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의 부딪침으로 소치르는 확신을 가졌다.
강하다, 따위의 말로는 부족한 상대다. 저 어린 나이에 이미 높은 경지를 이루었다.
저 몸뚱이를 보아라. 제국 놈들처럼 물렁한 살덩이가 아니다.
철저하게 살육만을 위해 만들어진, 정교한 병기라 할 수 있다.
저기에 휩쓸리면 살점 하나 남기지 못 하고 짓뭉개질 것이다.
소치르는 곧장 쥐고 있던 활에 화살을 걸었다.
피해를 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시간이 필요하다.
말은 멀리 있는 것에 반해 상대방은 너무 가까이 있다.
투웅!-
시위를 놓자마자 활을 내던지고 말로 달려간다.
그러다가 그는 이를 악물고 말 위에 오르는 대신 칼을 붙잡았다.
도대체 어찌 되어먹은 놈인지, 그 짧은 사이에 지척까지 다가섰다.
이대로 말에 오르다가 머리채를 붙잡혀 그대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질 것이다.
“흐읍!”
찰나의 움직임으로 카일의 주먹을 피해낼 수 있었다.
다음은 자신의 차례다. 내지른 손을 다시 회수해야만 한다.
크게 칼을 휘두른다. 상대방이 칼의 범위 안에 있다.
베일 수밖에 없는 간격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베이는 감촉이 없었다.
‘무슨?’
몸을 돌린 소치르는 저도 모르게 하, 하고 탄식을 흘려야만 했다.
분명히 거리가 닿는 곳이었는데, 어찌 된 것이 상대방은 너무 멀쩡하다.
기껏해야 입고 있는 옷에 살짝 스친 수준에 불과했다.
‘대단한 자다. 많이 피하지도 않고, 거리를 정확하게 계산해서 물러났다.’
가히 초인적인 거리 계산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조금만 어긋나도 팔이 잘릴 텐데,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인간인지!
저 자는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두려움도 없는 것인가 싶다.
다행스러운 부분은, 지금부터의 공세는 자신의 것이라는 점이다.
초원의 늑대는 한 번 문 먹잇감은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그 어떤 거대하고 흉포한 사냥감도 계속 물고 늘어지며 지치게 만든다.
진절머리를 내고, 분노하다가, 결국에는 제 풀에 지쳐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초원의 늑대는 그렇게 적을 물고, 물고 또 물어 뜯는 것이다.
“후웃!”
중심으로 한 번, 사선으로 한 번, 다음으로 올려 베기.
검을 돌릴 필요도 없이 순식간에 고쳐 쥐곤 다시 내려 긋는다.
계속해서 상체를 노리는 모션을 취하다가 반대로 다리를 노리는 모습까지.
모든 게 단 5초 만에 이루어진 공격이었다.
눈으로 좇을 수 있는 수준은 이미 한참 지났다.
보고 반응하여 피하는 순간 이미 피가 뿜어질 것이다.
본능, 오로지 본능과 본인의 감각만으로 피해내야 한다.
한 번 말려들어가는 순간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
이리저리 상처만 늘어나다가 그대로 주저앉게 된다.
‘제법 피해내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일 것이다.’
우웅! 웅!- 부웅!-
칼의 속도가 더 빨라진다. 흡사 살아있는 뱀을 다루는 것 같다.
아래로 베는 듯 하다가 사선으로 칼을 휘둘러 가슴을 노린다.
날이 나가오는 것 같다가 칼등이 정수리를 노리고 내려온다.
카일은 이리저리 몸을 날리며 소치르의 공격을 피해냈다.
이전처럼 적의 공격을 파훼하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틈이 보이지 않는다. 저 사이로 들어갔다간 큰일 날 수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촤악!-
그 사이, 마침내 소치르의 칼날에 첫 번째 붉은 피가 묻어났다.
“….”
카일은 제 팔뚝을 한 번 살펴보았다.
분명히 피했다고 여겼는데 꽤나 깊게 들어갔다.
