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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전투종족-226화 (226/318)

“어려운 말도, 긴 말도 하지 않겠다. 제국을 위해 온몸이 부셔져라 싸운 그대들이여. 이 자리에 있든, 혹 이 자리에 없든. 제국이 그대들을 잊는 날은 절대 없을 것이다.”

황제가 슈렐리츠 대공을 시작으로 모든 10강들, 그리고 지휘부 인사들까지.

한 명, 한 명 빠지지 않고 자신의 눈에 담는다. 마치 정말 잊지 않겠다는 듯.

“또한 내부에서 힘껏 이 제국을 받쳐준 그대들 역시, 만고의 충신들이다.”

바이엔 대공, 엘가, 그 외의 모든 귀족들까지 일일이 눈을 맞춘다.

황제가 제국의 귀족들에게 보내는 믿음과 신뢰의 뜻이었다.

“그리고 귀한 발걸음을 해준 이도 있으니, 어찌 이 자리가 즐겁지 않겠느냐.”

정말 오랜만에 교단 측에서 연회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떠나간 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게 이유라고 하지만 뭐든 좋았다.

성녀를 바라보며 황제는 가볍게 성호를 그어주었다.

이것만으로도 교단 입장에선 꽤나 큰 수확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황제는 잠깐 말을 멈추고 그들 사이에 있는 한 청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카일 존 나센.”

카일 존 나센. 어쩌면 이 자리를 만든 ‘진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제국 군단이 정식으로 출정한 것이 자그마치 두 번이다.

그 두 번에 카일은 계속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매번 선두에 섰다.

결과는? 서쪽 왕국 연합은 스스로 전투를 포기했다.

동쪽의 그 무시무시한 유목 부족들은 완전히 박살이 나고 항복했다.

차라리 싸우다 죽을지언정 항복은 없던 그 자들이 말이다.

물론 거기에는 항상 존 나센이 개입되어 있었다.

서쪽 때에는 남작의 두 남매가. 그리고 동쪽에는 남작 일가 전체와 그 휘하들이.

‘카일. 저 아이가 지금의 제국에게 남겨진 유일한 희망이다. 존 나센과 타협하는 것을 넘어 공존하고 또 영원히 함께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울타리를 만들 수 있는 존재.’

제국의 어느 누구보다도 정치적 감각이 탁월한 황제다.

카일을 보는 순간. 그리고 카일을 대하는 남작가의 사람들을 보는 순간.

저 청년을 붙잡는 게 그 어떤 협상이나 제안보다도 더 효과적일 것임을 깨달았다.

동생이 걱정된다고 제국을 방문했다가 서쪽을 깨트린 남매하며.

막내의 서신 한 장에 일가가 대륙을 횡단하는 기행을 벌이기도 했고.

와중에 다쳤다는 말을 듣고서 그냥 동쪽 평원을 싹 갈아엎는 짓도 벌였다.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 어차피 카일도 제국에 굉장히 호의적인 눈길을 지니고 있다.

조금이라도 빨리 깨달았다면 좋았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늦은 것도 아니다.

‘존 나센과의 관계도 관계이지만, 저 청년이 자체적으로 지닌 것도 만만치 않다.’

보아하니 이미 리토리오 대공가는 협력을 넘어 그 이상의 관계로 나아간 모양이다.

분명 존 나센에 의해 후계자가 망가지는 최악의 일이 발생했다고 들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 모든 게 마치 없었던 일처럼 되어버렸다.

그리고 보이는 건, 카일과 리토리오의 엘가 공녀가 묘한 관계를 지녔다는 것.

그 외에도 슈렐리츠 대공, 제국의 10강들과도 적절한 친분을 쌓았다.

제국에 뜻이 없다면 결코 그러지 않았을 걸 감안하면 매우 긍정적인 일이다.

‘결정적으로, 막내 딸아이를 받아줄 수 있는 유일한 남자이지.’

제 막내딸, 5황녀 율리카. 그 아이가 그렇게 사람에 집착하는 건 처음 봤다.

