“그런데 따지고 보면 성녀님도 춤 못 추잖아.”

“저, 저는! 저는 애당초 이런 자리가 처음이에요!”

본인만 춤을 못 춘다고 여겼는지 재빠르게 성녀를 끌어들이는 황녀.

역시 자신만 뒤처지는 건 절대 못 참는 여인다웠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 아니, 말이 침묵이지 실상은 침묵이 아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싸움이다. 창칼만 없는 전쟁이다.

지금도 보면 알게 모르게 서로를 흘끗거리고 있다.

먼저 입을 열고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견제를 받을 수 있다.

혹은 반대로 그 의견에 편승하여 그 파도를 탈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가장 먼저 입을 여는 자가 가장 많은 눈길을 받을 터.

“저기.”

여인들의 그런 마음을 눈치라도 챈 것인지, 먼저 입을 연 건 카일이었다.

“황녀님은 안 들어가십니까? 보니까 황제 폐하께선 조금 전에 들어가셨는데.”

“폐하야 더 있으실 이유가 없으니까. 온 사람들도 챙기셨고, 카일 네 생일도 축하해주셨고. 괜히 더 계시면 귀족들이 신경 쓰는 게 싫다고 하셨어.”

연회 자리에서까지 황제 눈치를 보는 건 불쌍하다, 이건가.

하기야 가장 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적당히 빠져줄 줄 아는 눈치도 필요하다.

본인만 신나서 계속 어울리면 그 밑의 사람들은 불편해 죽을 수준이니까.

황제도 그 부분을 진작 알고서 빠져준 모양이었다.

‘아니, 한 사람이라도 좀 빠져주면 안 되는 거냐.’

네 명이 이렇게 다 모여 있으면 체력과 정신력도 네 배로.

아니, 열여섯 배로 쭉쭉 사라지는 느낌이다.

둘까지는 괜찮다. 그 정도면 무난하게 버틸 수 있다.

방금 전 엘가와 티샤의 경우처럼 본인이 적당하게 이끌어주고, 또 이끌림 당하면서.

그런 식으로 두 사람의 사이를 적절하게 조율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셋은, 그 이상을 넘어 넷은 조금 힘들다. 아니, 많이 힘들다.

조합부터가 일단 너무 눈에 띈다. 황녀, 성녀, 공녀, 그리고 마녀까지.

‘사람들 시선이라도 좀 적으면 좋을 텐데 하필 자리가 또 연회장이잖아.’

카일은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본인의 걱정이 기우가 아니었음을 알았다.

다른 귀족들 모두가, 자신들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꾸 이쪽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관심을 끊지 않고 있었다.

사실 귀족들에겐 당연한 일이다. 무죄라고 해도 마땅하다.

대체 세상 어떤 사람이 저 다섯의 조합을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압도적인 무력을 지니고서 제국의 역사를 새롭게 쓴 한 남자와.

그 주변에 자리한, 어디 한 곳 뒤처질 수가 없는 여인 넷.

이걸 보고도 관심이 없다고 한다면 사교계에서 바로 묻혀버릴 것이다.

‘차라리 일찍 돌아갈 걸 그랬나?’

카일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몇 번이나 들었다.

하지만 다른 자리도 아니고 자그마치 황실 연회다.

저 피곤해서 먼저 가봄. 라고 빠져나오기엔 너무 거대한 자리다.

거기에, 엘가의 말대로, 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리고 결국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자신이 아닌가.

이게 착각계도 아니고, 후회물도 아니고, 이유는 전부 본인이 제공했다.

저 여자들은 그냥 거기에 이끌려서 여기까지 왔을 뿐이다.

때문에 이제는 정말 정리를 해야 한다.

쳐내는 게 아니라 정말 단순한 정리라고 해도.

휩쓸려서 하는 게 아니라 직접 나서서 해야만 하는 일.

하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그냥 처음 만난 순서로 하자니 황녀의 신분이 문제고. 신분상으로 하자니 처음이었던 티샤가 너무 억울해지고. 호감 순으로 하자면… 성녀님이 너무 반칙이고.’

솔직히 카일 본인은 신분에 아무런 생각이 없다.

평민이든 황족이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다.

그건 존 나센의 모든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황녀라서 극진히 대하고 평민이라서 적당하게 대했나? 아니다.

당장 가족들마저 본인들이 귀족이라는 것에 아무런 생각이 없다.

“아까 보니까 그래도 춤 실력이 많이 나아졌던데요, 티샤.”

“그런가요? 감사해요. 하지만 아직 엘가님에 비하면 부끄러울 정도인 걸요.”

“카일이 발등 찍혀서 아파하는 게 조금 가슴 아프긴 했죠.”

“그랬나요? 하지만 카일은 웃으면서 괜찮다고 해주었어요. 아주 환하게.”

“뭐야. 티샤, 너 카일 발등까지 찍었어? 그러면 춤이 아닌 거 아닌가?”

“황녀님. 황녀님도 못 추시면서 티샤 자매님께 그러시면 안 돼요.”

“성녀님도 못 추잖아. 자꾸 그거 들추지 마.”

“저는 애당초 연회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요!”

카일의 깊은 고민과는 별개로, 네 사람은 부지런히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본인이 더 우위에 있음을 어필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쳐다보든 말든 그녀들에겐 크게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카일. 발등은 괜찮아?”

괜찮아요. 봉이 떨어진 적도 있는데 이 정도야.

정말 괜찮으니까 그만 물어봐요, 황녀님. 티샤 난처하게.

“카일. 아버지가 다음에는 대공가로 다시 한 번 초대하고 싶다는데. 어떤가요?”

그런 말 하면서 자꾸 주변 의식하면 답하기도 애매해요, 엘가님.

연회장에서 보일 거 다 보였겠다, 얼른 공론화 시키고 싶은 겁니까.

“카일. 그, 바이엔 대공께서 아까 전 제게 주술 장신구와 관련해서 이야기하고 싶다는 게 있으셔요. 그런데 제가 감히 대공 각하와 같이 있는 게 너무 부담스러워서. 같이 좀 가줄래요?”

정말로 부담스러워서 같이 가달라는 거 확실하죠?

아까 보니까 바이엔 대공 앞에서도 주술에 대해서 아주 또박또박 잘만 설명하던데요.

“카일 형제님! 그, 있잖아요. 저도 춤이라는 거 한 번 배우고 싶은데. 가르쳐주세요.”

저, 성녀님? 저는 헬스 트레이너는 할 수 있어도 댄스 강사는 문외한이에요.

애당초 이것도 춤을 잘 춰서가 아니라 그냥 몸 움직이는 거라고 생각하고.

일종의 유산소라고 여기니까 그나마 좀 한 게 전부예요.

“카일!”

“카일!”

“카일.”

“카일 형제님!”

누가 제발 나 좀 살려줘. 누가 이 불쌍한 존 나센 좀 건져줘요.

카일은 애타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문제 해결이고 정리고 뭐고, 이러다가 여인들에게 질식사 할 것 같다.

뭐라도 좋으니 일단 여기서 좀 도망치고 싶다.

“카일.”

그런데 구원의 밧줄은,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찾아왔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저기 10강이랑 운동법에 관련해서 의견을 나누는데….”

“당장 갑시다. 어디, 누구요? 당장 가요, 이안.”

설마 그 이안이 구원자가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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