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222화 (222/318)

“공작 각하. 황실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 보고에 한창 업무를 보고 있던 리토리오 대공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굉장히 갑작스러울 텐데, 그의 표정은 ‘기다리던 게 왔구나.’ 하는 것이었다.

“어서 안으로 들이게.”

“예, 대공 각하.”

사람을 내보낸 후 리토리오 대공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무실을 나서 1층으로 내려가니 황실 측 인사가 공손히 허리를 숙인다.

“대공 각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항상 똑같네. 그래,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것인가?”

“예. 실은 내일 작게나마 연회를 개최할 예정입니다.”

“연회라. 무슨 이유로 갑자기 그러신다는 거지?”

리토리오 대공의 질문에 황실 측 인사가 그 답을 내놓았다.

뒤늦게나마 동쪽에서 고생한 슈렐리츠 대공과 여러 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참전했던 10강들과 지휘부 인사들까지 전부 부를 계획이라고 말이다.

“듣기로 슈렐리츠 대공이 얼마 전까지 연회를 거절했던 것으로 아는데.”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받아들이셨습니다.”

“그 친구가,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순간 리토리오 대공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오르다 사라졌다.

그 미소는, 예상대로 일이 흘러갈 때 나오는 그만의 버릇이었다.

“알겠네. 하지만 이 몸까지 가면 굉장히 부산스러울 터. 거기에 우리 리토리오는 전쟁에서 딱히 한 일이 없으니 나 대신 내 딸아이를 보내고 싶네만.”

“폐하께서 이르시길 대리자를 보내도 상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거기까지 들은 대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초대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후 황실 쪽 사람과의 만남을 끝마친 후, 그는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다.

“예상대로구나.”

“네. 충분히 예상했던 그대로죠.”

리토리오 대공의 말을, 대공가의 후계자가 된 엘가가 받아 답한다.

“내일이 분명 카일의 생일이렷다.”

“확실해요. 아버지. 방학 기간 동안 존 나센에 가있었을 때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황제 폐하가 갑자기 연회를 여는 것이구나. 슈렐리츠 대공에겐 승리의 축하 겸 카일의 생일도 있다고 하면서 불러낸 것이고, 카일에겐 승리의 기념만 말씀하셨겠지.”

“카일 성격 상 본인 생일 연회라고 하면 절대 안 가겠다고 할 테니까요.”

이런 식으로 차근차근 황실과 존 나센의 혼인을 기정사실화 할 생각이군.

리토리오 대공은 그리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몇 번 두드렸다.

황제의 계획을 대놓고 망쳐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순순히 바라만 보고 있기엔, 제 딸이자 후계자가 마음에 걸린다.

훼방을 놓는 수준은 아니어도 적당하게 긴장감 정도는 주어도 될 터.

“네 부탁대로 엘가, 너를 대리자로 보내겠다고 해두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정말 괜찮겠느냐? 자칫 황녀와 정면으로 부딪칠 수도 있다.”

굉장히 현실성 있는 걱정에도 엘가는 그냥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거기서 리토리오 대공은 무언가 눈치를 챈 것인지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이미, 대화를 나눈 것이구나.”

“당연하죠. 강적이긴 한데, 그렇다고 적대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심히 ‘리토리오’ 스러운 대처 방법이었다.

경쟁 대상으로 인지하면서도 결코 완벽한 적으론 두지 않는다.

언제는 손을 잡고 언제는 경쟁하고, 그런 식으로 나선다.

“사실 카일 생일이라는 것도 제가 다 알려준 거라서요.”

“너무 큰 이점을 버린 게 아닐까 걱정이구나.”

“괜찮아요. 너무 먹음직스러운 건 잘못하면 배탈이 날 수 있잖아요.”

대답 하나, 하나가 가히 마음에 쏙 든다.

과하게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서도, 물러나면서 얻을 수 있는 건 다 챙겼다.

이를테면 다른 쪽에 정보를 풀어주면서 빚을 달아두고.

그걸로 나중에 결정적인 순간이 닥치면, 그 빚을 흔들 것이다.

‘딸아이를 후계자로 삼은 것이 참 다행이군.’

새삼 엘가를 지지해준 카일에게 고마움까지 들 정도다.

“그러면 얼른 준비하거라. 당장 내일이 연회인데 드레스랑 장신구부터….”

“그것도 이미 다 끝났죠. 제가 누구 딸인데요.”

씨익, 미소를 짓는 엘가를 바라보며 리토리오 대공은 웃음을 터트렸다.

제 딸이 황녀라는 강적을 만난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보다는 황녀가 자신의 딸이라는 강적을 만난 것이라고 해야 할 듯 싶다.

*

한편, 교단 본부에도 황실의 특사가 도착했다.

“추기경 예하.”

황실 특사가 성호를 그으며 인사를 올리자 바오로 추기경도 마주보며 성호를 그었다.

직접적으로 황실에 충성을 맹세하는 귀족들과는 조금 다른 위치.

그러면서도 황실에 반하지 않고 적당하게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는 곳.

그게 현 교단의 정치적 위치였기에 더더욱 조심해야만 한다.

‘황실 특사라니.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지.’

현재 교황은 잠깐 자리를 비운 상태다.

따라서 교단 내부의 일은 임시적으로 바오로 추기경 자신이 맡게 되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긴장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황제 폐하께서 보내시는 것입니다.”

