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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전투종족-225화 (225/318)

“안녕하십니까. 그, 카일 공자와 함께 오신 분 같은데. 실례지만 성함이….”

“아! 혹시, 혹시 그대가 이안 학생은 아닙니까?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기사 분들이 아카데미 학생임에도 엄청난 실력을 지닌 이가 있다고 했는데….”

“보라색 머리가 굉장히 아름다우십니다, 레이디. 혹 이름이 어찌 되시는지 여쭈어도 될 런지요.”

넬도, 이안도, 그리고 티샤도, 모두 굉장히 당황한 눈치였다.

일단 넬은 숨기고 있는 것이 있기에, 그래서 혹 큰 문제라도 생길까.

그것이 가장 마음에 걸리고 또 두려운 눈치였다.

이안은 이안대로,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자리는 딱 질색인데.

웬 처음 보는 귀족들이 몰려들어 갑작스레 친한 척을 하고 있다.

예전의 이안이었다면 입들 다물고 꺼지라고 일갈했을 정도.

마지막으로 티샤는….

“아, 잠시. 잠시 만요.”

슈렐리츠 대공, 엘가, 성녀, 그리고 10강들까지.

제국의 핵심 세력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카일이 갑자기 걸음을 뗀다.

귀족들을 헤치고 나타난 그는 티샤 근처까지 가선 말을 이었다.

“저기요? 거기, 귀족 분. 죄송한데 좀 비켜주시죠.”

“에? 아, 아아. 미안합니다. 카일 공자.”

정확하게 티샤 앞으로 다가온 카일이 손짓을 한다.

굉장히 무례한 짓이지만 그 귀족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뒤로 물러섰다.

“제 일행이라서요. 너무 달라붙지 않으셨으면 하는데.”

웃고는 있지만 그 말 속에 뼈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왜 너 따위가 내 사람 곁에서 살랑살랑 꼬리를 치고 있는 거냐고.

솔직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리 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다.

그리고 아직 그 어떤 관계임도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 저런 모습이라니.

이 정도면 연회에서 범하지 말아야 할 무례를 또 저질렀다고 할 수 있다.

“아… 그, 그렇군요. 미안합니다. 이런 실수를.”

물론, 그걸 미쳤다고 입 바깥으로 공론화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카일의 뒤에 대공 하나, 공녀 하나, 성녀 하나, 그리고 10강이 못 해도 넷은 있다.

죽었다 깨어나도 감당을 해볼 수 있는 견적이 아니다.

이럴 때는 무례고 뭐고 ‘알겠습니다.’ 하고 냉큼 뒤로 물러서면 된다.

귀족들이 물러서자 카일은 티샤의 손을 잡고선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티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당신을 잊고 있었네요.”

“네? 아, 아뇨. 카일. 괜찮아요. 가서 이야기 더 나눠도 돼요.”

“그럴 생각이에요. 그런데, 티샤도 같이 가야죠. 정말 미안해요. 진작 이래야 했는데.”

카일이 그리 말하며 티샤를 데리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슈렐리츠 대공부터 시작해서 엘가 공녀, 성녀까지 있는 그곳에.

누구인지도 모를 여인 하나를 데리고서 자리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몇몇 귀족들이 저마다 속으로 ‘세상에.’ 하고 중얼거렸다.

카일, 그 존 나센의 자제가, 힘으로 삼면을 평정한 그 청년이.

극도로 저자세로 나서며 연신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다.

본인과 함께 연회에 참석한, 보라색 머리가 인상적인 미녀에게.

마치 그 둘이 연인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잠깐만. 이거, 혹시?’

귀족들은 바로 리토리오 대공가의 공녀에게, 그리고 교단의 성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과연 그 둘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모습을 보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엘가와 성녀를 본 귀족들은 두 눈을 반짝거렸다.

‘무언가 있구나!’

리토리오 대공가의 엘가 공녀를 보아라. 항상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그녀이지만.

눈썹이 계속 꿈틀거리는 것까지는 어떻게 하고 있지 못 한다.

애써 참고 있지만 불편하다는 기색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성녀는 또 어떤가! 항상 웃는 얼굴, 매사에 따스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다.

그런 성녀가 지금은 제대로 웃지도 못 한 채 연신 카일과, 그 곁의 여인을 바라본다.

긴장한 눈치가 역력하다. 그 긴장은, 아마도 질투의 첫 단계일 터.

사교계에서, 그리고 정계에서 구르고 구른 귀족들이다.

지금처럼 아주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 능구렁이다.

그들은 바로 카일과 주변 여인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

“흠흠. 드레스가 참 예쁘네요, 티샤.”

한편, 엘가는 바로 옆까지 다가온 티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성녀 또한 살짝 미소를 짓곤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엘가님. 성녀님. 두 분도 진짜 예쁘세요.”

“그래요? 후후. 고마워요. 사실 신경 좀 많이 썼죠. 성녀님도 그러시죠?”

“아? 저, 저는 그냥 제일 밝은 옷으로 입고 온 건데….”

하기야, 성녀가 드레스를 입으면 좀 이상하긴 하다.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새하얀 원단에 푸른 자수가 놓인 예복.

그럼에도 어지간한 드레스는 ‘따위’ 로 만들어버릴 기품이 느껴진다.

옷의 완성은 역시 옷걸이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엘가는 새삼 예복도 연회장에서 빛이 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말이죠. 카일은 아무 말도 안 하네요?”

갑자기 카일에게로 화살을 돌리는 엘가.

그러자 카일이 예? 하고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낸다.

