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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전투종족-218화 (218/318)

“…해서 이렇게 좀 늦게 온 거예요. 그렇죠, 황녀님?”

“정말로 가능하겠어? 보니까 꽤나 힘들어 보이던데. 마나의 사용 금지, 알려준 대로 정자세 외에는 절대 금지. 나도 몇 번 하다가 지쳐 쓰러질 거야.”

“그거야 그쪽 사정이고요. 결국에는 증명하겠다면서 가져갔잖아요?”

낑낑거리며 바벨을 들고 가던 전사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름 10강에 준하는 강자들이니 오래 걸리지 않을 수도 있다.

몇 년 만에 달성하고서 존 나센 남작령으로 찾아오는 것도 가능하다.

어쩌면 존 나센 남작도 바로 그걸 기대하고 있지는 않을까.

‘물론, 정말로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정자세로 그만한 무게의 루틴을 돌리는 건 상상 이상으로 힘들다.

하물며 제대로 들지도 못 하는 인간들이 당장 뭘 할 수 있을까.

본격적으로 몸을 만들고, 체력을 단련하고, 그렇게 해서 준비 작업을 마친 후.

이쪽이 내어준 무게보다 조금 가벼운 것으로 연습을 시작해서.

점차 무게를 늘려가 마침내는 목표한 수준에 도전하는 게 순서일 것이다.

“좋은 일을 하고 오신 거네요! 카일 형제님!”

와중에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누군가를 도와주었다는 거에 감탄하는 성녀였다.

엘가와 티샤는 잠깐이지만 ‘이게 늦은 거야?’ 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말이다.

“흠흠! 아무튼, 고생이 많았어요. 카일. 힘들지는 않았나요?”

“전혀요. 오히려 너무 재미있었는데요. 거기 전사랑 싸우면서 진짜 오랜만에 이런 상처도….”

라고 말하던 카일이 갑자기 ‘아차.’ 하는 표정이 되었다.

돌아가면 다쳤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라던 남작 부인이 떠오른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실까, 생각했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다쳤다고요?”

“얼마나, 얼마나요! 제 주술이 소용이 없었나요?!”

“얼른 상처 봐요, 형제님! 얼른요!!”

반가워하던 기색들이 일순간 사라지고 남은 건 걱정과 분노다.

덕분에 황녀조차 히익, 하고 뒤로 물러서서는 상황을 지켜볼 정도.

당사자인 카일은 그 덕분에 미친 듯이 손을 내저으며 입술을 뗐다.

“아니에요! 말실수! 안 다쳤어요! 안 다쳤답니다! 하하하!”

“거짓말!!”

“얼른 상처 보자고요, 형제님!! 다치셨죠?! 그렇죠!?”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짓이었다. 카일은 자신의 실수를 뼈저리게 통감했다.

이래서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거였구나.

“카일, 너 다쳤잖아?”

그 와중에 눈치도 없이 사실을 불어버리는 황녀까지.

외통수에 몰린 카일은 순순히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여인들이 원하는 대로, 부상을 입었던 곳을 보여주었다.

“너무 걱정할 거 없다니까요. 이미 치료도 받아서 이게 거의 다 나았는데.”

물론 ‘거의 다 나았다.’ 라는 판단은 철저하게 카일의 기준에서였다.

그게 아니면 존 나센의 기준이었다던가. 아무튼 다른 이들에겐 절대 그렇지가 못 했다.

생각해봐라. 겨우 핏물만 빠졌을 뿐 붕대를 감고 있는 상황인데.

심지어 그 안에 자리한 상처는 여전히 살이 쩍 벌어져있는데.

어느 누가 ‘아, 가벼운 상처네요! 걱정 안 해도 되겠어요!’ 라고 할까?

“…카일!!!”

팔에 난 흉한 상처를 보자마자 엘가가 분노의 일갈을 내뱉는다.

