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싸둬요.”
“…응?”
“짐 싸라고요. 내가 보기에 이제 일주일 안으로 끝날 것 같으니까.”
너무 갑작스러운 카일의 말에 이안이 대답을 하지 못 한다.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지도 않았다. 치른 전투는 단 한 번, 전초전에 불과하다.
그곳에서 겨우 몸 좀 풀리는 건가 했는데 갑자기 짐을 싸라니?
“카일.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주었으면 한다.”
“우리 가문 사람들 왔어요. 당신도 알 텐데요.”
“알긴 아는데….”
“아버지, 형님에 심지어 어머니랑 누님도 오셨어요. 거기에 같이 온 사람들? 내가 장담하는데 나랑 비슷한 수준들의 괴물들이에요. 그 분들이 여기 뭐 놀러왔을 것 같아요?”
카일의 말에 이안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내젓는다.
자신 또한 존 나센 남작령에 두 달 미친 듯이 굴려져서 잘 안다.
그들이 운동조차 거르고 어느 곳에 왔다면, 그건 정말 엄청난 일이다.
하물며 그 많은 사람들이 왔다? 이건 신이 오지 않고선 뭐 할 수가 없다.
“그래도… 난 이제야 몸이 좀 풀렸는데.”
“다음 전투가 아마 마지막 전투가 될 것 같으니까 그러면 그 때 최선을 다해요. 운이 좋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그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뭐 하나 양보는 해주겠죠.”
귀환한 슈렐리츠 대공이 이안의 실력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예상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인재라고. 전초전에서 활약이 대단했다고.
혼자 유목 전사들을 베어 넘기는데 덕분에 사기가 아주 많이 올랐다고 말이다.
서로가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패배는 보기 좋지 않다.
해서 적당한 실력자들을 내세웠을 텐데 그 사이에서 이안이 두각을 드러냈다.
단순히 운이 좋아서, 혹은 약한 놈들을 상대로 세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일단 1차 목표는 달성했어. 이안의 실력 점검. 100점은 아니어도 일단 합격 정도는 되겠군.’
2차 목표는 역시나 카일 본인의 행복 시간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소치르라는 전사와 결투를 벌이면서 한 번 성취하기는 했다.
이제 두 번째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바로 남작가 사람들이 도착했다.
아껴먹으려고 한 번 숨겨둔 걸 죄다 빼앗기게 생겼다.
그렇다고 당장 나서자니 아직 다 낫지 않은 몸으로 어디 무리를 하려 하냐고 말릴 거다.
당장 운동조차 쉬어야 하는 마당에 전투가 말이 되냐면서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늦게 서신을 보낼 걸 그랬나?’
라고 생각했다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랬다가는 리어나 레아가 와서 ‘실망이다, 카일. 독식하려고 했다니.’ 라고 했을 터.
‘상상만 해도 무섭다. 차라리 미리 알리고 말지. 어우.’
아직도 아카데미에 찾아와서 디저트에 빠진 자신을 보고 놀란 리어의 표정이 선명하다.
적의 따위는 하나도 없는데 저절로 가슴이 서늘해지는 그 기분.
아마 평생을 가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은 무엇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카일. 그러면 다음 전투에 너도 참전하는 건가?”
“모르겠어요. 다음 전투가 언제인지 모르는데….”
“나 왔어, 카일.”
회의가 있다고 해서 지휘 막사로 향했던 황녀가 돌아왔다.
그녀는 오자마자 카일 옆에 찰싹 붙더니 입술을 떼었다.
“사흘 후에 지정된 장소에서 아마 대규모 전투가 벌어질 것 같아.”
“보아하니 저쪽에서 먼저 전투 장소를 알린 모양이네요.”
“뭐야. 알고 있었다는 눈치네?”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다. 이것은 흔한 약탈전이나 점령전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치명타를 주고 우위를 점하려는 전쟁이다.
그런 상황에서 시간을 질질 끌어봤자 서로가 득이 되는 부분이 하나도 없다.
