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201화 (201/318)

“놓아라, 이놈들! 이 멍청한 차가 놈들! 네놈들이 지금 무슨 짓을 벌이려고 하는지 모르는 거냐! 머저리 같은! 놓으란 말이다!”

게르 앞으로 끌어내진 수십 명의 부족민들이 고성을 내지른다.

그 앞에는 나이 지긋한 한 중년 남성이 이를 악문 채 서있었다.

“꿇려!”

전사들이 붙잡은 이들을 전부 앞에 무릎 꿇린다.

절대 꿇을 수 없다는 자들은 짓밟아서라도 기어코 땅바닥에 처박았다.

“크억!”

“컥!”

자리에 엎어진 이들이 분하다는 듯 이를 악문 채 고개를 올린다.

수십의 전사들이 일제히 칼을 뽑은 채 자신들을 노려다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초원 외곽에서 사냥이나 하던 놈들이었다.

제국의 물건이라면 화살촉 하나까지도 쓸 수 없다고 외치던 자들.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터라 토벌하려고도 했던 천둥벌거숭이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이제는 역으로 자신들 위에 서있다.

생사여탈권을 쥔 채 칼을 붙잡고 눈을 부라리고 있다.

“이제부터 입을 여는 자는 산 채로 그 주둥이를 찢어주겠다.”

허풍이 아니다. 이들은 그러고도 남을 종자들이다.

그 사나움은 초원의 다른 부족들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을 정도.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 하던 자들이 대체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것인지 아직도 의문이다.

붙잡힌 이들이 전부 입을 다물자 전사들이 게르 앞으로 몸을 돌린다.

그리고 일제히 무릎을 꿇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촤악!-

“가한!”

오른쪽 눈에서 사선으로 기다란 검상이 그어진, 흉흉한 인상의 남자였다.

얼굴은 물론이고 손 곳곳에 새겨진 흉은 그의 치열했던 삶을 대변하는 듯 하다.

“전부 끌고 온 것이냐.”

“그렇습니다. 성인식을 치른 사내란 사내는 모조리 끌고 왔습니다.”

한 전사의 말에 가한이라 불린 이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묶여온 자들을 한 번 둘러보려는데, 앞에 앉아있던 중년 남성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하!! 크하하하!!”

“이놈이 감히, 가한 앞에서 무슨 무례인 것이냐!”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전사가 칼등으로 중년 남성을 내리친다.

한 번으로는 모자랐는지 연거푸 후려쳤음에도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크헉! 큭! 크하하! 컥! 으하하하!!”

“이놈이 그래도! 죽여 버리겠다!!”

이번에는 예기가 잔뜩 돋은 칼날 부분을 들이댄다.

한 번 휘두르면 순식간에 목과 몸통이 떨어질 것이다.

“그만.”

“가한! 감히 가한 앞에서 무례를 보인 놈입니다! 죽여야 합니다!”

“죽인다. 죽일 것이다. 하지만 죽이기 전에, 이야기 정도는 들어봐도 되겠지.”

그 말에 전사가 뜻을 따르겠다는 듯 검을 내리고 뒤로 물러선다.

물론 여전히 그 흉흉한 눈길은 그대로였지만 말이다.

“간만에 보는군. 부쿠. 꼴이 그게 무엇인가.”

“그래. 간만에 보는구나, 우르테게이.”

다시 한 번 전사들이 일제히 분노를 드러낸다.

감히 제 주군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대니 굉장히 화가 난 모양.

하지만 남자가 재차 손을 들어 말리니 모두가 침묵한다.

“주제에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는군. 가한? 정녕 사지가 찢겨 들개들 먹이가 되고 싶은가?”

“왜 그렇게 생각하나?”

“그 이름은 오직 푸른 늑대만이 쓰셨던 칭호다. 어느 누구도, 감히 그 이름을 쓸 수는 없어. 참칭이다. 네놈은 초원의 부족 전부를 적으로 돌린 것이다! 이 어리석은 자야!”