크게 다치지 않을 거라는 그의 약속을 믿고 아무 걱정 없이 보내준 것인데.

몇 번이나 치료를 했음에도 끔찍한 몰골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내, 내가 부족했어요. 더 강력한 주술을 걸어야 했는데.”

티샤는 자기비판에 들어갔다. 충분하다고 여겼는데 아니었다면서.

오늘부터 밤을 새서 새로운 주술 연구에 들어가겠다고 의지를 불태운다.

“당장 소매 걷고 팔 내미세요. 얼른요.”

마지막으로 성녀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굉장히 차가운 모습으로 말했다.

부상자를 대하는 순간만큼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성녀다.

그런 그녀 앞에서, 팔에 커다란 흉을 지닌 카일은 분노 유발 대상이었다.

“제대로 치료 안 하신 것 같네요. 그렇죠, 카일 형제님?”

“치료는 받았습니다. 며칠 쉬기도 했고요. 그런데, 그….”

“카일 쟤, 전투 당일에 본인이 점찍은 상대랑 한 번 더 싸우고 싶다면서 기어코 뛰쳐나갔어. 그래서 낫고 있던 상처가 커진 게 아닐까, 성녀님?”

제발요, 황녀님. 왜 자꾸 사실로 저를 난처하게 만드시는 겁니까!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요? 얼른 황궁으로 돌아가세요! 훠이 훠이!

“상처도 낫지 않았는데 또 몸을 쓰셨다고요.”

성녀의 두 눈이 무섭게 일그러진다. 카일마저도 순간 움찔거릴 정도.

평소의 그 온화한 모습은 개나 줘버렸는지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다.

“카일 형제님.”

“죄송합니다, 성녀님.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맹세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럴 때는 그냥 핑계 없이 얼른 잘못을 인정하는 게 최고다.

그 간단하고도 변하지 않는 진리를 알고 있던 카일은 잽싸게 말했다.

덕분에 성녀가 더 화가 나서는 목소리를 높이는 일은 없었다.

“후우우….”

깊은 한숨을 내뱉은 성녀가 카일의 팔을 연신 쓰다듬는다.

그러더니 조그마한 목소리로 장문의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사아아….

잠시 후, 상처 주변에 희미한 빛무리가 머무는가 싶더니 따스한 기운이 전해졌다.

카일이 ‘오오.’ 하고 탄성을 흘리자 성녀가 그를 노려보았다.

역시나 평소의 성녀라면 절대 보이지 않을 모습에 카일이 깨갱, 하고 꼬리를 내렸다.

“큭큭큭….”

뭐가 그리 웃긴 지, 황녀는 조금 전부터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그 동쪽의 전사들 앞에서도 호방한 모습을 보이던 카일이다.

그런 남자가 여자 앞에서 이렇게 난처해 할 줄 어느 누가 알까.

“황녀 저하.”

성녀만큼은 아니어도, 꽤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가오는 엘가.

항상 황실을 주의하던 원래의 그녀답지 않게, 오늘은 날이 선 모습이었다.

“카일이랑 같이 계셨던 게 아닌가요?”

“맞는데? 싸울 때도 보고 있었고, 나중에도….”

“그러면 왜 카일을 말리지 않으신 건가요?”

감히 황녀의 말을, 그것도 제국 10강 자리까지 들고 있는 이의 말을 잘라낸다.

대공의 자리에 올랐다면 또 모를까, 아직은 후계자에 불과하지 않은가.

불쾌할 수도 있겠지만 황녀는 그 부분에 대해선 딱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보다는, 자신을 탓하는 엘가의 목소리가 더 신경 쓰였으니까.

“공녀, 너라면 막을 수 있었을 거라는 어투로 말하네?”

“그건….”

“내가 안 막았을 것 같아? 애당초 막았다면, 막을 수는 있었고?”

황녀의 말에 엘가는 입술을 깨물고선 주먹을 쥐었다.