“무슨 말입니까?”

“딱 보여요. 티샤한테는 드레스 예쁘다고 했을 테고. 우리는 그냥 본 체 만 체.”

“절대 아닙니다만.”

“거짓말. 그러면 얼른 말해줘요. 이 옷, 어때요?”

그야말로 엎드려 절 받기. 그럼에도 엘가는 딱히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굉장히 즐겁다는 듯 화사한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저, 카일 형제님. 다시 한 번, 생일 축하드려요.”

와중에 성녀는 바로 정공법으로 밀고 들어왔다.

난 여기 그거 하나 때문에 온 거다, 라는 느낌이 물씬 풍길 정도.

“감사합니다, 성녀님. 말씀만으로도 제겐 큰 선물이에요.”

“정말요? 정말이죠? 다행이네요!”

어느 순간 연회장의 중심은 카일과 세 여인으로 돌려졌다.

오죽하면 다음으로 도착한 또 한 명의 대공.

바이엔 대공이 도착했음에도 잠깐의 소란만 이는 게 전부였다.

“…분위기가 묘하군.”

돈 되는 일이 아니라면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 바이엔 대공.

그럼에도 이번 연회장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다름을 인지한 것일까.

그의 물음에 슈렐리츠 대공이 껄껄 웃으며 옆으로 다가왔다.

“묘하겠지. 오늘 주인공 곁에 저리 아름다운 여인들이 다 붙어있으니 말이야.”

“주인공? 이번 연회는 자네와 10강들을 위한 자리 아니었나?”

“물론 그렇기도 하지.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 전부를 다 합쳐도 저 청년만큼의 일을 해낸 게 안 되어서 말일세.”

바이엔 대공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카일을 바라보았다.

슈렐리츠가 군권을, 리토리오가 외교 부분을 꽉 쥐고 있다면.

바이엔 대공가는 예로부터 제국의 돈의 흐름을 일정 부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을 보면 확 와 닿는 게 있었다.

내게 이득이 될 만한 사람인지. 돈을 몰고 다닐 존재인지.

‘처음에는 존 나센 남작가의 자제라고 하여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권력도, 돈도, 그 무엇도 관심을 두지 않는 자들의 세상이다.

돈을 쓰는 것에 관심이 없으니 자연스레 바이엔 대공도 존 나센에 대해선 신경을 껐다.

그런데 지금 보니 존 나센 전부가 그런 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카일이라는 저 친구. 묘하게 돈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심지어 그것도 극도로 향이 좋은 순금의 냄새가 난다.

어째 저 친구와 친해지면, 무언가 크게 한 건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허어? 그러면 그 주술이라는 게 그렇게나 대단한 겁니까?”

바로 그 순간, 바이엔 대공의 귀를 쫑긋하게 만드는 외침이 들려왔다.

“그렇지 않습니까, 카일 공자. 그 유목 부족의 강력한 전사가 휘두르는 칼날을, 비록 근소한 차이라고 하지만 치명상을 면하게 해줄 정도라면 정말 엄청난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10강 여러분들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그런 게 있다면 나쁘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

어느 순간 ‘주술’ 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가 넘어갔다.

그리고 그 시작은, 다름 아닌 카일이 하고 있는 목걸이와 반지.

카일은 직접 나서서 실은 이거 덕을 좀 봤다고 말했다.

더 강해지거나, 더 빨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식의 물건은 절대 안 된다.

이것은 다만 간절한 마음이 깃들어, 찰나의 순간을 만들어주는 것.

칼날이 아주 조금이나마 덜 들어가고 피가 조금이라도 덜 흐르게 된다.

주술이란 그런 것이다. 마법처럼 화려하거나 압도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누군가를 위하는 그 강렬한 마음은, 때로 그 마법조차도 뛰어넘는다.

“오오오…!”

덕분에 귀족들 사이에서 갑자기 순식간에 주술에 대한 평가가 엄청나게 높아졌다.

그렇지 않아도 예전에 있었던 아카데미 습격에서 티샤가 주술로 엘가를 구했었다.

거기서 주술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 및 운용 능력이 제시되었다.

다만 그건 아카데미 학생들에게만 국한된 부분이었다.

아직까지도 많은 귀족들은 마법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주술은 마법처럼 학문에도 끼지 못 하는, 이상한 사술이라고 여기면서.

하지만 지금 바로 이 순간, 그게 송두리째 바뀌게 되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존 나센의 카일이 효과를 입증했다.

거기서 누가 ‘그거 사술 아님?’ 따위의 말을 할 수 있을까.

“제가 티샤 덕분에 여기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엘가까지 나서서 은근히 티샤와 그 주술의 면을 세워준다.

심지어 성녀도 ‘주술이란 결국 사람이 간절하게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 그것은 결국 신을 찾는 신실한 자들의 기도와 다를 게 없을 지도 모르겠군요.’ 라는 말을 했다.

이 정도면 당장 내일부터 ‘주술’ 에 대한 모든 게 뒤바뀔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황실 연회다. 그 영향력은 가히 압도적일 터.

마법사들이 경악하며 ‘이게 무슨 일이야!’를 연신 외칠 지도 모른다.

‘카일… 그리고 엘가님, 성녀님까지….’

갑작스러운 선물에 티샤가 감격하여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

띠잉―

가벼운 종소리와 함께 시종장이 주변 환기를 시키고 시선을 집중시킨다.

귀족들이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그를 바라보자 시종장이 입을 연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곧 납시겠습니다.”

마침내 진짜 황실 연회. 아니, 진짜 생일 축하 연회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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