“초원의 부족 전부를 적으로 돌렸다. 과연 그런가? 누가, 어떤 부족이 나와 적이 되고 싶다고 하던가? 애초에 내가 적이라고 부를 만한 부족이 이제는 존재하는가?”

자신의 제안을 거부한 부족들은 모조리 씨를 말려 없앴다.

사내들은 모조리 죽이고 계집들은 영글지 않은 것까지 전부 처첩으로 삼았다.

초원 어디에도 이제 적대감을 표할 수 있는 부족은 남지 않았다.

있다고 해도 알아서 입을 다물고 침묵할 것이다. 그리고 초원의 법칙을 따를 것이다.

“약자는 강자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기억하라, 늑대의 후손들이여. 약자는 초원에서 풀 한 포기만큼의 가치밖에 지니지 못 할 것이다. 이 말을 잊었는가?”

“….”

“부쿠. 그대도 기억하지 않는가. 그 법칙에 따라, 자네 부족들이 가장 위에 있었고. 아아, 정확히는 제국과 붙어먹으며 강자인 척을 했던 것인가.”

그 말에 중년 남성, 부쿠라 불리는 자가 이를 악문다.

얼마 전까지 이 초원을 쥐고 있던 부족은 자신이 이끄는 에켄 부족이었다.

가장 커다란 세력, 가장 많은 전사들과 말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그것이 제국과의 거래로 인해 얻은 결과물이라는 건 부정하지 않겠다.

사실이니까. 그것을 아니라고 할 만큼 명예를 잃지는 않았다.

“초원의 법칙을 기만하던 너희 부족의 시대는 끝이 났다. 이제부터는, 푸른 늑대의 원래 뜻대로. 모든 것이 법칙대로 흘러갈 것이다.”

전사들에게 가한이라 불리던 남자, 우르테게이가 선언하듯 말한다.

그에 부쿠는 어이가 없다는 듯 다시 한 번 조소를 내뱉었다.

“그래서 더더욱 네놈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네놈 따위가 감히 가한? 미쳤구나.”

“푸른 늑대께서 하셨듯 나 또한 초원의 부족들을 굴복시켰다. 너나 네 부족처럼 초원의 규칙을 위배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바로 그것이 문제다. 푸른 늑대께서는 단순히 힘만으로 부족들을 무릎 꿇리신 게 아니었다. 그 인품과, 그 강인함과, 무엇보다 부족 전체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있으셨다!”

부쿠의 외침에 우르테게이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인품, 사랑. 그게 정말로 대답이었다고 보나? 틀렸다. 인품을 흠모한 이유는, 푸른 늑대의 사랑에 감동한 이유는 그 분이 강하셨기 때문이다. 약자가 그리했다면 미친 자의 헛소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초원에 약자 따위는 필요하지 않아. 거짓된 강자도 마찬가지다!”

“그래. 어디 한 번 해보거라. 마음껏 해봐라. 나와 내 부족이 왜 제국에게 그런 모습을 보였는지, 네놈은 머지않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저주에 가까운 말이었으나 우르테게이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너무 가소로워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제국? 땅덩이만 넓을 뿐이지, 애들만도 못 한 자들이다. 저들이 자랑하던 그 10강이란 자들을 봐라! 결국 피를 흘리면서 말머리를 돌렸다! 어디 더 오라고 해보라지. 아니! 전부 다 오라지! 결국에는 우리 초원의 늑대들에게 이리저리 쫓기는 자들이 될 뿐이다!”

할 말은 다 끝났다는 듯 우르테게이는 몸을 돌렸다.

그러자 전사들이 다가와서 이것들을 당장 죽여 없애자고 소리를 낸다.

“가한! 초원의 명예를 제국에 팔아먹은 자들입니다! 가장 참혹하게 죽여야 합니다!”

“이것들에게 분노를 내리지 않는다면 다른 부족들이 필히 우리들을 업신여길 것입니다!”

