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동쪽의 부족 연합이 치른 전초전은 제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사실 전초전이라 승리와 패배를 논하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
서로가 전력을 다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하는 전투.
탐색이 주가 되며 그걸 위해 서로 적당하게 패만 좀 까보는 것에 불과하다.
제국의 주 전력인 10강이나, 가한의 전사들이 나서지 않은 게 증거다.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인 것이 바로 조금 전 치러진 전초전이다.
그럼에도, 이왕 처음으로 맞붙는 거 패배보다는 승리가 더 좋다.
“….”
“….”
해서 이번 전초전을 지휘한 부족장들은 영 불안한 눈빛들이었다.
저 앞에서 모든 부족들을 힘으로 통합한 인물이 다가오고 있다.
스스로를 가한이라 칭하며 초원을 규합한 강자 중의 강자다.
어느 누구도 그 호칭을 쓰지 못 했으나 이제는 막을 수도 없는 존재.
“가한께서 당도하셨소!”
선두로 서있던 부족 전사들의 외침에 부족장들이 다급히 앞으로 향한다.
그리고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자신들의 가한을 맞이한다.
“가한이시여.”
“오는 길에 들었다. 제국과의 첫 전투에서 패했다지.”
오자마자 패배를 논하고 있다. 절대 좋은 상황이 아니다.
심지어 그는 제 주변의 전사들을 힘으로 굴복시키고 가한의 자리에 올랐다.
승리하는 쪽은 항상 그였고 패하는 자는 그에게 반하던 자들이었다.
그만큼 지금의 가한은 힘의 논리를 완벽하게 따르는 인물이다.
해서 부족장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가한을 바라보았다.
만에 하나 책임을 묻겠다고 할 시 어찌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을 숨긴 채.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가한이 부디 분노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패배는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 이 상황에 작은 승리도 우리에겐 절실한 법이지.”
“죄송합니다. 가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승리에 괜히 연연하지는 않겠다. 사활을 걸 이유도 없다. 오히려 저들이 이것으로 기세등등해졌으면 한다. 그래야 더 참혹하게 깨지지 않겠는가.”
가한의 외침에 부족장들이 안심이라는 표정으로 그렇다고 맞장구를 친다.
이미 힘으로 모든 부족들을 통합하고 또 초원에서 지워버린 남자다.
그 앞에서 무엇을 믿고 빳빳하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숙여야 살 수 있다.
애당초 힘의 논리에 의하면, 초원의 법칙에 의하면 이것이 맞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 패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강한 자 앞에서 약한 자는 무릎 꿇어 자비를 비는 것 외에 할 게 없다.
“그대들은 전사들을 쉬게 하고 앞으로의 전투를 준비하라.”
“옛! 가한!”
“가한의 명을 받듭니다!”
부족장들이 고개를 숙이곤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가한은 쯧, 하고 작게 혀를 찼다.
“가한.”
속내를 알아차린 것인지, 옆에서 커다란 도끼를 든 이가 입을 연다.
“저것들을 그대로 두실 요량이십니까. 어찌 되었든 패장들입니다. 마땅히 벌을 내려야 앞으로의 전투에서 다른 부족장들이 죽기 살기로 싸울 것입니다.”
“네 말도 일리가 있다, 체기. 하지만 당장 전초전 하나로 부족장들을 처리하기엔 이득보다 손해가 더 많다. 저들을 전장에서 이탈시키면 그 휘하의 전사들이 내 명령을 제대로 따를 것 같은가? 아니다. 분명히 시간을 끌며 불만을 보일 것이다.”
그러자 체기 히식 타부다이, 가한의 전사가 들고 있던 도끼를 붕붕 휘두른다.
“명령만 내리시면 그 전사 같지도 않은 것들을 전부 쳐죽이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어차피 저들은 제국군과의 전투에서 다시 선두로 내세울 것이다. 응당 패자들에겐 그 패배를 되갚을 기회를 주어야지.”
기회를 주었음에도 또 패한다면, 그 때는 처벌을 해도 아무 말도 하지 못 할 터.
힘의 논리만을 따르는, 승패를 목숨만큼 중요시 여기는 가한이지만 상황은 가릴 줄 알았다.
지금은 무엇보다 제국군을 격파하는 데에만 집중해야 한다.
“소치르를 만나러 간 톨가는 어디쯤 왔다지?”
“네르구이 부족의 그 톨가라면 조금 더 걸릴 겁니다.”
“아직도 친해지지 못 한 것이냐. 체기.”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 타부다이와 네르구이 놈들은 원래 적이었습니다.”
초원에는 수많은 부족이 있다. 그리고 그 부족들 중 사이가 좋지 않은 자들이 분명히 있다.
그 상황에서 힘으로 한 번에 규합을 하다 보니 잡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가한은 그 잡음을 자신의 방식으로. 힘의 논리로 완전히 찍어 눌렀다.
지금처럼 각 부족의 최고 전사들과 대결하여 승리하고 충성을 받아냈다.
그리고 그 결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를 갈던 자들이 이젠 한 주군 밑에 모였다.
여전히 서로 견제하고, 또 경계도 하지만 칼을 직접 맞부딪치지는 않는다.
그리 했다가는 자신들 부족에게 불리한 명분만 제공하는 꼴이 될 테니까.
