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박, 사박-.
여인이 다가올수록 바타르 부족 전사의 표정은 일그러져갔다.
건장한 전사도 아니다. 하다못해 전장에서 뒹군 기색도 없다.
여인이라서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 부족에서도 여전사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저기서 다가오는 상대는, 어디를 봐도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잘 쳐봐야 평범한 아낙네다. 툭 치면 쓰러질 듯 가냘픈 그런 사람이다.
으득-.
전사는 생각했다. 제국 놈들이 시작부터 대놓고 우리를 도발하는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 명예로운 전투 전에 이런 짓을 벌일 수가 없다.
분노가 차올랐으나 그는 이를 악문 채 애써 그 열기를 잠재웠다.
‘제국 놈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줄 수는 없는 법.’
아마 저놈들은 자신이 흥분하여 분노하거나, 그게 아니면 난리를 치는 꼴을 보려는 것이다.
부족들 간의 싸움에서도 간혹 이런 경우가 있었던 적이 있다.
너희는 우리 상대가 되지 못 하니 여인이랑 한 판 하라는 뜻에서.
‘거기에 그냥 넘어가줄 줄 아느냐.’
필요 없다. 반응하지 않으면 된다. 진짜 상대가 나타나기 전까지, 무시하면 된다.
그러는 사이 여인은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겨 전사 바로 앞에 섰다.
“저기요. 시작 안 하시나요?”
“….”
“표정 보니까 뭔지 알 것 같네요. 이해해요. 나도 기분이 영 좋지가 않아요. 내기를 했는데 거기서 져서 나가게 되었거든요.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뭐라고 하든 무시할 생각이었다. 도발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다음 이어진 말은 초원의 늑대라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애랑 싸우라니. 이게 무슨 망신인지 모르겠어요.”
아이에 자신을 비유하다니?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이를 악문 전사가 분노에 찬 눈빛으로 여인을 노려보려는 순간.
“살살 할게요. 우리 애들한테 하던 것처럼은 안 하지만, 그래도 아플 거예요.”
“…?”
분명히 저 멀리 서있던 여인이었다.
그런데 눈 한 번 깜빡이니 갑자기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얍.”
마리아 남작 부인은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전사의 이마에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우직!-
무언가 험하게 깨지는 소리와 함께, 전사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 전사는 돌고 돌아 가한 바로 앞에 떨어졌다.
“….”
“….”
여인을 내보냈다고 한창 화를 내던 부족들의 전사들이 일제히 침묵한다.
지금 자신들이 무엇을 본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 한 것 같았다.
“…이익!”
한편, 전사를 내보낸 보르후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기껏 가한의 기대 속에서 내보낸 제 부족의 전사가 패했다.
그것도 한낱 여인에게, 아주 꼴사납게! 심지어 가한 바로 앞에서!
“끌고 가! 다시는 가한의 눈에 띄지 않게 해!”
죽은 건지, 아니면 정신을 잃은 건지, 미동도 없는 전사를 끌고 간다.
그 모습을 노려보던 보르후는 다급히 가한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가한. 이 치욕은 반드시 갚겠습니다. 허락만 하신다면….”
“되었다. 전투 준비에 들어간다. 특히나 이 가한의 칼들은,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해라.”
“하오나 가한!”
“나 또한 친히 칼을 들고 앞장 설 것이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호위들이 놀라서는 가한을 부른다.
제 주인이 최고의 강자라는 것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최고 사령관은 후방에서 머물며 총지휘를 하는 것이 옳다.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들은 바로 붕괴될 것이 뻔하다.
“가한.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들이 앞장서서 10강이고 뭐고 전부 베어버릴 것입니다!”
전사들이 일제히 나서서 자신들이 나가겠다고 외친다.
모두가 10강에 필적하는 강자들이다. 10강이 나온다고 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그만.”
하지만 가한은 그들의 청까지 전부 물리치고 전투 준비를 서둘렀다.
‘무언가 이상하다.’