조금만 더 깊게 베였다면 팔이 덜렁거렸을 정도다.
이런 상처는 다른 강자들과의 싸움에서도 몇 번 나긴 했다.
하지만 그 때는 모두가 제 마나를 일으켜서 그 힘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와 반대로, 지금 이 소치르라는 자는 마나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순수하게 육체의 힘만으로 지금과 같은 커다란 상처를 내고야 말았다.
‘대단한데. 순간적으로 칼날이 닿을 수 있는 길이를 늘이기까지 했어.’
정확하게 계산을 하고 피해냈는데 상대방의 수준은 생각보다 더 뛰어났다.
이미 칼날이 보이는 대로의 공간은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 올 수 없는 곳, 그렇게 여긴 곳에서도 계속 날아든다.
한 번 피해내도 다음은 피하기 어렵다. 그 다음은 결국 맞아야만 한다.
마치 잘 짜인 톱니바퀴마냥 휩쓸리기 시작하면 벗어날 수 없다.
제국 10강들도 대단하지만 유목 전사들 또한 그만큼의 수준을 지녔음이 확실해졌다.
이제까지는 아무 것도 없이, 그저 육체만으로 충분했으나 오늘은 달랐다.
아주 조금은, 무언가 부족하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10강이 당할 만하네. 기습의 이점도 있었을 테지만, 확실히 강하다.’
카일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훌쩍 몸을 날려서 뒤로 슬그머니 물러섰다.
‘진짜 제대로 한 번 해볼 때가 되긴 했어.’
10강과는 전력을 다해 싸워본 적이 없다.
왕국 연합의 마티유나 남쪽 섬의 파도잡이가 있었지만, 10강보다는 아래였다.
솔직히 제대로 10강과 붙어보고 싶어서 황녀에게 슬쩍 제안도 해보았다.
돌아온 대답은 물론 예상대로, ‘불가능하다.’ 였지만.
그래서 여태까지는 맨몸으로 싸웠다.
병장기를 들어야 할 그 어떤 생각도 들지가 않았기에.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다른 방법으로 싸워도 될 것 같았다.
카일이 다다른 곳에 검 한 자루가 검집 째로 땅에 박혀있다.
지극히 평범한 검으로 보인다. 화려하지도 않다, 마나를 잘 먹는 강철도 아니다.
오히려 다른 검사들이 저 검을 들었다면 이게 뭐냐고 화를 냈을 것이다.
쓸데없이 무게만 무거워서 도저히 휘두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검이란 거, 한 번도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기는 한데… 뭐, 괜찮겠지.’
어깨를 한 번 으쓱인 카일은 검을 뽑아들었다.
손에 느껴지는 감촉이 무척이나 익숙하다. 정작 쓴 적이 없는데도.
그리운 느낌마저 드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것도 존 나센 저주인 걸까.
“우리는 존 나센이다. 다룰 줄 모른다고 해도, 다룬 적이 없다고 해도, 결국 다 다루게 될 것이다.”
어디 한 번 그게 맞는지 해볼게요, 아버지.
카일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검을 쥐고서 소치르에게로 달려들었다.
*
제대로 들어간 줄 알았는데 조금 얕았던 모양이다.
쯧, 하고 혀를 찬 소치르는 다시금 칼을 고쳐 쥐고 상대를 향해 내달렸다.
부상으로 인해 놀란 것인지 뒤로 물러섰던 상대도 다시 다가온다.
‘검을 들었다고.’
그러면 여태까지는 자신을 봐주고 있기라도 했다는 건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하마터면 팔이 잘릴 뻔한 주제에.
분노가 치민 소치르는 당장에 마나까지 일으키며 일격에 결투를 끝내려고 했다.
우웅-.
갑자기 오싹 소름이 끼치며 움직임이 둔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의 본능이 다급하게 외치고 있었다. 피하든, 막든 하라고.
여기서 틈을 노리려고 하거나 반격하려고 했다간 무조건 죽는다고.
