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224화 (224/318)

과거 아카데미 신입생들을 축하하던 파티가 기억에 남는다.

아직 이안이 사람이 되지 못 했던 그 순간.

덕분에 놈이 사고를 제대로 쳐서 대신 카일 본인이 결투를 했던 날.

그 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카일에게 두려움과 경계가 섞인 눈빛을 보냈다.

‘그게 벌써 반 년도 훨씬 전 일이구나. 세월 참 빨라.’

라고 생각하며 카일은 황실 연회장에 자리한 이들의 시선을 살폈다.

이전과는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두려움도, 경계도 없다. 그곳엔 오직 감탄하는 기색만 가득할 뿐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날의 카일과, 지금의 카일은 아예 다른 사람이니까.

예전의 카일이 아카데미를 반파시켰던 이상한 여학생의 동생이었다면.

과거 제국과 피터지게 싸우던 북쪽 야만족들의 자식이라고 여겼다면.

지금은 단신으로 제국 삼면을 평정한 무시무시한 인물이 되었다.

더불어, 알고 보니 제국이 그만 싸우자고 부탁한 남작가의 막내아들이다.

두려워하거나 경계해서 좋을 것이 단 하나도 없다.

애당초 대체 어떤 남작가의 자제가 대공과 함께 들어설 수 있을까!

“슈렐리츠 대공 각하.”

“오셨습니까.”

“다들 간만에 보는군. 그래, 황제 폐하는 아직이신가?”

“예. 아마 조금 기다리면 나오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연회에 초대를 받은 제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대공 곁으로 모여든다.

물론 단순히 슈렐리츠 대공만을 노리고서 이러는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대공은 좋은 핑계일 뿐, 지금 이들이 노리는 건 따로 있으니까.

“옆의 공자 분이 존 나센 남작가의 그 카일인 겁니까?”

“그렇다네. 카일. 이리 와서 인사나 좀 하지.”

슬쩍 분위기를 살피던 카일이 군말 없이 대공의 옆에 섰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전우라 할 수 있는 대공이다.

그 대공의 부탁을 거절하면 그의 체면이 폭삭 무너지지 않겠는가.

“처음 뵙겠습니다, 여러분. 존 나센 남작가의 카일이라고 합니다.”

“오오!”

“서쪽 왕국 연합의 삼걸을 쓰러트렸다는 청년 아닙니까.”

“나중에 알려지기론 혼자서 남쪽 독립 영주들도 굴복시켰다던데?”

“저는 그것보다는 동쪽 유목 부족들을 때려잡은 게 더 놀랍습니다.”

1년도 안 되어서 제국의 삼면을 때려 부수고 다닌 인간이 있다?

그걸 알고서도 멀리하려는 놈이 있다면 그놈이야말로 진짜 대단한 거다.

황제 입장에서도 예뻐서 죽을 것 같은 인물을 멀리 하는 것이니까.

‘듣고 있다 보니 새삼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실감이 나네.’

사람들의 감탄에 카일은 그냥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뭐 제국에 대한 마음이 특별해서 그런 게 아니냐고 떠들고 있는데.

솔직히 그 때야 그냥 약쟁이들 때문에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혹은 가족들까지 ‘이런 나쁜 놈들!’ 하고 몰려들 게 걱정이 되어서.

‘그리고 가족들보다 먼저 가서 센 놈들이랑 좀 싸워보려고.’

전부가 제국을 생각하는 요만큼의 마음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그냥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을 터.

물론 여기 모인 귀족들은 전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말이다.

“대공 각하. 제가 모르는 분들도 좀 계시는데 소개나 해주시죠.”

“으음? 아아, 그렇겠구만. 자. 이쪽부터 소개를 하자면….”

지금도 봐라. 대체 어떤 남작가의 자제가 대공을 저리 편히 대할까.

저건 자제가 아니라 남작이 와도. 아니, 자작을 넘어 후작이 와도 불편해 죽을 판이다.

