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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전투종족-220화 (220/318)

“여어, 이안.”

“카일.”

아카데미로 돌아오고 오늘로서 딱 사흘째 되는 날.

강의를 마치고 돌아가던 두 남학생이 복도에서 딱 마주쳤다.

“몰골이 말이 아닌데.”

“카일, 너도 마찬가지다.”

그 말대로, 현재 둘의 얼굴 표정은 심히 가관이었다.

퀭 들어간 두 눈에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듯 일그러진 입술.

누가 시비를 걸기라도 하면 때려 부수겠다는 불쾌함까지.

그렇지 않아도 혹 마찰을 일으킬까 조심하던 학생들인데.

그 모습에 다들 아예 몸까지 움츠리고 두 사람을 살살 피해다니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보면 한 일주일 내내 과제에 시달린 모습 같다.

그게 아니라면, 일주일 내내 조별 과제에 치인 불쌍한 조장 같기도 하다.

하지만 둘 다 아니었다. 어떤 과제도 두 사람을 곤란하게 하지 않았다.

“카일님. 이안님.”

바로 그 때, 뒤쪽에서 레토가 손을 흔들며 다가온다.

그동안 운동을 정말 열심히 했는지, 슬슬 몸에 변화가 오고 있다.

평범한 남학생의 모습에서 기사라도 긴장할 그런 상태로.

“…무슨 일 있습니까?”

하지만 그 레토도, 카일과 이안의 모습을 보고선 움찔했다.

아무래도 무언가 좋지 않은 때에 인사를 건넨 것 같다는 후회감도 밀려든다.

무섭다. 그렇지 않아도 카일 하나만으로도 무서워 죽겠는데.

요즘은 이안도 존 나센 화가 진행되어서 똑같이 무서워지고 있다.

“무슨 일. 무슨 일 있지. 그렇지, 이안?”

“무슨 일 있지. 있고말고.”

“그 무슨 일이 무슨 일인지….”

알아야 대처를 하든 말든 할 게 아닌가.

사람이 관련된 일이면 얼른 그 사람을 치우는 게 상책이다.

괜히 사람 하나 큰일 나는 수가 있으니까. 나쁜 놈이라도 일단 목숨은 구해놓고 봐야지.

“지겨워. 지루해.”

하지만 그 둘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든 건, 사람이 아니었다.

“따분해 죽을 것 같다. 손맛, 손맛이 그립다.”

“내 말이. 아, 소치르. 그 남자랑 싸울 때 진짜 재미있었는데.”

“나도 그렇다. 동쪽 유목 전사들만이 지닌 그 처절함이 있었어. 얼마나 살 떨리던지 아직도 꿈에 가끔 나올 정도다. 그리고 항상 그 꿈속에서 싸우고.”

“이야. 부럽다, 이안. 난 꿈에서도 소치르가 땅에 처박혀서 싸울 생각이 없던데.”

“….”

뭐야, 이 인간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레토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레토는 동쪽의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

애당초 그럴 이유가 없었다. 레토는 리토리오 대공가의 가신.

슈렐리츠 대공가의 가신이라면 또 모를까, 그곳 사람이 전쟁에 참여할 이유는 없다.

“저기, 두 분. 지금 눈빛이 좀 이상합니다. 다른 학생 분들이 슬슬 피하고 있는데요.”

“레토. 너도 동쪽에 다녀왔어야 했다.”

“이안 말이 맞아요, 레토. 당신도 거기 좀 다녀와야 했는데.”

그랬다면 지금보다 한 50퍼센트는 더 강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아. 그냥 엘가한테 부탁해서 레토도 데려가야 했는데. 후회가 밀려든다.

“…카일님. 그런 시선으로 보지 말아주시죠.”

“왜요?”

“그렇게 볼 때마다 항상 안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예로 들자면….”

“설마, 지금 운동을 더 하는 게 안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 건가요?”

카일의 말에 이안이 헉, 하고 놀라서는 레토를 바라본다.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냐는 무언의 질문에 레토가 황급히 손을 내젓는다.

“그, 그건 아닙니다! 절대 아니고말고요. 그러니까 제 말은….”

“오늘부터 한 세트 당 횟수 늘립니다.”

자비는 없었다. 카일의 서릿발 같은 선언에 레토는 끄아아! 하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정말로 이건 아니다.

지금도 자신이 리토리오 대공가의 가신인지, 기사인지 헛갈릴 지경이다.

가면 갈수록 튼튼해지는 몸을 보며 내심 뿌듯한 생각이 들면서도.

때로는 ‘이게 맞나? 누가 봐도 기사 시험 준비 중인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카, 카일님! 물론 육체적 능력도 중요하지만 저는 행정 업무 쪽도 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요?”

“단련 시간을 줄여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대신, 그 행정 업무에 영향이 갈 정도로 피곤한 상황은 좀 어떻게 막아주셨으면….”

레토가 한 가지 단단히 실수한 게 있었다.

존 나센 남작가도 어찌 되었든 행정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일개 가신에 불과한 레토보다야 많으면 많지, 적지는 않다.

그럼에도 존 나센 남작은 그 경악할 수준의 단련을 하면서도 업무를 밀리지 않았다.

그 원동력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 의지!

그리고 그것들을 단단하게 지탱해주는, 강철보다도 더 한 체력이었다!

“아유. 괜한 걱정이에요. 아버지도 할 거 다 하시는데도 행정 업무 다 하셨어요. 체력만 기르면 다 할 수 있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고 횟수 올리죠, 레토.”

