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주요 거점을 점령하면 되는 서쪽의 왕국 연합이나, 통행에 핵심이 되는 섬을 취하면 되는 남쪽의 독립 영주들과는 다르다.
부족들이 있는 곳이, 말과 양을 기르는 곳이 곧 그들의 영토이다.
그리고 그 영토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항상 먹일 풀을 따라 이동한다.
때문에 동쪽의 유목 부족들에겐 영토라는 개념이 확실하지가 않다.
바로 그 때문에 제국이 동쪽에 큰 매력을 지니지 못 했다.
점령하고 싶어도, 굴복시키고 싶어도 그러기가 너무 힘들다.
부족 전부가 거칠고 호전적인데 사기를 떨어트릴 만한 도시 점령은 불가능하다.
일단 땅이 넓은데, 정작 가장 중요한 농작물 재배에는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니다.
단순히 영토만 넓힌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니다. 생산적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곳을 차지하기 위해 흘린 피와 목숨이 헛되지 않는 것이다.
“이곳에 정규 군단을 밀어 넣을 줄은 몰랐군.”
슈렐리츠 대공이 말 위에 올라 너른 평원을 살펴본다.
제국 입장에서 이번 전쟁은 딱히 반가운 일이 아니다.
얻을 게 확실한 서쪽 왕국 연합, 그리고 남쪽 섬들과는 다르다.
속된 말로 손해 보는 장사다. 자존심을 챙기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에켄 부족도 우리와 부딪쳐서 이득을 볼 게 없음을 알기에 저자세를 보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번에 가한을 칭한 차가 부족이 제정신이 아니긴 합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것인지 모르겠어. 얻을 것도 크지 않은 것에 이런 짓을….”
대공이 혀를 차자 가만히 옆에 대기하던 카일이 슬쩍 입을 연다.
“그런 대의 같은 거 말고, 그냥 갑자기 힘을 가지니 그런 걸 수도 있습니다.”
“힘을 가져서 그렇다고?”
“원래 인간이란 게 그렇지 않습니까. 강하면 그 힘을 주변에 휘둘러보고 싶죠. 그리고 주변에서 겁을 먹고 고개를 조아리면 본인이 무슨 대단한 존재라도 된 것처럼 으스대고. 그러다가 결국 큰 사고 한 번 치는 거 아니겠습니까.”
대표적으로 동네 양아치들이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본인들 수준을 몰라서 나내다가, 언젠가 된통 깨지는 날이 오곤 한다.
“황녀 저하와 다른 10강들은?”
“곧 도착한다고 합니다. 1진으로 먼저 5황녀 저하와 로건 경, 스로드 경, 그리고 에리히 경과 군터 경이 온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2진으로 다시 온다고 전해왔습니다.”
부관의 말에 대공이 으음, 하고 침음을 흘린다.
제국 최고의 전력이라 할 수 있는 10강 중 6명이 동쪽으로 집결한다.
그 뒤를 이어 나머지 4명 중 셋이 또 지원 대기 중에 있다.
그만큼 이번에는 동쪽을 확실하게 정리하겠다는 황실의 의지가 강렬했다.
‘제국에게 정식으로 작위까지 받은 에켄 부족의 씨를 말렸으니 그럴 만도 하지. 차가 부족과는, 가한을 칭했다는 그 자와는 결코 화합할 수 없음을 느끼신 거다.’
유목 부족들 사이에서 내려져오는 그들의 전설적인 존재, 가한.
그 이름을 쓸 정도라면 제대로 결심을 하고 나섰다는 뜻이 된다.
제국의 창칼을 전부 부러트리고 당당하게 동쪽의 패자가 되느냐.
아니면 잠깐 일어섰던 동쪽 초원의 한 줄기 돌풍에 불과하느냐.
그에 대한 결과가 조만간 판가름이 날 것이었다.
“대공 각하.”
카일이 슬그머니 나서서 슈렐리츠 대공을 부른다.
여기까지 그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었으니, 이제 본인이 원하는 걸 달라는 뜻.
그에 대공은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명령을 내렸다.