제국에 단 셋만이 있는 대공, 유일하게 가신단을 꾸릴 수 있는 강력한 곳이다.

황실 직계들도 대공을 대할 때는 최대한 조심하는 편이다.

크게 보면 군신 관계에 있으나 작게 보면 황제의 정치적 파트너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황제를 제외하곤 제국의 어느 누구도 편히 대할 수가 없는데.

“아니. 저번에는 딱히 정계엔 관심이 없으셔서 아는 사람도 없다고 하시더니. 많은데요?”

“그냥 알고 있는 게 다라네. 간단히 인사만 하는 사이일 뿐이야.”

슈렐리츠 대공이 너무나 편하게 카일을 대하고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현재 제국에서의 카일 위치를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슈렐리츠 대공 각하.”

거기에 더불어서, 카일의 주가를 미친 듯이 상승시키는 이들이 다가왔다.

“엘가 블레스 데 리토리오가 제국의 검께 인사 올립니다.”

붉은 드레스 자락을 살짝 잡은 채, 공손히 인사를 올리는 엘가.

같은 대공가인 리토리오의 후계자로서 굳이 이럴 필요는 없다.

다만 자리가 자리인만큼 유쾌한 분위기를 위해.

또 이번 연회의 표면적 주인공인 슈렐리츠 대공을 위해 그러는 것 같았다.

“하하하. 이거, 리토리오 대공이 왜 자네를 보냈는지 알 것 같군. 벌써부터 이러기인가?”

“어머. 제가 뭘 했다고 그러시는지 모르겠군요.”

“정식으로 후계자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은 들었네. 축하하네. 엘가 공녀.”

“감사합니다, 대공 각하. 그 말씀을 들으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적당하게 대화를 나눈 후, 엘가는 이 연회에 참여한 진짜 이유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일 축하해요. 카일.”

“생일?”

“어. 뭡니까? 오늘이 카일 공자의 생일이었습니까?”

슈렐리츠 대공과 주변 귀족들이 놀라서 카일을 바라본다.

여태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런 기색이 전혀 없지 않았던가.

“네. 여러분. 실은 오늘이 카일의 생일이랍니다.”

거기서 엘가는 싱긋 미소를 짓고서는 재차 확인을 시켜주었다.

“카일. 왜 그걸 말하지 않았는가? 하마터면 생일에 축하도 못 받을 뻔 했군.”

“대공 각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카일 공자. 왜 그러셨습니까?”

“이거 리토리오 공녀께서 말씀해주시지 않으셨다면 다 지나칠 뻔 했습니다.”

분명히 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것으로 개최된 연회 같았는데.

갑자기 순식간에 카일의 생일을 축하하는 느낌이 강해진다.

동시에 이런 중요한 걸 알고 있던 엘가의 주목도도 몇 배나 뛰어오른다.

그렇지 않아도 카일과 제법 가까운 사이라는 소문이 사교계에서 돌고 있었는데.

슈렐리츠 대공조차도 모르고 있던 생일까지 알려준 사이라는 건가? 하는 생각이 귀족들 사이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존 나센의 카일. 그리고 리토리오 대공가의 엘가 공녀.’

‘둘이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다고 했지. 같이 어울리는 모습도 꽤 많이 보였고.’

‘가까운 사이 같은데. 저 가까운 사이가 그냥 친구냐. 아니면 다른 무엇이냐.’

정계에 몸을 담은 귀족들 입장에선 온갖 생각이 많아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귀족들에게, 2차로 거대한 파도가 또 들이닥쳤다.

“생일이시라고요. 카일 형제님.”

뒤쪽에서 들려오는, 굉장히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

분명 같은 사람인데도 이상하게 더 빛이 나는 느낌을 주는 그녀의 정체는.

“헉.”

“서, 성녀님? 언제….”