안 되는 일이지. 암, 안 되고말고. 어떻게 해서 이룩한 부족 통일인데.

과거 벗이었다는 옛 정에 이끌려서 그럴 여지를 줄 수는 없다.

초원의 규칙을 저버리고 감히 질서를 어지럽힌 자들이다.

가장 끔찍한 벌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가장 참혹하게 죽여야 한다.

“이것들 전부를 말에 거꾸로 매달아서 죽을 때까지 내달려라. 그 영혼이 저 푸른 하늘 위로 돌아갈 수조차 없도록 피란 피는 전부 흘려서 이 초원이 목을 축이게 하라.”

“가한의 명이시다! 당장 시행하라!!”

바닥에 꿇려져있던 이들이 악을 쓰며 저항한다.

하지만 곧 전사들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이후 말에 묶여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전부 쏟아내게 될 것이다.

“기억하라, 우르테게이. 네놈은 절대 가한이 될 수 없다. 푸른 늑대께서 말씀하셨다! 떠나간 당신의 벗을 기다리며 마침내 그 날이 찾아왔을 때 바삐 말을 달려 맞이하라고 하셨다! 우리 부족들은, 우리 초원의 늑대들은! 용을 기다리는 것이야!”

“닥쳐라, 이 제국의 개야! 당장 끌고 가!”

“푸른 늑대께서는 끝까지 용을 기다리셨다! 그리고 후손들에게도 말씀을 남기셨다! 하늘로 돌아간 용이 다시 돌아올 때, 너희는 나를 대신하여 오랜 벗을, 오랜 주인을 따르라고 하셨다!!”

전사들에게 거칠게 맞으면서도 부쿠는 끝까지 소리쳤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우르테게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들의 선조, 푸른 늑대. 그가 남긴 전승이 하나 있다.

오래 전 하늘에서 용이 나셨으니, 그 분이 다시 돌아가시고 늑대들은 그 날을 기다린다고.

누군가는 그 용을 보고 하늘에서, 혹은 먼 곳에서 올 누군가라고 여겼다.

하지만 우르테게이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푸른 늑대가 말한 용이란, 진정한 이 초원의 주인을 뜻하는 것이다.

전승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 강력한 힘으로 부족들을 한데 모으는 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미 초원의 모든 부족들이 자신들 차가 부족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남은 것은 제국과의 일전, 그리고 그들의 영토로 진격하는 일이다.

그들에게 10강이라는 강자가 있다고 한들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초원에는 그들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강인한 말이, 가장 용맹한 늑대가, 가장 빠른 매가 있다!

‘오너라, 제국의 개들아. 늑대의 후손들이 마침내 몸을 털고 일어섰다. 하늘에서 내려온 용이 다시 사라진 이래, 우리 늑대의 후손들은 약속을 지켰으나 더는 그러지 않겠다! 초원을 지배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용의 그림자가 아니라 늑대들이니라!’

*

툭-.

“…리어.”

“예, 아버지.”

서신을 다 확인한 존 나센 남작이 제 아들을 부른다.

“가장 잘 치는 이들로 해서, 몇 명 준비시켜라.”

“가장 잘 치는 이들이라 하시면… 중량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남작은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서신을 리어에게 내밀었다.

막내에게 온 서신이다. 마법 통신이 아니었기에 시일이 좀 걸렸다고 한다.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 전에 보낸 것 같은데, 무슨 내용인 것일까.

“….”

뿌득-.

그 어떤 일 앞에서도 감정 표현을 극도로 자제하던 리어다.

심지어 제국의 아카데미를 다닐 때조차 한 번도 포커페이스를 깨트린 적이 없다.

그런 그가, 지금은 이를 갈면서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다 봤느냐.”

“예, 아버지.”

리어의 대답에 남작은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선다.

“허면 준비시켜라. 중량 말고. ‘사람’ 을 가장 잘 치는 자들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