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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전투종족-197화 (197/318)

“재촉할 생각은 없네. 다만 빠른 답을 해주었으면 좋겠어.”

출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제국 입장에선 서두르는 게 맞다. 10강까지 패퇴시킨 놈들이 어디까지 선을 넘을지 모른다.

자칫 제국을 우습게 여기고 눈치를 보던 다른 유목 부족들까지 돌아설 수 있다.

동쪽은 광활한 대초원이 펼쳐져있다. 유목 부족의 강점인 기병 활용에 제약이 없다.

제국 군단이 많은 실전 경험을 지니고 있다지만 기병 싸움은 여전히 불안하다.

유목 부족들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말 위에서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으음….”

어차피 동쪽으로 갈 마음은 굳혔다. 군침이 싹 도는데 어찌 안 가나.

문제는 제국군의 소속으로 움직이느냐, 아니면 그냥 자유롭게 행동하느냐.

원래는 서쪽 때처럼 그냥 제약 없이 움직일 생각이었다.

싸움에 방해를 받는 것은, 루틴을 돌리는데 누군가가 개입하는 것과 같으니까.

하지만 황태자나 슈렐리츠 대공까지 은근히 원하니 살짝 고민이 된다.

‘어차피 형식상이기만 하고 실상은 아무 제약 없이 움직이게 해줄 것 같은데.’

제국군에 소속되어 움직이면 그들 입장에서 든든한 게 한둘이 아니다.

아예 같이 쭉 진군해서 거슬리는 모든 것을 지워버리겠다는 말이 된다.

거기에 더해서 제국의 위용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도 될 테고.

황녀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사돈 관계가 될 텐데 제국이 잘 되면 당연히 좋은 일.

‘그런데, 누구 밑에 들어간다는 게 진짜 거슬린단 말이지.’

아마 집에서 이 소식을 듣는다면 굉장히 실망할 수도 있다.

아들아! 막내야! 카일! 누구의 밑에서 하는 전투는 전투가 아니다!

우리가 주체가 되어, 우리가 결정하는 전장에서 싸우는 것이다!

가족들이 외치는 목소리가 벌써부터 귓가에 웅웅거리는 것 같다.

‘가족들이랑, 이 존 나센 의지만 설득이 되는 뭔가 있으면 좋을 텐데.’

대공이 말하기를 결정을 하면 전쟁성에 한 번 방문하라고 했다.

자그마치 슈렐리츠 대공가의 인장까지 직접 내어주면서 말이다.

제국 군단 지휘관도 아니고 제국 소속 공무원도 아니다.

심지어 어디 지체 높은 귀족 가문의 후계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전쟁성 방문이라니. 또 다시 제국 유일무이한 짓을 벌이는 느낌이다.

“뭘 그리 고민하고 있는 거냐.”

자리에 누워서 헥헥거리던 이안이 슬그머니 입을 연다.

오늘도 카일과의 대련에서 패배했다. 여전히 두들겨 맞는 중이다.

하지만 누가 주인공 아니랄까 성장력이 아주 무시무시하다.

얼마 전만 해도 단 15초도 견디지 못 했는데, 이제는 1분을 넘기고 있다.

‘괜히 주인공이 아니었어. 이 인간, 스펀지 같은 놈이야.’

실전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강자와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진다.

대부분의 패배자들처럼 졌다고 해서 잊으려고 하거나 배우지 못 하는 이가 아니다.

극복하고 더 나아간다. 그래서 더 강해진다.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이러니 아버지, 존 나센 남작이 직접 가르쳤을 것이다.

분명 무언가를 보았을 거다. 이안의 눈에서, 비록 존 나센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그곳 사람들에 어울리는 투기와 강렬한 열망을.

“이안.”

“듣고 있다. 아, 혹시 더 할 수 있냐고 묻는 거면 사절. 죽을 것 같아.”

“아니니까 걱정 말고요. 혹시 이번 학기, 제대로 할 생각 있었어요?”

“…뭐?”

“이번 학기부터 정신 차리고 공부할 생각 있었냐고요.”

저번 학기 때 이안의 성적은 그냥저냥이었다.

실습 부분은 몰라도 암기 과목들은 겨우 턱걸이.

그나마 머리가 아예 돌은 아닌지라 일어난 기적이었다.

“…그, 혹시 성적까지 트레이닝 할 생각이냐?”

“내 코가 석자인데 무슨 트레이닝을 해요. 그런 거 아니니까 얼른 대답.”

카일의 말에 이안이 끄응, 침음을 내뱉더니 눈을 감는다.

