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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전투종족-209화 (209/318)

전초전이 벌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초원의 지배자, 가한은 제국군 쪽으로 사자를 보냈다.

“제국은 들으라! 초원의 지배자이자 영광스러운 늑대들의 무리를 이끄는 가한이 전투 날짜를 알리노라! 당신들도 그 날에 맞춰 어디 한 번 역사에 길이 남을 싸움을 벌여보자!”

단순히 전투 날짜를 알리기 위한 목적만을 지닌 행위는 아니다.

제국을 도발하여 그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게 만들고자 한다.

제국도, 그리고 동쪽의 전사들도, 모두가 일격에 싸움을 끝내고 싶어 한다.

제국 입장에선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본인들에게 이득이 없다는 걸 안다.

출혈만 크고 얻는 것이 작은 전쟁을 지속한다면 제국의 경영만 어려워진다.

그리고 초원의 부족들도 역시나 한 번의 전투로 끝이 나길 원한다.

길어지면 그만큼 부족들이 동원되는 시간도 늘어나게 된다.

와중에 내부에서 반목이라도 일어나면 걷잡을 수가 없으니 빠른 것이 최고다.

“…에 이곳에서 멀지 않은 평원에서 맞붙을 것을 제안한다! 그대들이 제국의 진정한 전사들이라면 이 외침에 응당 화답할 터! 답을 기다리겠다!”

“….”

“이상이, 가한께서 보내신 내용입니다. 어찌 답을 하시겠습니까?”

적절한 선을 지키면서도 내용이 상당히 과격하다.

유일 황제국을 선포한 제국 앞에서 마치 동급의 집단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가한의 사자는 분명 저들이 크게 분노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물론 사자에게 해를 끼치는 짓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초원의 부족들조차도 절대 금기시하는 예의다.

덕분에 그는 평온한 얼굴로 제국 지휘부의 답을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군.’

당장이라도 제국 측에서 분노를, 그게 아니더라도 불쾌함을 드러낼 거라 생각했다.

여태까지 제국은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기고 그렇게 행동해왔다.

그리고 그 질서에 대부분의 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침묵하며 지냈다.

당장 초원의 부족 중 몇몇도 그런 방식으로 제국에게서 받아먹은 게 있지 않은가.

“제국 측에서 분노하면 자극하지는 말되 여유롭게 행동해라. 그리고 불쾌함만 드러낸다면 슬쩍 장작을 집어넣어라. 이를테면 승리는 달콤했느냐고. 혹 다친 10강은 없느냐고.”

가한이 내려준 이후의 행동도 제국이 ‘분노’ 하거나 ‘불쾌함’을 보이는 것. 이게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 제국 쪽 지휘부를 보니 분노도, 불쾌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무언가가 대단히 유감스럽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몇몇은 고개를 내저으며 혀까지 차고 있는 중이었다.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지? 가한께서 예상하셨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사자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슈렐리츠 대공이 슬며시 입을 연다.

“초원의 사자는 들으라. 듣기로 가한이라는 호칭은, 동쪽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에게만 붙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태 어느 누구도 감히 그 이름을 쓰지 못 했다고 했고. 맞는가?”

“제국인이 굉장히 잘 알고 있군요. 맞습니다. 가한이라는 호칭은, 동쪽의 늑대들 중에서도 가장 강하고 위대한 늑대만이 칭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호칭을 지금 그대들의 주군이라는 자가 쓰고 있다고.”

“이미 초원의 모든 부족들이 가한이라 모시고 있습니다. 내 주인을 욕보이려는 행태는 불쾌한 짓임을 알아주면 좋겠습니다.”

이 또한 제국 쪽의 적대감을 은연중에 끌어내려는 수작.

그럼에도 제국의 지휘부 중 어느 누구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저것들 대체 어쩌면 좋냐.’ 라는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알겠네. 가한에게 가서 전하게. 그쪽이 알린 그 날짜, 장소에 맞춰 나갈 터이니 그대들. 동쪽의 늑대들 역시 모든 전력을 이끌고서 나오라고. 힘을 아끼면 후회만 하게 될 것이라고.”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원하는 대답을 들어서 그런 것인지, 사자의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가한이라는 자도 그렇고 그 수하들도 그렇고, 초원 자체가 힘의 논리로 돌아간다.

승자의 말을 듣는 게 당연하고 패자는 도태되어 사라지는 게 맞는 곳이다.

그런 때에 건곤일척의 대혈전으로 승리를 거둔다면 완벽한 가한이 될 수 있을 터.

‘과연 그대들이 원하는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가한이 보냈다는 사자가 돌아간 이후, 지휘부는 회의에 들어갔다.

원래라면 대접전이 벌어질 며칠 후의 전투를 대비한 작전 논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의 내용들은 이러했다.

“대공 각하. 이제 어쩌시렵니까. 정말로 전력을 동원해서 그곳까지 나아가실 겁니까?”

“일단 약속은 약속이니 그리 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괜히 나아가지 않았다가 초원의 저 부족 놈들이 괜한 말을 하고 다닐까 걱정입니다만.”

“욕을 하고 다닐 부족이 남아있기는 할까, 저는 그게 궁금한데요.”

정말 그곳까지 전군을 이끌고 나아갈 필요가 있느냐는, 이상한 의문들.

전투를 치르고 전쟁을 승리하러 온 자들이 할 고민이 전혀 아니었다.

“대공 각하. 각하의 뜻은 어떠십니까.”