그 찰나의 고민이 회피라는 경우의 수를 날려버렸다.
소치르에게 남은 것은 방어였고, 결국 그는 칼을 자신 쪽으로 당겨야만 했다.
콰앙!!-
“컥!”
그냥 정말 단순한 베기, 그게 상대방이 내놓은 전부였다.
화려한 기교나, 예기를 품은 속임수, 극강의 마나도 아니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베기 한 번에 소치르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무슨 이런 힘이….’
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바로 앞에 이미 적이 당도했다.
이럴 수가 없다. 아무리 빨라도 사람이 이리 빠를 수가 없다.
말을 타고 달리는 전사들조차 이 정도 속도는 나올 수가 없다!
카앙!-
“끄윽!”
손아귀가 찢어질 것 같다. 어깨가 빠질 듯이 아프다.
뿌득, 하고 악문 어금니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카가가각-.
힘겨루기에서 계속 밀린다. 자신의 칼이, 점점 제 앞으로 다가온다.
아무리 힘을 내도 떨쳐낼 수가 없다. 몸이 계속해서 뒤로 밀린다.
“그으으으!”
소치르는 젖 먹던 힘을 다해 상대의 검을 치워내고야 말았다.
그런데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분명 멀어져야 할 검이 다시 다가온다.
아직 본인조차도 힘을 휘두른 반발에서 벗어나지 못 했는데.
상대방의 검은 또 다시 제 눈앞까지 치고 들어왔다.
쾅!-
“크헉!”
어떻게든 이 공격에서 벗어나야만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카앙! 챙! 쾅!-
찌르고, 베고, 내려치는 검. 눈 한 번 깜빡이는 순간에 가해진 공격이었다.
부족 내에서는 물론이고 가한의 전사들 중에서도 가장 빠른 칼로 정평이 난 소치르다.
제국 10강조차 그의 칼 앞에 결국 무너지며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그런 자신이, 처음 보는 청년에게 속도로 밀리고 있다.
‘말렸다. 완전히 말렸어.’
어찌 버티고는 있다지만 강자인 소치르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이건 그저 패배를 잠깐 늦추는 것에 불과하다.
형세를 뒤집기 위해서는 이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했다.
마음을 정한 소치르는 있는 힘껏 마나를 일으켰다.
동시에 마치 제 팔 하나는 내어주겠다는 것처럼 안쪽으로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상대방이 내놓을 수 있는 선택지는 둘이다.
물러서거나, 아니면 막거나. 아마도 이런 수준의 강자라 하면 무조건 막으려 할 것이다.
소치르는 바로 그것을 노리고 있었다.
애당초 방어 따위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공격만을 위한 마나 제어다.
막으려고 하는 순간 큰 피해를 입고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게 될 것이다.
얼마 전 싸웠던 제국의 10강도 바로 이 수법에 중상을 입고 쓰러졌었다.
‘그래, 그렇게 막아라. 막아! 막다가 두 팔이 잘려나가는 거다!’
우우우웅!!-
한계까지 끌어올렸으나 내부에 그 힘을 거의 완벽하게 숨겼다.
이대로 한 번만 베어낸다면 여태까지의 열세를 단번에 꺾을 수 있다.
마침내 목표한 순간에 이르자 소치르는 칼을 힘껏 휘둘렀다.
절대 막을 수 없는 일격이다. 가한조차도 이것은 너무나 악독하다며 고개를 내저었었다.
미리 수를 읽고서 그냥 회피했다면 모를까, 막기로 했다면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슉-.
‘…어?’
그런 소치르의 앞으로, 별안간 검 끝이 튀어나왔다.
‘이게 뭔….’
전혀 알아차리지 못 했다. 반격을 하려는 모습도, 하다못해 기척도 없었다.
불가능한 각도, 불가능한 범위, 그리고 불가능한 힘과 속도다.
절대 나올 수 없는, 나와서는 안 되는 곳에서 뻗어진 단 한 번의 찌르기.
‘미친놈.’
소치르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