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은 탐색전이었기에 누가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중반쯤 접어드니 의외로 저 소치르라는 전사가 카일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와! 야, 이안. 저것 봐. 카일을 저렇게 몰아붙일 수 있다니, 대단한데?”
“황녀 저하. 그 주변에 다른 놈들이….”
“거기는 신경 끄고 저기나 집중해서 잘 봐. 마나를 거의 쓰지 않는데도 저 정도야. 너는 저렇게 할 수 있겠어? 유목 부족들이 믿는 구석들이 있었구나.”
“저, 황녀 저하.”
주변에 매복한 다른 전사들이 무척 신경이 쓰이는지, 이안이 계속 황녀를 부른다.
카일이 결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주변 청소를 하는 게 맞지 않냐고도 물었다.
하지만 황녀는 거기에 왜 자꾸 신경을 쓰냐고 오히려 이안을 타박했다.
어차피 저 소치르를 빼면 나머지는 말 수준에 지나지 않는 이들이라고.
그걸 왜 굳이 신경을 써서 이 중요한 싸움에 집중을 못 하냐고 말이다.
‘아니, 그래도 눈 먼 화살에 잘못 맞으면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나마 다행인 점은, 카일이 밀리고 소치르가 밀어붙이고 있다는 점.
유목 전사들도 본인들 쪽이 이기고 있으니 딱히 나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
덕분에 이안도 슬쩍 마음을 놓고 카일의 결투를 지켜보았다.
‘표독스럽기 짝이 없는 칼질이다. 집요하게 급소만 노리고 있어.’
소치르의 칼은 매서웠다. 마치 초원을 가르는 칼바람과 같았다.
도저히 피할 수 있는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계속 옥죄어 들어온다.
아무리 피해도, 아무리 막아도, 결국 칼끝을 좇다보면 똑같은 결론이었다.
카일의 몸에 상처가 꽤 많이 생겼다. 특히 팔에 난 상처가 꽤 크다.
그나마 카일이 최대한 피해를 줄인다고 줄인 게 저 정도다.
존 나센 남작이 말했었다. 존 나센 사람도 결국 사람이기에 승리만 할 수는 없다고.
강철이 아니기에 싸우다가 다칠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여태까지 카일이 패한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오늘은….’
패배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패배는 절대 할 리 없다.
다만 승리로 가는 길이 평소보다 배는 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녀 저하의 반응은 어떠하지?’
평소에는 도저히 어디로 튈지 모르는 왈가닥 황녀 같지만, 그녀 또한 제국 10강이다.
자신은 여전히 닿을 수 없는 고강한 경지에 다다른 실력자다.
그녀가 보기에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면 그녀 또한 반응이 좋지는 않을 터.
“히야… 좋겠다, 카일. 나도 저렇게 싸워보고 싶었는데… 나도 싸울 줄 아는데!!”
“….”
황녀를 살핀 이안은 그만 생각하는 것을 관두고 말았다.
군침이 고인다는 듯 연신 침을 꼴깍이는 게 기가 막혔다.
이안 본인이 보기엔 그야말로 살 떨리는 생사결의 한 장면인데.
황녀가 보기에는 뭔가 좀 다른 모양이었다. 카일을 걱정하지도 않았다.
둘 사이가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았는데 저래도 되나 싶었던 순간.
‘검?’
여태까지 카일이 검을 들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아카데미 1학기 초반에 자신 때문에 결투에 휘말렸을 때조차 맨손으로 임했다.
당시에는 상대방에게 엄청난 치욕을 준 것이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맨손으로 임해준 것조차 엄청 대우한 것이었다.
존 나센을 생각해보면 새끼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것으로 끝냈을 것 같으니까.
아무튼 그 카일이, 뒤로 훌쩍 물러나서는 검을 뽑아들었다.
카일에게 듣기로 자신은 검을 제대로 다뤄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아무리 무투술이 뛰어난 자도 병기를 다루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카일을 얕보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만, 아주 조금은 걱정이 될 뿐.
‘…뭐야.’
하지만 이안은, 곧 자신의 걱정이 기우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저, 저런 공격이 가능하다고?! 아니, 그 전에 어떻게? 검로가 보이지도 않았어!’
소치르의 칼은 여전히 정확하고 매서웠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조차 없이 상대를 완벽하게 몰아붙이는 공격.
저기에 자신이 휩쓸린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런데 카일은, 그런 소치르의 공격 사이로 단 한 번의 찌르기를 가했다.
그 순간 그렇게나 완벽하던 소치르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단순하게 ‘강하다.’ 따위의 말로는 부족할 지경이다. 저건 그냥 본능대로 따른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완벽한 순간에, 완벽한 공간을 만들어낼 수가 없다.
‘미, 밀린다. 저 남자가 밀리고 있어. 그렇게나 매섭던 자가, 계속해서 밀린다.’
카일의 동작은 너무나 깔끔했다. 아니, 깔끔하다 못 해 단조로울 지경이다.
하지만 그 공격의 끝은 세상 무엇의 첨단보다도 훨씬 더 날카로웠다.
닿으면 베이는 수준이 아니라, 이미 닿기도 전에 베이고 찔릴 지경이다.
“…미쳤네.”
조금 전까지는 깔깔 웃으며 재미있어 죽겠다는 반응을 보이던 황녀.
그녀마저도 지금은 미소를 완전히 거둔 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강자로서 지니는 투쟁심, 그리고 강자이기에 느낄 수밖에 없는 긴장감.
황녀는 그 모든 것을, 카일의 결투를 보며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카일 대신 싸웠다면 어땠을까?’
본인의 무투술이 최고 수준임은 확실하다.
이건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다른 10강들도 인정한 객관적인 부분이다.
그럼에도 저 소치르라는 전사와의 결투를 예상해보면, 썩 좋지가 않았다.