“가한! 카마라그의 소치르와 네르구이의 톨가가 조금 전 도착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 하나가 방금 전 들어온 소식을 전한다.
그러자 오래 걸릴 거라고 했던 체기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네르구이 놈. 아예 늦어서 가한께 미운 털이 박혀야 했는데.’
체기의 속내를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
가한은 웃는 낯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없는 동안 소치르가 최선을 다해 제국군을 괴롭혔다.
적의 정찰대를 끊으며 눈과 귀를 막고 시간을 끌었다.
심지어 그 와중에 제국이 자랑하는 10강까지 부상을 입혀 패퇴시켰다.
‘역시. 내가 가장 신임하는 칼 중 하나답다. 소치르.’
그에 대한 치하를 하고 잠시 쉬는 시간을 준 후, 결전의 날을 대비토록 하려고 했다.
“…소치르?”
“가한.”
하지만 제 앞에 나타난 소치르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말에서 떨어져 구른 것 마냥 온몸에 먼지가 엉겨붙어있었다.
또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었는지 피로 범벅이 되어 있기까지 했다.
“송구합니다. 가한. 몸을 깨끗이 하려고 했으나 가한께 드릴 급한 소식이 있어 이리 무례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급히 전할 소식이라니.”
“제국 측에서 또 다른 전력을 동원한 것 같습니다.”
“10강이라 하는 놈들이 전부 몰려왔다는 걸 말하는 건가? 그것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않느냐.”
가한의 말에 소치르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아닙니다. 10강보다 더 큰 문제일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10강보다 더 큰 문제다?”
가한만이 아니었다. 소치르를 데리고 온 톨가와 가한의 옆에 있던 체기.
그리고 다른 가한의 칼들도, 모두가 소치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즉, 자네의 말은.”
마침내 소치르의 말이 다 끝났을 때, 가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를 압도적으로 밀어붙인 자가 처음 보는 청년이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가한.”
“무슨 이런 멍청한 말이! 가한! 이게 무슨 망신이랍니까! 가한의 칼이라는 자가 일개 청년에게 패했다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체기의 말이 맞습니다. 아무리 카마라그의 소치르라고 해도, 이번 일은 조용히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초원의 명예를 실추시킨 일입니다.”
칼들이 저마다 성토를 토해낸다. 모두가 가한처럼 철저하게 힘의 논리를 따르는 자들이다.
자신들의 강함에 그 누구보다 깊은 자존심을 지닌 이들이다.
그 앞에서 패퇴했다는 자가 말을 하고 있으니 분노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조용.”
하지만 가한은 제 칼들을 전부 침묵시켰다.
패배한 자의 핑계라고 하기엔 소치르 텡겐 카마라그라는 전사가 가벼운 이가 아니다.
마땅히 자신의 실수로 인한 패배였다면 부끄럽게 여기고 받아들였을 터.
지금처럼 주의해야 할 인물이 생겼다며 언급할 전사는 결코 아니었다.
‘제국이 그냥 나섰을 리는 없다고 여겼건만.’
혹시 10강 외에 또 다른 전력을 드러낸 것일까.
가능성이 아주 없는 말은 아니다. 제국은 동쪽의 대평원만큼 넓다.
그 넓은 곳에서 숨겨진 강자 정도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재미있는 싸움이 되겠구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이 패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동쪽의 늑대들은 인간 따위에게 결코 패하지 않는다.
비록 상처를 입고 쫓길지언정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상대방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그 혈관에 송곳니를 박아 넣어 마침내 승리할 것이리라!
*
한편, 제국군은 전초전의 승리로 사기가 올라있는 상태였다.
결정적인 대승은 아니어도 이 정도면 기 싸움에서는 유리할 터.
하여 출전한 병사들과 기사들은 물론, 슈렐리츠 대공도 기분이 한결 가벼웠다.
“…대공 각하!”
그런데 한창 귀환하던 와중에, 갑자기 10강들이 놀라서는 대공 곁으로 날아들었다.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고, 마나를 끌어올리고, 눈을 부라리며 전투 준비를 한다.
동시에, 하늘에서 무언가가 뚝 떨어져 내렸다.
콰앙!-
뿌연 먼지들이 강하게 일었다가 이내 잠잠해진다.
혹시 적의 기습일까? 잔뜩 긴장한 제국군과 10강들이 그곳만을 노려보는 순간.
“슈렐리츠 대공.”
먼지 사이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거기 계십니까. 슈렐리츠 대공.”
그 목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10강의 일원, 로건과 스로드.
공통점이 있다면 둘 모두 존 나센을 방문했었다는 것이었다.
“잠깐…. 로건 형님. 방금 이 목소리?”
“로건 경. 스로드 경. 아는 자인가?”
“들었던 목소리이긴 합니다. 그런데, 왜 동쪽에서 들리는 것인지….”
그들의 의문을 풀어주겠다는 듯, 마침내 하늘에서 떨어진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공 각하. 존 나센 남작입니다.”
“존 나센 남작? 잠깐. 존 나센 남작이라니? 북쪽에 있을 사람이 여기 왜 있단 말인가?”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는데….”
콰앙!- 쾅!-
그러는 사이 하늘에서 사람들이 계속 떨어진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 같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세상에서 내려오는 상상 속의 존재 같기도 하다.
“슈렐리츠 대공.”
그 사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존 나센 남작이 말한다.
“다음 전투는, 우리가 가져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