거리가 제법 되어서 제대로 확인하지는 못 했다.
그럼에도 가한은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제국 측에서 내보낸 저 여자는….
‘보통이 아니다. 이번에 출정한 제국의 10강에서 저런 무위를 뽐낼 인물은 황녀라는 자가 전부였는데 아무리 봐도 그 황녀는 아닌 것으로 보였다.’
아마도 이쪽의 노림수를 눈치 채고 강자들을 최대한 끌어 모은 것 같았다.
10강에는 미치지 못 하겠으나 그 아래의 수준에서는 날아다닐 법한 이들로.
그렇게 해서 지금과 같이 대전사 결투에서 무조건 승리하도록 말이다.
“놈들이 준비를 제법 많이 한 것 같다. 거기에 휩쓸릴 필요는 없어. 우리가 먼저 밀어붙이면 어차피 저것들이 준비한 패가 드러나게 된다. 나와 그대들, 초원의 위대한 늑대들은 그 제국의 비수부터 부러트린다.”
“…알겠습니다. 가한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전투 준비!!”
가한의 밑에 굴복한 스물 두 개의 부족들이 마침내 전투 준비에 들어간다.
“조심해야 할 것은 적들의 마법사다. 좌측과 우측은 궁기병으로 하여금 가장 바깥쪽부터 무너트린다. 중앙은 중기병들이 한 번에 밀고 들어가 진을 무너트려야 한다. 피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제국의 저 미련한 것들을 쓰러트리면! 우리는 여태까지 누구도 가지지 못 한 거대한 전설을 이루게 된다!”
전투 깃발이 올라가며 거대한 덩어리들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한다.
각 지휘관들이 제 부족들을 움직이는 사이, 가한은 제 전사들과 함께 제국군을 살폈다.
“우리들은 적당히 상황을 지켜보다가 제국 측이 전력을 내놓을 시 바로 공격한다. 명심해라. 그놈들을 쳐죽여야만 진정한 승리다. 죽는 한이 있어도 적에게도 그만한 치명상을 입혀라.”
“예! 가한!”
그러는 사이 각 측면부터 공격이 시작되었다.
거대한 늑대 무리가 한 곳에 모여 있는 양떼들에게 돌격한다.
이제 곧 사방에서 피가 뿌려지며 승패가 갈릴 터.
그런데 제국군은 요지부동이었다.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진형도 도착해서 펼쳤을 때의 그것 그대로다. 대기병 진을 만들지도 않는다.
제국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는, 오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콰아앙!!- 쾅!!-
“우아아악!!”
“흐어억!!”
제국군 측으로 돌격하던 전사들이 사방에서 허공으로 치솟는다.
말과 사람이 빙글빙글 돌아 바닥에 처박히며 다시는 일어나지 못 한다.
처음에는 마법 공격에 맞은 줄 알았다. 그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어디서도 그 마법 공격의 시작점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시커먼 무언가가 하늘에서, 그리고 제국군 측에서 날아들고 있었다.
전사들 사이로 제국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섞여있다.
그들이 손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커다란 비명이 울려 퍼진다.
싸움이라면 이골이 난 전사들이 손도 못 써보고 당하고 있었다.
저런 위용을 보일 수 있는 자들은, 딱 한 부류밖에 없다.
‘설마 10강들을 저런 식으로 보내겠다고? 하! 고맙게도 그리 해주는구나!’
왜 자신과 전사들도 곧장 전면에 나서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았는가.
어찌 되었든 똑같은 사람이라, 움직이면 지치고 지치면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10강과 같은 강적을 눈앞에 두고 그 빈틈은 패배로 직결할 수 있을 터.
해서 먼저 주 병력으로 하여금 제국군을 몰아치고 위기감을 느낀 10강들이 나섰을 때 바로 나서서 조금이라도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싸우려고 했다.
제국도 똑같은 전략을 취하려고 했을 거다.