강자여서 집착하는 게 아니다. 상대가 카일이라서 그러는 것이다.

아직 본인은 신기해서, 혹은 더 싸워보고 싶어서, 그런 말들을 내뱉지만.

늦지 않은 시일 내에 그것이 그냥 여자로서 이성에게 지니는 호감임을 인정하게 될 거다.

“때마침 그대의 생일이 오늘이라고 들었다.”

황제가 직접 언급을 하고 있다. 대공의 생일도 아닌데, 일일이 챙기는 말을 할 수준이라니.

“이 기쁜 날에 더더욱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마침 카일, 자네도 제국을 위해서 너무나 큰 노력을 기울였던 사람이지. 이번 연회에서 아주 조금은 특별한 생일이 되기를 바라겠다.”

들고 있던 잔을 높이 들며 이번 황실 연회의 시작을 알린다.

그 뒤를 이어 자리에 모인 모든 귀족들이 제국과 황실의 이름을 외친다.

‘…자,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었다. 율리카. 이제는 네가 해야 한다.’

황제가 카일에게 유독 집중하는 이유에는 또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엄청난 일들을 하고, 또 온갖 곳에 저도 모르게 인맥을 지녔음에도.

카일은 그것을 이용하여 정계에서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행위를 전혀 하지 않는다.

눈치를 보고 있는 게 아니다.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관심이 없는 것이다. 존 나센답게, 오로지 단련에만 신경을 쓸 뿐이다.

원래부터 강한 자이니 강해지는 것에 주의를 할 필요도 없다.

강해져서 휘두르는 자가 아니다. 강해지면 더 강해지려고 하는 자다.

북쪽의 모든 존 나센이 그러했듯, 카일도 그럴 것이다.

황제에게 있어서, 이미 제국의 차기 황제가 정해진 상황에서.

자칫 율리카의 힘이 과하게 커져서는 안 되는 때에 카일은 완벽한 해답이었다.

*

본격적으로 황실 연회가 시작되었다.

카일은 한곳에 앉아 엘가, 티샤, 그리고 성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간간히 몇몇 귀족들이 찾아오긴 했지만 이렇다 할 주제는 없었다.

‘어차피 불러서 온 거니까. 대충 맞춰주다 가면 되지.’

초대를 받은 모두가 어떤 생각을 지닌 채, 무언가를 얻기 위해 온 것이지만.

카일은 정말로 그냥 불러서 온 것이다. 그것 외엔 이유가 없다.

때문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관계를 새로이 쌓고.

사교계에서 항상 그러는 것들을 할 생각이 없는 게 당연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어디선가 나타난 이안이 반쯤 영혼이 나가버린 모습으로 주저앉는다.

그러자 엘가가 킥킥, 웃으면서 이안을 놀리기 시작했다.

“뭐에요. 카일 옆에서 센 척은 다 하더니 벌써 지친 건가요? 연회는 이제야 시작했는데.”

“뭐라고 하든 받아들이겠습니다. 공녀님. 이런 자리, 정말 별로입니다.”

그건 나도 동감이야. 일단 초대해서 오기는 했는데, 진짜 괜히 왔나 싶어.

자꾸만 루틴을 돌리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리는 느낌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덤벨이라도 하나 들고 올 걸 그랬나 후회도 된다.

이때, 연회장 한곳에서 갑자기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나쁜 뜻의 소란스러움은 아니다. 다만 놀라움과 감탄의 것이 섞여있을 뿐이다.

“뭐죠?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요.”

티샤의 말에 성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한 곳을 바라보던 그녀는 어느 순간….

“에에?”

하고 제 눈을 의심하는 듯 입을 쩍 벌리기 시작했다.

“성녀님?”

덕분에 카일이 더 놀랐다. 성녀가 저런 반응을 보인다니.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러는 건가, 해서 시선을 돌렸는데.

“…어?”

머지않아 카일도 그냥 탄성 한 번을 흘리는 게 전부가 되었다.

저 멀리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다가오고 있다.