제국이야 군을 움직이는 게 돈 그 자체이니 부담스러울 것이고.
동쪽의 유목 부족들도 가축을 치고 사냥을 해야 할 이들이 전부 나와있다.
무엇보다 저쪽은 통합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결속이 불안할 터.
‘이제 이기는 쪽이 확실하게 우위를 점할 수 있겠군.’
그리고 이기는 쪽은 당연히 존 나센… 아니, 제국이 될 것이고 말이다.
“아. 맞아. 카일. 그 전투에서 모든 건 너희 존 나센이 맡기로 했어.”
“그럴 줄 알았죠. 뭐, 혹시 대공 각하 협박한 건 아니죠?”
“아니? 그냥 황제 폐하께 허락을 받아서 왔던데?”
그 말을 들으니 이번에는 다른 걱정이 슬그머니 떠오른다.
혹시 대공이 아니라 황제를 협박한 건 아닐까, 하고.
“물론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지. 그래서 조건을 걸었어. 나처럼 전투에 참전을 원하는 10강들 위해 독식하지는 않겠다고. 로건이랑 스로드 빼고 나머지는 나서고 싶어 하는 눈치던데.”
“괜히 휩쓸리지 않았으면 하는데요. 고향 사람들이 착하기는 해도 한 번 전투에 들어가면 말 그대로 눈이 돌아가서는 다 박살낸다고요.”
“휩쓸려도 알아서 살아남겠지. 10강이라는 것들이 그것조차 못 견디면 관둬야하지 않겠어?”
황녀의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었다. 남작에게 휘말리는 거라면 또 모를까.
촤악!-
“막내야!”
“카일!”
아이고,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카일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끄엑.”
제발 이렇게 좀 끌어안지 말라고 부탁드리지 않았나요, 누님.
이러다가 하나뿐인 동생 질식사를 하든 아니면 압사를 하든 하겠습니다.
“이게 뭐야. 오라버니께 들었어. 한동안 운동도 쉬어야 할 정도라며!”
“…누님.”
“더 열심히 단련을 했어야지! 그랬다면 이렇게 크게 다치지 않았을 텐데!”
“누님?”
“어머니. 이것 보세요. 막내가 온몸에 붕대를 두르고 있어요! 이렇게 약한 녀석이 혼자 뭐 좀 해보겠다고 운동까지 쉬는 꼴이 되었어요!”
“누님. 저기요?”
그제야 카일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걸 확인한 레아였다.
아앗! 하고 탄식을 흘린 그녀는 바로 제 동생을 놓아주었다.
덕분에 카일이 지옥의 문턱에서 겨우 생환할 수 있었고 말이다.
“일단 어머니, 그리고 누님. 두 분까지 오실 줄은 몰랐어요.”
“원래는 안 오려고 했단다. 그런데 네 누나가 바깥 구경이나 좀 하자고 해서.”
“어머니는 제국에 가보신 적이 없었잖아요! 제국도 나름 괜찮은 곳인데.”
두 여성이 다른 이들보다 늦은 이유는 다름 아닌 제국 구경.
그래도 여인들이라고 감성적인 부분이 존 나센 남작이나 리어보다는 풍부했던 것 같다.
“막내야. 그래서 얼마나 다친 거니?”
걱정이라는 듯 남작 부인이 카일의 손을 붙잡는다.
누가 보면 툭 치면 쓰러질 듯 비실비실한 아이가 병에 걸린 걸 걱정하는 모습 같다.
실상은 제국 10강도 웃으면서 상대하는 나름 괴물인데 말이다.
“어머니. 저 진짜 심하게 다친 거 하나도 없어요. 그냥 피만 좀 흘려서 무리하면 몸에 좋지 않을 수 있으니 휴식만 취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문제라는 거란다. 막내, 네가 하루라도 단련을 빼먹으면 안 되는데.”
“맞아. 어머니 걱정대로, 카일 너는 꾸준히 운동을 해야 한단 말이야!”
저기, 자꾸 이러시면 마치 제가 누구에게 쥐어터지고 온 것 같잖아요.
