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알고도 숨긴 불충한 저를, 벌하여 주시길 간청 드립니다!”
황제도, 대공들도, 황녀와 엘가, 그리고 성녀까지도.
그리고 근처에 있던 티샤와 이안, 남은 귀족들 모두가.
카일의 그 한 마디에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카일.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겨우 정신을 차린 황제가 일단 웃으면서 말했다.
혹 이 청년이 자신에게 농담이라도 하는 건가 싶었다.
설마 황제 앞에서 미쳤다고 농담을 할까 생각도 들지만.
그것 이외에는 지금의 이 상황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말씀 드린 그대로입니다, 폐하.”
하지만 카일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진심을 다해 말했다.
“여태까지는 비밀로 지켜왔으나, 황제 폐하께서 친히 축하를 해주시는 자리에서 더는 속일 수가 없다고 판단된 바. 이렇게 죄를 지었음을 고하는 바입니다.”
그 말에 황제는 일단 카일을 일으켜 세웠다.
반역죄만 아니면 된다. 그것만 아니라면 다 넘어가줄 수 있다.
하물며 그 진실이라는 게 그리 대단한 게 아닐 것 같다고.
황제는 그런 예감을 느끼면서 카일에게 말했다.
“소상히 말해보게, 카일. 지금 그 말, 무슨 뜻으로 한 것인지.”
슈렐리츠 대공도, 엘가도, 성녀도, 모두가 똑같은 표정이었다.
부디 큰일이 아니기를 바란다는,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연회를 이어갔으면 하는.
“예, 폐하. 허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카일은 그렇게 말한 후, 놀란 토끼눈이 된 넬을 바라보았다.
“넬.”
“네, 네! 카일님?”
“잠깐 이리로 와보세요.”
그러자 눈치를 보던 넬이 주변 시선을 못 이겨 얼른 카일 옆으로 다가간다.
이윽고 황제의 시선이 닿자 그는. 아니, 그녀는 후다닥 무릎을 꿇었다.
“제가 말씀드릴 진실은, 바로 이 사람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자 뒤쪽에 서있던 티샤가 ‘아.’ 하고 탄식을 흘렸다.
카일이 말한 진실을 알고서도 숨겼다는 그 말이, 비로소 이해가 갔다.
“…이 아이는 넬이라고 했지. 자네가 그렇게 칭찬하던 이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폐하. 아마 이대로 계속 성장하면, 분명 훌륭한 여기사가 될 겁니다.”
반사적으로 카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려던 황제는.
“여기사…?”
그 부분에서 이상함을 감지하고선 넬을 바라보았다.
“아. 그, 그게….”
갑작스러운 상황에 넬이 당황해서는 카일을 쳐다본다.
이런 식으로 카일이 일을 벌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모양.
“….”
하지만 곧 넬은 약간의 평정심을 찾을 수 있었다.
자신을 흘끗 쳐다보는 카일의 눈빛이, 언젠가 많이 보았던 것이었다.
‘카일님의 저 눈빛… 그래. 나를 혹독하게 훈련시키시던 그 때의 눈빛이다.’
비록 지금은 힘들지만, 조금만 더 지나면 모두가 너를 위한 게 될 거라고.
그렇게 카일이 말했었고 실제로 정말 견뎌보니 전보다 확실히 나아졌다.
지금처럼 아무 말도 없이, 갑자기 이러는 것도 아마 그와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힘들고, 당황스럽고, 조금은 서운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다 너를 위한 것으로 돌아올 테니 더 견뎌보라는 뜻.
넬은 잠깐 갈등하다가 이번에도 카일을 믿고 따르기로 했다.
“폐하. 실은….”
이어진 이야기는, 넬이 카일에게 했던 말들과 거의 비슷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넬도 눈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니라 바이엔 대공의 부분은 제외했다.
어차피 문제의 소지가 된 건 자신의 가문이었다.
바이엔 대공 쪽은 딱 손해를 본 만큼만 가져갔으니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다.
해서 그 부분만 제외한 채 카일과 넬은 황제에게 사실을 고했다.
“…넬에게 묻겠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황제가 조금은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뗀다.
“아카데미는 제국의 이름하에 운영되는 교육기관이다. 알고 있느냐?”
“그, 그렇습니다. 폐하.”
“그 말인 즉, 아카데미에 거짓을 고하고 들어왔다는 건, 이 제국과 황실을 속이겠다는 불충한 생각을 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자 넬은 급히 답했다.
“폐하. 그것은 아닙니다. 저는, 저는 그저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이 제국과 황실에 충성을 다하고자, 그걸 원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노력하고 또 노력했습니다.”
“누구나 말은 그렇게 다 할 수 있는 법이다. 그래, 말로는 말이다.”
황제는 흘끗 카일을 바라보았다.
상황이 굉장히 차가워졌음에도 카일은 크게 흔들리는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이럴 걸 예상하고서 지금과 같은 일을 벌인 느낌이었다.
‘저 넬이라는 아이를 카일이 가르쳤다고 했던가.’
존 나센은 쉽사리 문하생을 두지 않는다.
기껏 가르쳐봤자 한 달도 못 견디고 포기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그 꼴 보고 있자니 속이 터진다고 절대 안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럼에도 저 넬이라는 학생은 끝끝내 카일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 혹독한 존 나센 단련을 받으면서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단다.
누구도 아닌 카일 본인이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잘못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적당히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 …설마.’
황제는 카일을 바라보다가 속으로 허, 하고 탄성을 흘렸다.