이례적으로 연회의 초대를 수락한 교단에서 온 손님.

그것도 이런 자리에는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성녀였다.

“성녀님. 연회에 오신 겁니까?”

슈렐리츠 대공도 살짝 놀라서는 성녀를 맞이한다.

교단 사람이, 그것도 성녀가 올 줄은 상상도 못 한 모양.

“떠나간 분들을 위한 시간도 같이 있다고 해서요. 그분들을 위한 기도나 올릴까 잠깐 찾아왔습니다.”

성녀의 말에 순간이지만 숙연한 분위기가 감돈다.

승리를 거두고 영웅으로서 당당하게 돌아온 이들이 있다면.

당연히 그들과 함께 싸우다가 돌아오지 못 한 자들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걸 망각하고 단순히 승리에만 도취되어 정신이 혼미해질 무렵.

이렇게 성녀가 찾아와서 그들의 희생을 언급하니 퍼뜩 정신이 드는 느낌이다.

“그렇군요. 그렇지요. 성녀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이번 연회는 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하셨지요.”

슈렐리츠 대공이 고개를 끄덕거리곤 두 눈을 감는다.

대공을 시작으로 주변 귀족들이 잠깐이나마 그들에 대한 묵념을 지닌다.

그 중심에서 성녀는 가볍게 기도문을 외우고서 다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황제 폐하께서 나오시면 또 이런 시간이 있을 테니까요. 여기 모이신 형제, 자매 분들은 일단 편히 계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생일이신 형제님을 축하하는 게 맞을 것 같기도 하고요.”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카일을 바라보는 성녀.

그리고는 앞으로 다가가서 카일의 두 손을 맞잡는다.

“…!”

순간 엘가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오르다가 곧 사라졌다.

“이 세상에 오신 걸, 축하드려요. 카일 형제님.”

“아… 예, 성녀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당신과 같은 형제를 내려주신 위대하신 분께.”

뭔가 단순한 생일 축하 같기도 한데, 또 뭔가 묘한 느낌이 드는 말.

덕분에 귀족들은 ‘어어?’ 하고 또 한 번 혼란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뭐야, 이 그림은. 성녀님 얼굴 표정이 묘하게… 밝은데?’

‘성녀님을 몇 번 뵌 적이 있다. 항상 따스하시고 좋은 분이셨지. 하지만 지금처럼 행복하다는 느낌을 표출하시는 건 처음인 것 같군.’

눈칫밥으로 수십 년을 버텨온 사람들이다.

그 귀족들 앞에서, 누군가를 속이는 짓은 전혀 하지 못 하는 성녀의 저 웃음? 저 말?

당연히 티가 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생각이 될 수밖에 없다.

“뭡니까. 카일 공자 생일이라고요?”

“우리도 좀 낍시다. 여러분.”

이때, 뒤쪽에 서있던 몇몇 이들이 앞으로 끼어들었다.

귀족보다는 자유 기사 느낌이 물씬 나는 그들은, 다름 아닌 10강들.

시간이 되지 않아 참석하지 못 한 이들을 빼면 전부 모였다.

“카일 공자!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선물로 나중에 대련 한 번 어떻습니까.”

“그거 좋네요. 나중에 부탁드립니다. 스로드 경.”

“미친놈. 기어코 제 무덤 제가 파는구나.”

“그러지 말고 로건 형님도 같이 하시죠?”

“미쳤냐? 절대 안 한다.”

대공, 공녀, 성녀, 거기에 제국 최강 전력이라는 10강들까지.

그들에게 둘러싸인 카일은 귀족들 입장에선 가까워지고 싶은데 엄두가 안 나는 인물.

해서 귀족들은 차선책으로 그 주변 사람들을 공략하기로 했다.

“어… 어어?”

살짝 소외된 것 같았던 세 남녀, 이안과 넬, 그리고 티샤.

그들에게 귀족들이 몰리는 건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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