못 해도 팔 하나는 내어주어야 치명타를 꽂을 수 있을 것 같다.
혹은 아예 승부를 보기 위해 자신도 치명상을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
그만큼 저 유목 전사의 수준은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전사를, 카일은 단 몇 번의 검로로 완전히 휘어잡고 있었다.
‘진짜… 양보 못 해. 무조건 양보 못 해. 저런 남자를 포기할 수는 없어.’
황녀, 율리카가 알게 모르게 경쟁심을 다시 한 번 불태우는 사이.
이안은 눈살을 한 번 찌푸리곤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본인들의 대장이 이길 것 같다가, 이제는 패할 것 같으니 다들 눈치를 보면서 화살을 날리려고 준비 중이었다.
이 성스럽고 중요한 결투의 한 가운데에 똥물을 뿌리려고 하고 있다!
“기억해라, 이안. 명예로운 전투에 방해를 가하는 놈들은, 철저하게 깨부숴야만 한다. 그것은 싸우는 모든 이들과, 앞으로 싸울 모든 강자들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존 나센 남작이 해주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더는 두고 볼 수가 없다. 이 중요한 전투에 훼방을 놓으려고 하다니.
이것을 좌시한다면 존 나센 남작의 문하생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다.
나중에 남작이 자신을 때려 죽여도 할 말이 없게 된다.
타탓!-
“어엇!”
몰래 준비를 하던 유목 전사들이 사방에서 쓰러지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그냥 모조리 베어버렸을 테지만 이안은 그러지 않았다.
살심을 거두어서가 아니다. 누군가를 죽이면 전투에 방해가 될까 적당하게 제압만 하는 식으로 충돌을 최소화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 이놈!”
“닥쳐. 신성한 전투에 똥물을 끼얹으려는 놈들 주제에 떠들지 마라.”
존 나센 남작님께서 아시는 순간 너희는 가루가 될 거다.
아니, 가루라도 남기면 다행이지. 그냥 존재 자체가 없어질 거다.
이안은 그리 중얼거리며 전사들을 계속 때려눕혔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카일과 소치르의 전투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크헉! 헉! 커헉!!”
몸 이곳저곳에 붉은 피를 뚝뚝 흘리며, 소치르가 뒤로 물러선다.
카일 또한 그만큼이나 많은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다만 카일에게서는 큰 흔들림이 없는 반면에 소치르는 계속 비틀거렸다.
무엇보다 확연하게 다른 점은 표정에 있었다.
소치르가 질려버렸다는 듯 인상을 완전히 일그러트린 것에 반해.
“하아… 아, 대단하시네. 이 정도일 줄은.”
카일은 너무나 밝게 웃고 있었다.
어찌나 화사하게 웃고 있는지 누가 보면 오래된 친구라도 만난 거라고 착각할 정도.
“더 할까요? 더 할 수 있겠어요?”
“…미친놈.”
소치르가 입에서 검붉은 피를 울컥, 하고 뱉어낸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지만 이미 한계까지 몰렸다.
상대가 살수에 집중했다면 이미 승부는 진작 갈렸을 터.
소치르 또한 강자이기에 그 부분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오늘 초원에 이 몸뚱이가 스러지겠군.’
후우, 숨을 내뱉은 소치르가 칼을 고쳐쥐는 순간이었다.
“가도 좋습니다.”
“…뭐라고?”
“기분이 좋아서요. 이 정도까지만 하고, 나중에 다시 하죠.”
“뭐냐. 혹시 네놈도 한계인 것이냐? 어림도 없다. 오늘 이 자리에서 네놈을….”
“어쭙잖은 소리 그만 하고요. 당신도 알 텐데요? 누가 더 유리한지.”
카일의 말에 소치르는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그 말대로, 지금 한계까지 몰린 건 카일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가서 치료하고, 나중에 또 한 판 하죠. 어때요.”
“후회할 것이다. 우리 초원의 전사들은, 쓸데없는 자비심 따위 지니지 않는다.”
“마음대로 해요. 난 얼마든지 자비로울 수 있어요. 당신과 같은 강자와 또 싸울 수만 있다면.”
거기까지 말한 카일이 어쩔 거냐는 듯 소치르를 쳐다본다.
그에 소치르는 치욕스럽다는 듯 입술을 깨물면서도 뒤로 물러섰다.
기회가 주어졌으니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버, 버일러.”
이안에 의해 제압당했던 전사들이 겨우 몸을 일으킨다.
그들을 추스른 소치르는 초라한 행색으로 초원 너머로 사라졌다.
“…카일.”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이안이 다가왔다.
소치르도 그렇다지만 카일 또한 많은 부상을 당했다.
해서 정말 괜찮은 건가 한 번 말을 건네본 것인데….
“우리도 돌아가죠! 아, 이거 좋네! 저런 인간들이 있다니!! 심지어 저게 끝이 아니라니!”
피투성이가 된 채, 두 팔을 번쩍 들어올리며 환호성을 지르는 카일이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이안은 새삼 카일이 무섭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돌아가면 티샤 한 번 꼭 안아줘야겠어.’
말에 오른 카일은 제 목에 걸린 목걸이와 손가락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모든 부상을 막아주지는 못 했지만, 분명한 행운이 작용했다.
커다란 혈관을 피해간다거나, 근육 다발을 다 잘라내지 못 했다거나.
그런 식으로 티샤의 주술은 분명 조금 전 싸움에 확실하게 작용했다.
‘덕분에 몇 번 더 치고 박고 싸울 수 있었어! 아, 기분 진짜 너무 최고인데.’
서쪽이나 남쪽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환희. 그걸 동쪽에서 느낄 수 있다니.
이것은 마치 두고두고 방문하고 싶은 맛집을 찾은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