특사가 품에 소중히 지니고 있던 무언가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내일 개최될 황실 연회의 초대장입니다. 얼마 전 있었던 거대한 전쟁에서의 공로자들에게 축하를 건네고, 명예롭게 전사한 이들의 명복을 비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 자리에 교단의 분들도 부디 와주었으면 한다고, 직접 뜻을 전하셨습니다.”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내용은 예상 외로 소탈했다.

황실 연회에 대한 초대. 이전에도 가끔 있었던 일이다.

다만 교단은 모든 초대에 거의 응하지 않는 편이다.

초대장을 받아도 그 정성만 받고 초대 자체는 하지 않는 게 일반적인 상황.

심지어 황제가 지금처럼 직접 보내도 극구 사양하는 경우가 많았다.

혹 정계와 손이라도 잡는 모양새가 날까 조심하는 것.

교단은 언제나 정치적으로 중립이라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초대라. 그 마음은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항상 교단에 마음을 써주시는 황제 폐하의 아량에 그저 감읍할 따름이지요. 하지만 우리 교단은….”

“잠시, 기다려주세요. 추기경 예하.”

항상 그러던 대로 바오로 추기경이 초대를 사양하려는 순간.

정말 오랜만에 교단으로 돌아온 성녀가 그런 추기경을 제지한다.

“성녀님?”

“갑자기 끼어들어서 죄송해요. 용서해 주시겠나요?”

“아닙니다. 전혀요. 이 노구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방금 기다려달라고 하신 걸 보니 성녀님은 어째 다른 생각을 지니신 것으로 보입니다만.”

바오로 추기경의 물음에 성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번 초대, 응하는 게 어떨까요?”

“성녀님?”

“공로자들에 대한 축하도 있지만, 명예롭게 전사한 자들의 명복을 비는 자리라고도 하잖아요. 그런 곳에 우리 교단의 기도가 한 번 정도는 울려 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상지 못 한 성녀의 의견에 추기경이 침음을 흘린다.

일단 연회 초대에 대한 사절은 여태까지 이루어졌던 교단의 행위들.

이제는 일종의 전통으로까지 여겨질 정도로 아주 오래 되었다.

하지만 그 오래됨이 무조건 자랑스럽고, 훌륭한 것만 될 수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 변화를 주어야 할 때도 다가오는 법이다.

당장 교단의 사제들, 심지어 바오로 추기경 본인까지 봐라.

예전에는 금방 지치던 몸이 이제는 어지간한 병사보다도 강인해졌다.

더 굳건한 몸과 인내심으로, 더 신실한 마음과 의지를 지닐 수 있게 되었다.

변화는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그리고 그 변화를 이끈 인물은 카일을 데리고 온 성녀였다.

“…허면, 교단에서 그 연회에 참여하는 인원으로는….”

“제가 갈게요. 성녀로서, 제국의 영광스러운 별들이 된 이들의 명복을 빌고. 우리 교단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오겠습니다. 추기경 예하.”

성녀의 흔들림 없는 목소리에 바오로 추기경은 결국 고개를 끄덕거리고 말았다.

*

결국 오고 말았구나. 하긴, 올 수밖에 없지.

카일은 제 손에 들린 황실 연회 초대장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직접 불러서 공로자들에 대한 축하, 그리고 이쪽의 생일까지 언급했다.

그 상황에서 초대장이 날아오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안에는 친절하게도 누가 연회에 참석하는지 다 쓰여 있었다.

예로 들자면 슈렐리츠 대공과 참석이 가능한 10강의 일원들과.

동쪽 유목 부족과의 전투에서 나름 활약한 몇몇 인물들까지.

거기에 더해 리토리오 대공가에서는 엘가가.

교단에서는 성녀가 온다는 부분까지 적혀있었다.

‘황실 연회니까 당연히 황녀까지 있다는 걸 생각하면….’

결국 그 자리에 황녀, 공녀, 성녀가 다 모이게 되는 것이다.

남은 건 ‘마녀’ 인데 그 부분도 이 초대장으로 해결되었다.

‘같이 연회에 참석할 사람을 최대 셋까지 뽑을 수 있다고.’

일단 한 자리는 무조건 티샤 것이다. 당연히 그녀와 같이 가야 한다.

이미 황녀, 공녀, 성녀가 모였는데 거기에 마녀가 빠지면 섭하지.

‘그리고… 하나는 역시 이안을 데리고 가야겠지.’

이안도 동쪽 유목 부족과의 전투에서 나름 두각을 드러냈다.

아마 아카데미 학생이 아니라 기사였다면 당장 상을 받았을 정도.

그러니까 연회에 참석할 자격은 충분하다고 여겼다.

‘남은 한 자리는… 누구를 데리고 가야 하나.’

엘가는 리토리오 대공의 대리자 자격으로 참석한다고 했으니 패스.

덤으로 레토는 수행원으로 엘가 옆에 붙을 것이니 역시나 패스.

웬일로 연회에 참석하겠다는 교단은 성녀를 보낸다니 그녀도 패스.

‘…그래. 한 자리는 그 사람 주자.’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카일은 곧장 실내 연무장으로 향했다.

“넬!”

“네, 카일님! 부르셨습니까!”

“잠깐 이리로 좀 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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