거래를 청하고 있는 것인가. 여태 자신이 이렇게까지 제국을 위해 행동했으니.
대신 자신 밑에서 열심히 하는 이 넬을 황제가 나서서 용서해달라고.
맨입으로 부탁하는 게 아니다. 카일 스스로 죄를 청하기까지 했다.
존 나센의 자존심을 한 번 접어준 것이다. 이건, 정말 엄청난 일이다.
그럼에도 벌하겠다느니, 넘어갈 수 없다느니 한다면….
“5황녀.”
황제는 제 딸을 불렀다.
제국 10강이기에, 그리고 실력자와의 싸움을 좋아하기에 누구보다 믿을 수 있다.
동시에 카일과 관련된 사람이니 적당하게 카일에게 유리한 말도 해줄 것이다.
황제 본인도 이번 일을 크게 벌일 생각이 없으니 참으로 적절한 인선이었다.
“이 넬이라는 아이의 실력을, 한 번 평가해보거라.”
“지금 말씀이십니까?”
“그래. 정말로 이 제국과 황실을 위해 노력했다면 네 눈에도 보일 것이 아니냐.”
그러자 한껏 몸을 숙인 채 눈치를 살피던 귀족들이 두 눈을 반짝거린다.
저 말은, 결국 황제도 스스로 나서서 탈출구를 만들어주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심지어 실력자들 간의 대련은 항상 흥미진진한 볼 거리였고 말이다.
“폐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드레스를 입은 그대로, 황녀가 넬에게로 다가간다.
그리고 얼른 따라오라며 그녀를 데리고서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 뒤를 연회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따르기 시작했다.
과연 그 카일 존 나센이 맡았다는 이의 실력은 어떠할까.
그런 궁금증이 치밀어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말이다.
*
‘이후의 일이야, 뭐 예상대로 흘러갔지.’
카일은 여유롭게 물 한 모금을 들이마시며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비록 황녀를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지만, 넬은 확실히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10강들은 꽤 날카롭다고 감탄했고 슈렐리츠 대공도 마찬가지였다.
황녀도 카일을 생각해서 적당히 상대해주다가 황제에게 알렸다.
이 학생은, 장차 제국의 훌륭한 검이 될 것이라고.
“그대들의 뜻은 잘 알았다. 허나, 넬. 기사에게 있어 최고의 덕목은 누구도 반박하지 못 할 공적이나 무력이 아니다. 스스로에게 떳떳한 마음인 것이다.”
예상대로, 황제는 먼저 차가운 목소리로 넬을 질책했다.
아무리 사정이 있다곤 하나 정체를 속이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이런 일을 묵인하면 나중에는 이보다 더 커다란 일들도 일어날 수 있다.
하여 예외는 없어야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더 키우기엔 부담이 심하다.
“카일 존 나센. 그대가 스스로 밝혔기에. 그리고 그대의 공적들을 희생하여 이 아이의 마음을 증명하려 했기에 넘어가는 것이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어차피 또 이런 일이 생겨도 건드릴 수 있는 청년이 아니다.
다만 카일도, 그리고 존 나센도, 제국을 대우하기로 했으니 침묵할 뿐이다.
“한 번은 용서할 터이니 연회가 끝나고 그 다음날, 아카데미에 진짜 제대로 된 정보를 제출하도록 해라. 그리고 진짜 넬이라는 사람으로서 살아가라. 이것은 지엄한 황명이니라.”
누구도 난처하지 않고, 누구도 진짜로 화를 내지 않은, 철저한 연극.
그렇지만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았으니 참으로 적절한 사건이었다.
이후 넬은 10강들에게 꽤나 귀여움을 받았다.
괜찮은 실력에, 싹싹한 행동과 말까지. 후배가 될 거라고 여긴 것일까.
“…이러려고 넬을 데리고 온 거였군요?”
슬그머니 티샤가 다가와서는 카일에게 묻는다.
그에 카일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도 위험한 짓이었어요. 황제 폐하 앞에서.”
“오히려 황제 폐하는 더 좋다고 생각하실 걸요?”
“어째서요?”
“제가 일부러 계속 숙였잖아요. 이걸로 황제 폐하의 위신이 꽤나 섰죠.”
겉보기에 그 상황은 얼마나 큰 공을 세운 이라고 해도, 얼마나 강한 자라고 해도.
제국의 지존 앞에서 잘못된 일을 저질렀을 때 응당 용서를 구하는 게 맞다, 라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었다.
황제 입장에선 절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오히려 카일이 내민 게 너무 커서, 잠깐 망설였을 뿐이다.
이걸 정말 받아도 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을 정도로.
“저기 계시는 세 분도 나름 충격이었던 것 같네요.”
대충 넬에 대해 알고 있던 티샤와는 다르게.
엘가나 성녀, 그리고 황녀는 전혀 몰랐다는 눈치였다.
덕분에 넬은 그 셋에게 둘러싸여 정신없이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
그리고 카일의 맞은편에는, 멍한 얼굴이 된 이안이 있었다.
“이안. 표정이 왜 그래요?”
카일 대신 티샤가 묻자 그는 얼이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
“충격적이어서.”
“뭐가요?”
“넬이, 여자라는 거 말이다.”
“…몰랐어요?”
그렇게 붙어있었는데, 눈치도 못 챘다고?
티샤가 기가 막히다는 듯 이안을 쳐다본다.
“꿈에도 상상 못 했다.”
“대단하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티샤.
카일은 티샤의 그 한 마디에 강렬한 동의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