“카일 존 나센. 이번 동쪽 원정의 총사령관으로서 명령을 내린다. 그대는 5황녀 저하께서 도착하시는 즉시 그 분과 함께 행동하며 적들의 소규모 게릴라 부대를 정리한다.”
“보조로 제가 데리고 온 이안을 동행시키고 싶습니다. 각하.”
“좋다. 그리고 이후로는 제국 군단에 부딪치지 않는 선에서 독자적인 행동을 허락한다.”
제국 10강, 거기에 황녀를 전선에서 빼서 호위도 없이 움직이게 하겠다니.
몇몇 지휘관들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함부로 입을 열지는 못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슈렐리츠 대공이 그런 말을 했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터.
“대공 각하. 혹 황녀 저하께서 적들을 끌어내면 다른 10강 분들이 요격하는 계획입니까?”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법한 부분이다.
로저스를 패퇴시킨 자가 있으니 그 자부터 잡아 없애는 게 좋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강자도 물 수밖에 없는 미끼를 던지는 게 당연한 일.
“뭐랍니까. 그딴 짓을 왜 해요.”
하지만 옆에 서있던 카일이 바로 인상을 찌푸리자 자동으로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대꾸라도 하는 순간 산 채로 찢어버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때려잡다보면 대장이 기어 나오겠죠. 그러면 그 대장도 때려잡고, 그러다보면 결국 그 가한이니 뭔지 하는 놈도 본인 애들 상하는 게 싫어서 오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긴 한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었다면….”
지휘관 중 한 명의 말을 대공이 손짓으로 끊어냈다.
그 문제에 대해서 더는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분명한 뜻이었다.
“아무쪼록 그대의 활약을 기대하겠네, 카일. 적들의 소규모 부대를 더 빨리, 많이 잡아낼수록 본대가 움직이는 속도도 빨라질 거네.”
“그래야 적들도 마음이 다급해져서 전장으로 달려올 테고, 전쟁도 그만큼 일찍 끝나겠죠.”
카일도 대공만큼이나 이번 전쟁이 빨리 마무리되었으면 한다.
제국의 재정 문제이니, 인적 자원 피해를 걱정해서? 설마. 그럴 리는 없다.
그보다는 너무 늦으면 다른 여자들이 눈에 불을 켠다는 게 컸다.
‘하필이면 황녀가 여기 있잖아. 성녀님까지 은근히 초조해하고 있는데, 한 달 내로 안 돌아가면 무슨 이유를 대서라도 쫓아오려고 할 거야.’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선 카일 본인도 걱정을 하고 있었다.
과연 황녀가, 그 어떤 방해도 없는 이 상황을 넘어가려고 할까.
*
역시, 이럴 줄 알았지. 이게 기우가 아니었어요.
오자마자 대뜸 자신을 껴안은 황녀를 내려다보며, 카일은 한숨을 내뱉었다.
슬쩍 주변을 보니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안과 슈렐리츠 대공, 그리고 같은 10강들 외엔 자리한 이들이 없다.
괜한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서 난감해지는 일은 없을 듯 했다.
한숨을 내뱉은 카일은 슬쩍 입을 열었다.
“…뭐하고 계세요.”
마음 같아서는 그냥 밀어내고 싶은데, 보는 눈이 너무 많다.
그리고 상대는 어찌 되었든 황녀이지 않은가.
“안아주고 있어.”
“그러니까 갑자기 왜요.”
“연인을 보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해서.”
도대체 요즘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이야기를 듣는지 좀 알고 싶다.
이상하게 변하는 것도 그렇고, 안 그래도 직진만 하는 여자가 더더욱 직진만 하니 부담이다.
지금도 봐라. 대공에, 다른 동료 10강들에, 다 보고 있는데 대놓고 애정 행각이라니.
“나머지는 일 봐. 난 바로 카일이랑 움직일 테니까.”
그러더니 인사만 대충 하고 쿨하게 얼른 가자고 재촉하기까지.
다들 어이가 없는 눈치였지만 황녀이다 보니 뭐라고 말도 못 하는 눈치다.