물빛의 푸른 드레스와, 거기에 무척 잘 어울리는 은발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연회장의 모든 이목을 잡아끄는 이유는.

저 여자가 여태 단 한 번도 드레스라는 걸 입었던 적이 없는.

“황녀님?”

5황녀, 율리카라는 점이었다.

“안녕, 카일.”

자신에게 눈길을 보내는 모든 귀족들을 깔끔하게 무시한 채.

물빛 드레스를 입은 미녀가 미소를 짓고선 카일 앞에 선다.

“어… 오늘, 조금 달라 보이시네요.”

“그렇지? 나도 처음이야. 연회에 이러고 나온 건.”

알게 모르게 황녀의 얼굴에도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머물고 있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 여자임을 알기에 카일 입장에선 더더욱 놀라웠다.

“어때?”

황녀가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며 감상을 묻는다.

거기서 카일은 ‘어….’ 하고 잠깐 동안 멍하니 서있다가 입을 열었다.

“의외이긴 한데요. 그, 진짜… 잘 어울리긴 하네요.”

“그렇지?”

허리에 손을 얹고 제법 익숙한 포즈까지 취하는 황녀.

이전까지는 황녀보다 제국 10강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던 그녀다.

매번 활동하기 편한 옷을 입고, 여인의 매력보다는 강자의 모습에 더 집중했었다.

그러다가 이런 변화를 주니 갑자기 사람이 확 달라 보인다.

강함만을 좇는 압도적인 강자에서, 얼마든지 남자를 흔들 수 있는 미녀로.

당장 연회장의 남성 귀족들이 다들 넋이 나가지 않았는가.

“와….”

그리고 다른 의미로, 엘가는 그냥 넋이 나갔다.

‘아니. 견제만 하지 말라면서요. 황녀 저하. 그런데 이런 식이면 어떻게 안 하냐고요.’

아주 조금. 아니, 조금 많이 화가 났다.

이쪽은 카일의 생일이라는 나름 고급 정보까지 내어주었는데.

그걸 날름 받아가서는 저렇게 기습적인 한 방을 날리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물론 자신도 허술하게 준비를 한 건 절대 아니다.

카일이 충분히 매력을 느낄 만한 만반의 준비를 했다.

실제로 만나자마자 카일이 살짝 헛기침까지 했었고 말이다.

하지만 원래 꾸미던 사람이 아름답게 치장하고서 나타나는 것과.

반대로 한 번도 안 꾸미던 사람 중이 갑자기 저러고 나타나는 것.

당연히 후자 쪽에 더 큰 충격과 매력을 느낄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티샤도 나름 열심히 준비한 것 같은데. 위기감 느낀 거 같지?’

슬쩍 곁을 살핀 엘가는 그럴 수밖에 없어,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카일의 반응을 봐라. 저러면 누구라고 해도 긴장을 안 할 수가….

‘아이고, 성녀님….’

엘가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감싸쥐고 한숨을 흘렸다.

이럴 때일수록 세 여자가 더더욱 합심해서 경계 수위를 높여야 하는데.

“안녕, 성녀님. 나 어때? 처음 드레스라는 거 입어봤는데.”

“와아… 지, 진짜 예뻐요. 황녀님. 이런 모습 처음 보는데, 너무 잘 어울려요!”

“아하하! 고마워. 그렇게 말해주니까 세 시간이나 옷 가지고 씨름한 시간이 아깝지가 않다는 생각이 드네.”

이 타이밍에 드레스를 입은 황녀를 보며 감탄하고 있는 성녀였다.

역시, 누군가를 경계하고 때로는 밀어내야하기도 하는 상황에서.

성녀는 너무 착하고 온화하며 따스한 사람이었다.

“나중에 성녀님도 한 번 입어봐. 드레스라는 거.”

“제가요? 아뇨. 저는 그런 거 안 어울릴 거예요.”

“어울릴걸? 나도 이런데.”

그 말에 엘가는 빠르게 저런 드레스를 입은 성녀를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나온 결론은….

‘황녀 저하. 그거 아무래도, 황녀 저하께도 위험한 일이 될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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