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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전투종족-230화 (230/318)

“이제 할 일도 다 끝난 것 같은데, 우리들 문제도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들 문제라면.”

“지금 이 상황이요. 나와 당신, 그리고, 나와 다른 여자들.”

그 말에 카일은 정말 오랜만에 눈앞이 아찔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 감각은, 그래. 몰래 한 세트씩 안 하다가 리어한테 걸렸던 그 느낌이다.

피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최대한 숨기고 있었는데 결국 들킨 그 모양새로.

“언제까지고 도망칠 수는 없어요, 카일.”

“….”

“이제 당신이 할 일은 끝났잖아요? 서쪽도, 남쪽도, 그리고 동쪽도. 외부의 문제를 다 처리했으니 이제 남은 건 내부의 문제랍니다. 카일 존 나센.”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며, 엘가가 카일의 귓가에 아찔하게 속삭인다.

평소에는 이런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다가, 방심하면 항상 날아들곤 한다.

카일도 어쩔 수 없는 남자라서 이럴 때는 저도 모르게 한껏 긴장이 확 된다.

“엘가님. 그 이야기는 나중에….”

“물론 나중에 해도 되겠죠. 하지만 그 나중에는요? 그 나중이 되면 그때도 나중에, 라고 답할 생각인가요? 그래서는 안 되잖아요. 지금 몸이 달은 사람이 몇인데.”

연주곡을 따라 한 번 멀어졌던 엘가가 다시 품으로 파고든다.

“나는 포기할 마음 따위 없고,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죠. 이제 남은 건 당신이에요. 하나만 택하던가, 아니면 무슨 욕을 먹든 각오하고 다 쥐겠다고 하던가.”

“…그런 말을 엘가님이 하면 제 입장이 굉장히 난처해집니다.”

“어쩌겠어요. 당신이 자초한 거예요. 너무 잘나서, 그리고 너무 따뜻해서. 누구든 그냥 다 빠져버렸는데 어떻게 하라고요?”

곡이 점점 빨라진다. 춤사위도 점점 더 화려해진다.

엘가의 발놀림이 빨라지고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의 모습이 또렷하게 들어온다.

“이거 한 가지는 명심해둬요. 나는, 누구에게도 순순히 질 생각 없어요.”

“….”

“나만의 방법으로 싸울 거예요. 당신이 다른 누구도 아닌, 가장 먼저 나를 보고 내 여자다, 라고 말하게 되는 그 순간까지요. 내가 당신의 전부가 될 수 없다면, 최소한 당신의 가장 많은 것이 되고 말 거랍니다.”

마침내 연주가 끝이 났다. 모두의 춤이 멎고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특히 중심부에 서있던 엘가와 카일에게는 환호성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내 말, 다시 잘 생각해봐요. 여유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거.”

그렇게 말한 엘가가 카일의 손을 붙잡고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누군가 나타나서는 잽싸게 그녀에게서 카일을 낚아챘다.

“티샤?”

“저, 저랑도. 저랑도 한 곡 춰요. 카일.”

티샤의 말에 카일은 물론이고 엘가도 굉장히 놀란 기색을 내보인다.

공부도 잘 하고, 주술 실력도 뛰어나고, 눈치도 좋으며 머리까지 비상한 여인.

그러나 한 가지 약점이 있다면 그것은 박치라서 음악에 약하다는 것.

당연히 그 음악을 베이스로 하는 춤에 또 약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

그나마 몸치까지는 아니라서 어떻게 커버를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온 사방에 춤이라면 이골이 난 이들이 가득한 황실 연회다.

이런 곳에서 자칫 실수라도 하면 많은 비웃음을 살 수도 있다.

때문에 카일만큼이나, 아니. 카일보다도 엘가가 더 놀란 것이다.

절대 자신의 약점을 대놓고 상대에게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그게 엘가의 행동 강령이었고, 여태까지 그러려고 노력했었다.

약점을 드러내면 반드시 발목을 잡히게 될 것이고.

발목을 잡히면 보다 더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없게 된다.

엘가는 혹 카일을 둔 싸움에서 그 약점이 문제가 될까.

해서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까 최대한 자신의 강점만 내보였다.

방금 전 있었던 카일과의 춤 한 곡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 벌인 일이다.

단순히 카일과 함께 춤을 추고 싶어서, 가 끝이 아니다.

서로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걸 사교계에 보여주기 위해.

이 남자가 단순히 강력하기만 한 전형적인 존 나센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그래서 두 곳의 결합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알리기 위한 것.

“어… 티샤? 정말로요? 정말로 저랑 춤을 추겠다고요?”

“네. 왜요? 혹시 저는 안 되나요? 엘가님 하고만 하려고 했던 건가요?”

“아뇨. 절대 아니죠. 그건 아닌데….”

잠깐 망설이는 찰나, 한 차례 쉬었던 연주곡이 다시 흘러나온다.

그 소리에 티샤가 조금 더 세게 카일을 잡아끈다.

결국 카일은 걱정이라는 눈빛을 한 채로 다시금 무대 위에 오르게 되었다.

‘티샤.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드러내겠다는 건가요?’

자리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던 엘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티샤는 영리한 여자다. 행동이 먼저 앞서는 황녀나, 너무 착한 성녀와는 다르게.

그래도 계산을 할 줄 알고 손익을 따지며 행동할 줄 아는 여인이다.

그런 그녀가, 지금 본인의 행동이 플러스가 될지 마이너스가 될지 모를 리가 없다.

이미 평민 출신이라는 것부터 알게 모르게 하나의 구설수에 오르는 요인이 될 텐데.