먼저 병력으로 승기를 잡고, 가한과 그 전사들이 나서면 10강으로 제압한다.
즉, 먼저 최고 전력을 전장에 풀어내는 쪽이 불리하다는 것이었다.
“게를레! 보르후! 톨가! 좌측으로 가라! 알탄과 어치러, 타우가는 우측으로 가서 10강을 상대해라. 놈들이 먼저 움직였고, 우리들 늑대의 무리에 들어왔으니 훨씬 더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을 터! 반드시 놈들을 잡아 죽여야 한다.”
“가한께서는 어쩌시렵니까?”
“소치르, 체기와 함께 중앙을 돌파하겠다. 내가 직접 나선다면 제국 또한 일정 수 이상을 집중하려고 할 것이다. 그 사이에 그대들이 제국의 비수를 부러트려야 할 것이다.”
가한은 두 눈을 번뜩이곤 급히 제 전사들을 나누어 이동시켰다.
제국이 동원한 10강의 숫자는 아홉. 그 중 하나는 부상을 당했다.
즉 상대해야 할 인원은 8명이라는 것이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
자랑스러운 자신의 칼들, 초원의 늑대들이라면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가한은 몸소 나서 두 전사와 함께 앞장서서 말을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앞쪽에 두 사람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저들 또한 제국의 10강일 터.
곧장 말에서 뛰어내린 가한과 두 전사는 적들에게로 나아갔다.
방심 따위는 없었다. 저들 또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최고의 강자들이다.
힘의 논리로서 움직이는 초원이다. 그 초원에서, 강자는 강자에게 대우를 한다.
조금도 허술하게 대하지 않고, 한 번 싸울 때마다 최선을 다한다.
반드시 승리하고 말겠다는, 무조건 죽이겠다는 일념으로서 대한다.
“가자. 위대한 늑대의 후예들이여!”
가장 거대하고, 가장 용맹한 늑대가 대지를 박찼다.
*
“리어.”
“예, 아버지.”
“보거라. 저기.”
존 나센 남작의 말에 리어가 어느 한 곳을 바라보았다.
고향 사람들이 온갖 난리를 치고 있는 사이에서, 몇몇 인물들이 달려오고 있다.
특히나 그 선두에 선 남자는,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근육이 확 당겨지는 듯 했다.
“…훌륭합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예. 저 정도면 제국 10강보다도 더 강한 것 같습니다.”
리어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 광경을 카일이 봤다면 아마 크게 놀랐을 것이다.
저처럼 만족스러운 웃음은 거의 짓지 않는 리어였으니까.
“어쩌시렵니까.”
“저 자는 내가 맡으마. 어차피 그 옆에 둘이나 더 있지 않느냐.”
“알겠습니다. 저 둘로도 충분할 것 같군요.”
고개를 끄덕인 남작은 천천히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사이에 제 아내와 딸이 있다. 저기 쾅! 하고 승천하는 자들도 전부 그녀들이 벌인 일일 터.
“걱정되십니까?”
“그래. 걱정되는구나.”
혹 여인들을 걱정하는 것일까? 설마, 그럴 리가.
“알게 모르게 네 엄마나 네 누이가 흥분을 잘 하지 않느냐. 평소에는 정말 얌전한데.”
“누이도 누이지만, 어머니께서 가끔 그러시면 정말 무섭지요.”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데 어째 힘들 것 같구나. 저기로 향하는 이들도 꽤나 강해서 말이다.”
나중을 위해 되도록 생명에 지장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혀를 찬 존 나센 남작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곤 말을 이었다.
“괜찮은 자들도 있는데, 그래도 잡것들이 너무 많구나.”
“허면 좀 치우시겠습니까?”
“그래야지. 고향 사람들도 애들이 걸리적거리면 마음 놓고 싸우지 못 할 테니.”
앞으로 나아간 남작은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다가 이내, 전투에 대한 기대와 열망을, 포효로 승화했다.
“… …!!!”
…쿠과과과과과과!!!!-
천지가 개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