“황녀 저하. 허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치지 말라는 말은 없다. 이것이 산책이 아닌, 전쟁임을 잘 아니까.
슈렐리츠 대공이 다른 10강들과 함께 사라지고 자리에 남은 건 카일과 황녀.
“…너는 안 가니?”
그리고 불쌍하게도 혼자 남겨져서 매우 난처해진 이안이었다.
“카일. 쟤는 왜 안 가?”
“쟤가 아니라 이안.”
“아무튼.”
“이안은 제가 데리고 다니면서 좀 보려고요. 부족하면 가르치기도 해야 하고.”
“으음… 실력이 좋다는 건 인정하겠는데, 꼭 지금 그래야 해?”
이 황녀님이 진짜. 지금 우리가 뭐 데이트라도 온 줄 압니까.
우리들이 얼마나 적들을 섬멸해주느냐에 따라서 본대 움직임이 달라져요.
그리고 운이 좋다면 그 소치르인지 뭔치인지 하는 것도 잡고 말입니다.
“아쉽네. 너랑 데이트하려고 했는데. 전장에서 데이트라니. 좋잖아?”
“황녀님, 제발 좀.”
“농담이야.”
아무리 본인이 제멋대로라고 해도 전투를 앞에 두고 그런 짓은 안 한다고.
설마 그걸 믿었냐고 웃으면서 카일의 어깨를 콕콕 찌르는 황녀였다.
그런데 문제는, 정말 그럴 만한 위인이라서 순간 믿었다는 점이다.
“우리 셋이 움직이는 거야?”
“네. 이 정도면 단순한 정찰대로 보이겠죠. 기마술에 자신이 있는 적들로서는 낚아채기 딱 좋은 수준으로 보일 겁니다.”
“으음. 하지만 반대로 함정이라고 여길 수도 있잖아?”
“우리 뒤에 아무도 없음을 안다면 함정이라고 생각해도 무조건 접근합니다.”
유목 부족의 특징들은 오는 길에 슈렐리츠 대공에게 몇 번이고 들었다.
초원의 늑대들처럼 사냥감을 관찰하며 그 약점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약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어린 아이마저 칼을 들 정도라고 했다.
그런 수준이라면, 누가 봐도 단순한 정찰대는 무조건 물 것이라고, 카일은 생각했다.
‘그리고 안 물면, 역으로 나랑 황녀에, 이안까지 몰려가서 게릴라 하는 놈들을 잘근잘근 조지면 그만이지. 어차피 알아서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어.’
카일이 원하는 것은 딱 하나다. 제국 10강을 꺾었다는 소치르라는 전사를 끌어내는 것.
게릴라 전법의 와해? 딱히 관심 없다. 제국 군단의 피해? 안타까운 일이지만 전쟁 중이다.
너무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이 전쟁은 카일 본인과 아무 상관도 없다.
그럼에도 나선 것은 확실하게 원하는 것이 있기에, 그래서 허락한 것이다.
전쟁은 결국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대의? 명예? 결국 다 핑계다. 너도 나도 이득이 된다 싶으면 싸우는 거다.
거기서 원하는 거 취하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얼른 나타나라. 제발 내 손에 잡혀라. 시간 끌면 무서운 분들 오신다고.’
아마 지금쯤이면 자신이 정성스레 쓴 서신이 도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있을 일은… 음, 너무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는 게 바보짓이다.
“가자, 카일. 얼른 가야지! 야! 아니, 이안? 너도 잘 따라와.”
“네, 황녀 저하.”
“너 싸우는 모습 보고 별로면 혼날 줄 알아. 몇 번 봐줬는데도 성장한 게 없으면 혼나야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와중에 또 자존심이 전부 사라진 건 아니라서 그런지 바로 반응하는 이안.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다. 지금 이안이라면 어지간한 유목 부족 전사 따위 한 손으로도 상대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소치르라는 전사와 붙으면 어찌 되냐고? 그걸 왜 걱정하는가.
어차피 이안은 그 자와 붙어볼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그놈은 내 거야. 양보 못 해. 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