“…일단 말은 해두었으니 나가는 주어야지. 하지만 전투는 우리들의 것이 아니니 병사들 전부를 이끌 필요는 없어. 나와 지휘부, 그리고 여기 모인 10강들에 병력이 적당히 붙어도 적들은 충분히 이해할 걸세. 그 다음은, 그들에게 맡기면 되겠지.”

대공의 말에 지휘부 인원들과 10강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쩌다가 본인들이 주공도 아니고 조공도 아닌, 일개 병풍으로 전락한 것인지.

조금 자존심이 상하기는 하지만 상대는 일개 자존심 따위로 어찌 해볼 이들이 아니었다.

‘사람의 탈을 뒤집어쓴 괴물들.’

듣는 이에겐 실례가 될 수 있는 말이지만, 이게 딱 적당한 비유였다.

그 10강들조차 며칠 전 일만 생각하면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

“다음 전투는, 우리가 가져가겠습니다.”

자신감이 넘치다 못 해 오만하기까지 한 선언이었다.

제국 쪽이 일개 병사들이나 기사들만 모아둔 곳도 아니고 강자들이 전부 모였다.

거기에 그들을 이끄는 총지휘관은 제국의 검이라 하는 슈렐리츠 가의 대공이다.

그런 상황에서 뜬금없이 나타나서는 이제부터 자신들이 알아서 하겠다니.

“존 나센 남작님.”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하지만 어느 누구도 분노하거나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로건과 스로드는 놀란 목소리로 다가가서는 인사까지 건넬 정도였다.

“막내의 서신을 받고 왔습니다.”

그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남작은 곧장 대공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대공 앞으로 무언가를 쑥 내밀었다.

“이것이 무슨….”

가장 앞에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황제의 인장이었다.

확실하다. 슈렐리츠 대공이 그 인장을 헛갈릴 수가 없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잠시 황성에 들렸습니다. 우리가 이동하고 있다는 걸 알리는 게 맞는 것 같아서. 혹 알리지 않고 왔다가 막내 녀석이 뭐라고 할 것 같아서.”

그러니까. 오는 도중에 황성까지 들렀다는 이야기가 된다.

존 나센 남작령으로 카일의 서신을 보낸 것은 슈렐리츠 대공가에서 맡았다.

때문에 그는 그 서신이 언제 그곳으로 향했는지 상세한 보고까지 받았었다.

‘그 내용에서는 존 나센 측에 서신이 들어가고, 동쪽으로 오는 데에 아무리 빨라도 열흘은 넘게 걸릴 것이라고 했다. 한데 이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이….’

심지어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황제의 인장이 찍힌 서신.

그래. 대공에게는 무엇보다 그 서신이 중요했다.

황제가 존 나센 남작의 손에 딸려보낸 서신의 내용은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 그냥 이것들이 하고 싶다는 대로 따라줘라. -

-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다. 이 놈들 사람인 척 하는 괴물이다. -

이해했다. 아주 충분히 이해가 갔다.

세상 어떤 미친놈이 멀리뛰기로 대륙을 횡단할 생각을 하겠는가.

그 짓을 하다가 얼마 가기도 전에 다리가 터져버릴 것이다.

한때 제국 10강의 위치에 있던 대공 본인조차도 확신이 없는 짓이다.

지금의 10강들도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냐고 진절머리를 내었다.

그런 인간들이, 지금 전투를 자신들에게 맡겨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지금이야 부탁이지. 나중에 가면 부탁이 아니라 통보, 더 나아가 경고가 될 수도 있다.’

새삼 과거 북쪽과의 전쟁에서 저들이 어떤 자세로 임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제국군들 마냥 필살, 혹은 필승의 의지로 싸운 게 아니었다.

그냥 괜찮은 강자들이 계속 덤벼들어서, 그게 즐거워서, 가치가 있는 실력자들이어서.

북쪽의 사람들은 웃으면서 계속 상대해주었을 뿐이었다.

대공은 존 나센 남작을, 그리고 그의 장자이자 카일의 형이라는 자를.

뒤를 이어서 먼지 속에서 껄껄 웃고 호호 웃는 남녀들을 바라보았다.

‘…이번 기회에 아주 제대로 한 판 하려고 왔구나.’

왜 카일이 서신을 늦게 보내는 게 좋을 거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마법 통신으로 바로 알렸다면 제국군보다 먼저 동쪽으로 향했을 자들이다.

그리고 그 이후는… 글쎄. 풀 한 포기조차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황제 폐하의 지엄한 명령이니, 응당 따라야지. 좋을 대로 하시게.”

“감사합니다, 대공 각하.”

존 나센 남작이 감사 인사를 하고선 갑자기 물끄러미 슈렐리츠 대공을 바라본다.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나, 무슨 할 말이 남았나 싶은 순간.

“대공 각하. 과거 제국 10강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부끄럽게도 과거의 일이라네. 지금은 노쇠하여 검 휘두르는 것조차 어렵지.”

“그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확실히 관리가 좀 안 되긴 하셨군요.”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대공을 바라보던 남작이 리어를 부른다.

“리어.”

“예, 아버지.”

“대공 각하를 위한 단련법을 짜서 봐드려라.”

흔쾌히 자신의 제안을 받아주어서 무척 고마운 남작이었다.

그래서 그 감사의 뜻으로 아들에게 대공의 PT 를 청한 것이었다.

“음? 아니, 나는 정말 괜찮네. 당장은 지휘라는 임무가….”

“사양치 마시고 받으시길. 다 대공을 위해서입니다.”

남작이야 정말 대공이 걱정되어서 챙겨주려는 것뿐이다.

하지만 대공이 보기엔, 무시무시한 용 한 마리가 찾아와선 얌전히 말 들으라고 하는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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