그 말대로, 황녀 대신 자신이 거기 있었다고 해서 카일을 말리지는 못 했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전투에 대한 부분은 진심인 존 나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걸 막는다는 건 연을 끊겠다는 소리와 같다고, 언젠가 보고서에서 본 적이 있다.

하물며 당장 눈앞에 바로 전 싸웠던 상대가 있다면.

다시금 싸워보고 싶은 그 마음을 어찌 억누를 수가 있겠는가.

실수했다. 이렇게 흥분해서는 안 되었는데.

카일이 저렇게 크게 다친 걸 다른 사람에게 풀어내려고 했어.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엘가가 막 입술을 떼는 순간이었다.

“죄송합니다, 황녀 저하. 제가 실수를….”

“뭐래요. 황녀님. 저 안 말렸잖아요? 오히려 등까지 떠밀었으면서.”

이전의 복수라도 하듯, 사실을 말해주는 카일.

그러자 황녀는 미소를 짓고선 아주 능청스럽게 답했다.

“아. 그랬지? 그랬네!”

“…황녀 저하!!!”

이 여자가 이제는 거짓말까지 해?! 나를 속였어?!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엘가가 소리까지 내지른다.

그럼에도 황녀는 그냥 깔깔 웃으며 손만 내저을 뿐이었다.

“아무튼 공녀, 너도 인정한 거잖아? 거기에 나 대신 네가 있었다고 해도 카일을 말리지는 못 했을 거라는 점. 아니야?”

“…인정합니다.”

싸우지 말라고 카일을 막는다는 건, 대공 자리에 오르지 말라고 하는 것.

그렇게 비유를 하자니 엘가 입장에선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카일. 혹시 제 주술이 제대로 발현이 안 된 건가요?”

한편, 티샤는 본인 주술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중이었다.

심혈을 기울여서 제작한 것인데, 그래서 크게 다칠 일이 없을 거라고 여겼는데.

치료를 했다는 지금도 성녀조차 놀랄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크게 다친 걸까.

“아.”

카일은 깜빡했다는 듯 티샤를 옆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바로 가볍게 티샤의 볼에 입술을 맞췄다.

“아?”

“히익?!”

“어어어?”

전혀 다른 반응들을 보이는 네 명의 여자들을 둔 채로.

카일은 일단 정말 고마운 부분부터 말하기로 했다.

“티샤가 준 것 덕분에 이 정도에서 끝난 거예요. 그게 아니었다면 더 싸워보지도 못 하고 그 자리에서 승부를 내야 할 수도 있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돌아오면 이 말 꼭 해주고 싶었을 정도로. 티샤가 아니었다면 그 소치르라는 자랑 두 번이나 싸울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 주술 덕분에 첫 번째 전투에서 굉장히 오랫동안 즐길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어쩔 수 없이 첫 번째 전투에서 승패를 갈라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고맙다. 당신 덕분에 더 싸울 수 있었다! 라는 게 카일의 속내였다.

“다, 다음에는! 더 엄청난 주술로 해드릴게요!”

다만 여인들에겐 그 속내보다는 다른 게 더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저는요?! 카일 형제님! 저도 형제님 오시기 전까지 막 기도도 드리고! 지금도 열심히 치유 중인데요!”

단 한 번도 자신의 희생에 보상을 바란 적이 없었던 성녀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오늘 처음으로 보상을 바라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 보상은 역시나….

“성녀님은 여기다가 해드릴게요.”

이번에는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는 카일이었다.

덕분에 성녀는 히이잉!! 하고 행복에 겨워 죽으려는 표정.

“…흠흠!”

그리고 엘가는 자신도 은근히 기대 중이라는 모습이었다.

“엘가님은… 뭐 하셨나? 없는 거 같은데?”

“카일?! 그, 그러기 있어요?”

“농담입니다. 엘가님은 조금 있다가요. 치료 다 끝나면.”

마지막으로 황녀는….

“거짓말쟁이 탈락.”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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