하늘에서 나타나는 분과 저를 비교하시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으아악!!

레토는 비명을 지으며 이안을 쳐다보았다. 제발 자신 좀 구해달라는 뜻.

예전에는 이안 또한 레토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카일의 단련 방법을 무척 힘들어했고 따르기 싫어했던 적도 있다.

해서 도움! 하고 간절한 눈길을 보낸 것이었는데….

“힘내라, 레토.”

“이안님?! 이러기 있습니까?”

“적어도 넌 존 나센 남작님 밑에서 하지는 않았잖아.”

알게 모르게 이안도 내심 방학 동안 대공가에 남은 레토에게 실망했던 모양이었다.

*

“자, 다들 모인 건가요?”

공녀의 물음에 그녀를 제외한 여인 셋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이들이 모인 곳은 아카데미에 마련된 예배당 내부.

그곳에서도 성녀만을 위해 카일이 만든 자그마한 헬스장이었다.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모이자고 한 것인지 알 것 같군.”

카일을 보려고 왔다가 엘가에게 붙잡혀 끌려온 황녀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렇지 않아도 바로 어제, 카일이 동쪽 행을 제안해서 난감하던 차였다.

“듣자하니 지역을 점령하면 그 중요도에 따라서 일개 귀족부터 황족까지 간다고 들었어요. 동쪽에는 그러면 황녀님이 가는 게 어때요? 제가 보기엔 그게 제일 좋을 것 같은데.”

“별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요. 그쪽 사람들이 운동 잘 하고 있나, 그것 좀 확인해야 하는데 마침 황녀님이 가주시면 확인도 쉬울 것 같아서요.”

카일은 아카데미를 더 비울 수가 없다. 이미 한 달이나 빠져있었으니까.

그에 반해 황녀는 아무 제약이 없다. 오히려 황제에게 지금의 제안을 한다면, 동쪽으로 가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손해를 볼 일도 없다. 일단 황족으로서 보여야 할 의무를 다 하는 것이 하나.

카일의 부탁으로 향한다는 걸 은근히 흘리면 결국 둘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니 또 하나.

마지막으로 카일에게서 받아낼 수 있는 ‘빚’ 이 늘어난다는 게 또 하나다.

‘하지만 말이지. 이건 너무 뻔히 보이잖아.’

황녀는 즉답을 피했다. 카일의 제안에 생각해보겠다고만 말했다.

때마침 엘가가 잠시 이야기를 하자고 하자 잘 되었다고 여겼다.

어제의 그 상황, 아무래도 다른 여인들이 개입된 일 같았으니까.

그리고 오늘 모인 여인들의 얼굴들을 보니, 자신의 예상이 맞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되었는지 다들 확인해보고 싶은 눈치였으니까 말이다.

“너희들이지? 카일에게 그 이야기를 한 것.”

“정확히는 제가 먼저 제안했습니다, 황녀 저하.”

엘가가 먼저 나서서 티샤나 성녀가 난처해지지 않도록 한다.

본인이 먼저 의견을 냈고, 결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그 부분을 솔직히 말하는 것은 꽤나 용기 있는 일이었다.

“하아.”

한숨을 흘린 황녀는 벤치 위에 앉아서 가볍게 덤벨 컬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너무한 것 같은데? 견제가 좀 심하잖아.”

“인정합니다, 황녀 저하. 하지만 이쪽도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어서.”

사정이라. 그게 무엇인지 한 번 들어나 보자.

라는 식으로 황녀가 엘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차기 대공이 말을 잇는다.

“냉정하게 보자면, 지금 카일 곁에서 가장 최고는 바로 황녀 저하시니까요.”

“…내가?”

멍하니 반문한 황녀가 슬쩍 티샤와 성녀의 표정을 확인한다.

그녀들 또한 엘가의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일단 황녀 저하는 강하시죠. 이미 그것만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들어가십니다. 당장 존 나센 남작님도 황녀 저하를 굉장히 훌륭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존 나센은 애당초 강함과 노력을 가장 중요시 여기니까.”

고개를 끄덕거린 황녀는 엘가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째, 여기서 진지하게 대해주지 않으면 굉장히 피곤해질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더해서, 황녀 저하께서는 아름다움도 지니고 계시죠. 여기 있는 모두에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요. 거기에 말 그대로 황실의 직계이십니다. 어느 부분으로든 이미 앞에 계십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내가 견제 대상 1순위일 수밖에 없다, 이거야?”

황녀의 물음에 엘가도, 티샤도, 그리고 성녀까지도 작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다들 아닌 척 하지만. 만에 하나 카일이 한 명에게만 관심을 쏟는다면.

그 비참함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나 서로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아아.”

긴 한숨을 흘린 황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좋아. 너희들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어.”

“감사합니다, 황녀 저하.”

“하지만 이렇게 견제만 하면, 나라고 해도 조금은 서운해. 나도 사람이고, 나도 여자야. 견제를 하다가도 때로는 같이 해주는 게 조금은 더 반갑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

계속 이러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조금은 상처를 받는다.

그러니까, 때로는 견제하고 또 때로는 같이 어울려달라는 황녀의 말.

“실은, 그와 비슷한 이유로 이렇게 모이기도 한 거랍니다. 황녀님.”

성녀가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잇는다.

“얼마 후면 카일 형제님의 생일이 다가오거든요.”

“…생일?!”

전혀 생각지도 못 하고 있던 말에, 황녀의 두 눈에 반짝거림이 머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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