실상은 실컷 팰 거 다 패고 나중에 또 맞자면서 보내준 건데.
“아버지가 막 걱정은 안 하셨니?”
“오라버니가 화는 안 내셨고?”
“걱정은 좀 하셨어요. 그리고 형님이 화를요? 아닌 것 같던데요?”
“그래? 이상하네. 막내, 네가 단련을 쉬어야 한다는 걸 아셨다면 아버지도, 오라버니도 가만히 계실 분들이 아닌데. 그렇죠, 어머니?”
“네 말이 맞구나, 레아. 네 아버지는 몰라도 리어라면 그럴 수도 있지.”
“….”
뭔가 이상하다. 다친 걸 걱정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운동 못 하는 걸 걱정하는 눈치다.
오죽하면 ‘저 당장이라도 운동할 수 있습니다!’ 하고 나가서 중량이라도 쳐야 할 분위기였다.
*
둥! 둥! 둥!-
뿌우우우!-
며칠 후, 동쪽 한 곳에 위치한 넓은 평원.
그곳에 두 개의 거대한 무리들이 양쪽에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쪽은 제국의 깃발을, 다른 한쪽은 늑대를 수놓은 깃발을 휘날린다.
구성을 이루는 병종도 다르고 생김새도 조금씩 다르지만 이것 하나만은 똑같다.
오늘 마침내 결론을 내리기 위해 양측이 집결했다는 것.
먼저 배치를 끝낸 쪽은 동쪽의 가한이었다.
“음.”
내리쬐는 태양 아래 창칼이 번뜩인다.
말들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투레질을 한다.
굳은 입술 사이로 긴장감에 젖은 숨결들이 흘러나온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다. 싸우기 알맞고, 승리가 확실한 날이다.
오늘 제국군을 경계로 몰아붙이고 가한으로서 그 이름을 만천하에 알릴 것이다.
저들이 10강이라는 칼로서 부족들을 압박했으니 응당 똑같이 칼로 갚아주리라.
가한은 그리 생각하며 제국군을 바라보다가 제 전사를 하나 불렀다.
“보르후.”
“예, 가한.”
“전투를 치르기 전에 적당하게 사기를 올려야겠다.”
그러자 그의 말을 들은 전사가 섬뜩한 안광을 번뜩인다.
“하명만 하시길. 곧장 나아가 10강의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쯧쯧.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전력 손해를 보는 짓을 왜 하겠느냐. 그냥 적당하게 강한 놈을 보내서 놈들을 자극해라. 10강들도 제 수준이 아님을 보고서 기사들을 내보낼 터. 거기서 승리하면 전사들의 사기가 올라갈 것이다.”
보르후라 불린 남자는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허면 바타르 부족의 전사들 중 하나를 내보내겠습니다. 저보다야 못 하지만 그래도 제 전사들 중에서는 충분하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좋다. 바타르 부족의 용맹함을 제국 놈들에게 알려주거라.”
“옛! 가한!”
얼마 지나지 않아 건장한 한 전사가 제국군 앞으로 말을 달려 나아갔다.
가한의 전사 수준은 아니어도 충분히 강자라고 할 수 있는 실력을 지닌 자였다.
이내 적당한 거리에 다다르자 그 전사는 바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위대한 전투를 치르기 전 먼저 칼을 부딪쳐볼 이가 없냐고 외치기 시작했다.
전투와는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행동 같으나, 나름 사기 진작을 위한 전략이다.
혹 적이 나서지 않는다면 아군의 사기가 당연히 놓아질 것이다.
상대가 나와도, 실력에 자신이 있으니 당장에 꺾어버리고 승리를 만끽할 것이다.
제국도 이런 행동에 맞서 당연히 나설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저쪽의 사기만 올려주는 꼴이니까 말이다.
잠깐 소란스럽던 제국군의 진영 사이로 마침내 도전자가 등장했다.
상대방을 확인한 동쪽 유목 부족의 전사는 얼굴을 찡그렸다.
제 앞에 나타난 이는, 이곳 전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웬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