와중에 스스로 연회장 중심에 가서 춤을 추다가 손발이 꼬이는 모습까지 보인다?

장담하건데 귀족들이 주술만 뛰어나지 영 별로라며 수군거릴 것이다.

저런 여자가 왜 카일 옆에 있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할 수도 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절대 안 그럴 것 같던 사람이.’

새로운 연주곡이 시작되었다.

엘가는 자리에 앉아, 가만히 카일과 티샤를 쳐다보았다.

*

“읏.”

역시나, 역시나 어렵다. 차라리 춤이 어려웠다면 괜찮다.

문제는 이 음악. 그 음악에 맞춰 한 번에 동작을 바꾸는 이 거대한 군무다.

박자를 놓치지 않아야 다음 동작을 예상하고 맞춰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자꾸 그걸 놓치니 발이 꼬이고, 손이 어긋나고.

그러다 보니 카일조차도 조금씩 허둥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미, 미안해요. 카일. 제가 조금 더 잘 해볼게요.”

“지금도 충분히 잘 하고 있어요.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티샤가 더 편하네요.”

“네?”

“엘가님과 출 때는 너무 완벽해서, 혹 내가 실수는 하지 않을까 바짝 긴장하고 있었거든요.”

물론 티샤, 당신이 실수하기를 바라는 건 또 절대 아니라고.

카일이 다급하게 덧붙이자 티샤가 프흣, 하고 가볍게 웃고 만다.

“억.”

“아! 미, 미안해요!”

덕분에 발을 밟힌 카일과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티샤.

이후로도 아슬아슬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춤과 허우적거림의 사이를 오고가는 티샤.

그리고 그 티샤를 겨우 도와주면서 같이 휩쓸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카일.

잠시 쉬고 있던 귀족들이 왜 파트너를 바꾼 건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린다.

조금 전 엘가와 출 때는 정말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림과도 같았는데.

지금은 망할 듯 말 듯 하는 모호한 작업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저도 알고 있어요, 엘가님. 이러는 게, 나한테 좋지 않다는 거.’

열심히, 정말 열심히 춤을 추면서 티샤는 생각했다.

‘하지만, 항상 손익을 따지고 또 다른 이들의 시선까지 고려하면서. 그렇게 시간을 버려가며 조금씩 다가가기엔 너무 조급해지는 걸요. 이런 거 저런 거 신경 쓰다가 늦어질 바에.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냥 부딪치고 말겠어요.’

엘가가 다른 이들의 시선까지 고려하여 말하고 행동한다면.

티샤 자신은 그냥 무조건 카일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비록 그 과정이 엘가에 비해 엉망진창일 수도 있고, 보기 별로일 수도 있지만.

최소한 그것이 가장 솔직한 마음의 전달 방법이 아닐까.

그리 생각하며 티샤는 아주 조금은 더 춤 같은 발놀림을 보여주었다.

“엑.”

그럴 때마다 자꾸 카일의 발등을 밟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으으! 미, 미안해요! 카일! 진짜 너무 미안해요!”

“아뇨, 아뇨. 티샤. 괜찮아요.”

“하지만….”

“이게 더 재밌네요. 처음부터 완벽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랍니까.”

카일은 킥킥 미소를 흘리며 티샤를 계속 리드해나갔다.

여전히 허우적허우적, 비틀거리는 춤사위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항상 엘가처럼 완벽할 수는 없는 노릇, 그냥 맨땅에 헤딩도 필요한 법이다.

그것 또한 결국 노력이니까. 그리고 존 나센은 그 노력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런데요. 어찌 되었든 춤 연습은 더해야겠어요.”

“아,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강조하지 마요!”

부끄러움으로 상기된 얼굴을 애써 감추면서.

티샤는 카일이 이끌어주는 대로 살짝 바깥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덕분에 그 짧은 순간에, 티샤는 앉아있던 엘가와 딱 눈이 마주쳤다.

‘황녀 저하, 성녀님도 물론 강적이지만….’

‘역시 저 사람이, 가장 곤란한 적일지도.’

서로 비슷하면서도 또 서로 달라서 그런 것일까.

두 여자는 상대를 바라보며 더더욱 강적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

“이제는 좀 괜찮아, 성녀님?”

“네. 감사해요. 황녀님.”

연회는 처음이어서 그런 것일까.

답답해하던 성녀를 데리고 바깥 공기를 쐬던 황녀가 안으로 돌아왔다.

연회장에선 이미 연주곡에 맞춰 춤사위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젊은 귀족 자제들과 영애들이 한껏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시간.

그 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존재는, 역시나 카일이었다.

‘뭐야. 카일 춤도 췄어?’

황녀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엘가를 찾았다.

마침내 눈에 들어온 엘가는, 티샤와 한창 춤을 추는 카일을 보면서도 잠잠하다.

그걸 보고 있으니 이미 엘가는 벌써 카일과 한 곡 춘 모양.

‘나도 가서 춤이나 추자고 할까.’

잠깐 고민이 되었지만 곧 관두기로 했다.

저기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티샤만큼이나, 자신도 춤에는 영 소질이 없으니까.

‘…갑자기 방해하고 싶어지네.’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으나 황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못된 생각을 실행하면 성녀님이 또 잔소리하겠지,

괜히 또 한 소리 먹지 말고 얌전히 지켜나보자.

그런데 정작, 성녀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황녀님이 방해 안 하시려나? …아아! 내, 내가 무슨 나쁜 생각을?!’

내심 황녀의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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