“솔직히 이번 학기까지는 암기 과목에 신경을 쓸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단련을 하고 싶다, 이거네요.”

“맞아. 괜히 늦장 부리다가 남작님의 가르침을 잊을 것 같거든.”

좋은 자세다. 물론 공부도 열심히 하는 게 맞기는 한데, 어쩔 수가 없다.

이안의 강점은 그의 신체와 끈기, 그리고 그 둘이 만나는 검술에서 나온다.

그게 개화하면 순식간에 엄청난 성장을 이루게 될 것이다.

“내일 시간 비워둬요.”

“…내일? 내일 언제.”

“오후부터 해서 쭉.”

“오후에 강의가 있는데….”

“빠져요.”

그러자 이안이 굉장히 난처한 모습을 보인다.

결석이 쌓이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건 그도 알고 있는 부분이다.

“아직 아카데미에서 쫓겨나고 싶지는 않은데.”

“한 번만 눈 감고 해요. 나도 그럴 생각이니까.”

“왜 빠지라고 하는지 이유라도 알려줄 수 있나?”

자리에서 일어난 이안은 살짝 불안한 눈빛이었다.

원래 이러면 ‘그냥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하라고 했죠?’ 하고 주먹을 들 카일이니까.

“사실.”

하지만 이번에는, 카일도 순순히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결석을 권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유 설명은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

“내일 같이 전쟁성 좀 방문하려고요.”

순간 이안의 표정이 멍해진다. 본인이 뭘 잘못 들었나 싶은 표정이다.

“…전쟁성?”

“네.”

“내가 아는 그 전쟁성?”

“그러면 전쟁성이 뭐 또 있어요?”

“아니, 그러니까… 너는 그렇다고 쳐도, 나는 왜?”

당연한 의문이다. 카일은 그래도 전투에서 세운 공이라도 있다.

하지만 이안은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일개 학생일 뿐이다.

그런 본인더러 전쟁성에 갈 준비를 하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한 번 확인해봐야죠. 그렇게 날을 갈고 또 갈고, 닿으면 베일 듯 시퍼런 예기를 돋게 만들었으니까. 그걸 제대로 휘둘러볼 장소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자신과의 대련만으론 수준을 알아보는 것에 한계가 있다.

생과 사가 오고가는 전장, 이안 같은 ‘검’ 은 그런 곳이 어울린다.

그리고 슬슬 풀 때가 되기도 했다. 존 나센 문하생을.

*

“환영합니다, 카일 존 나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쟁성의 요직에 슈렐리츠 대공가 인물들이 많다고 했던가.

그 말대로, 카일와 이안이 도착하자 바로 부장급 인물이 마중을 나왔다.

“슈렐리츠 대공 각하께서 말씀을 남겨두셨습니다. 카일 님이 오시면 바로 연락하라고.”

“곧 오시겠군요.”

고개를 끄덕인 카일은 슬그머니 전쟁성 내부 분위기를 살폈다.

평시라면 잠잠해야 할 곳이 지금은 꽤나 정신없는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과거 제국이 마무리하지 못 했던 전쟁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서로가 결정타를 먹여 두 손을 들게 만들려고 할 것이다.

“…분위기가 영 별로인 것 같은데.”

이안이 슬그머니 옆으로 와서는 걱정이라는 듯 중얼거린다.

아직 그에겐 현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남들이라면 왜 전쟁성으로 가는지, 스스로 이유라도 알아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안은 카일이 말해주겠지, 하고 생각하며 알아보지도 않았다.

“동쪽으로 출정이 있을 테니까요.”

“출정?”

“유목 부족들과 한 판 벌일 예정입니다.”

부장이 슬그머니 대화에 끼어든다.

동시에 카일더러 ‘저 학생은 누구입니까?’ 라는 눈빛을 해 보인다.

“이번에 같이 갈 친구입니다. 걱정은 하지 마세요. 실력은 제가 보증하니까.”

그러자 부장이 아하, 하고 더는 묻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돌린다.

오히려 당황한 쪽은 이안. 갑자기 같이 간다느니, 실력을 보증한다느니 말들이 나오니 당연히 그런 반응일 수밖에 없다.

“무슨 소리야. 전쟁성만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

“전쟁성 견학 시켜주려고 같이 가자고 했겠어요? 당연히 전장까지 가아죠.”

“아, 아니. 그러면 내 출석은….”

그건 마음 놓고. 이 형님이 다 커버해줄게.

네가 확실하게 실력만 보여주면 알아서 다 처리가 된다니까.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전쟁성 가장 깊숙한 곳까지 향하게 되었다.

마침내 안내가 다 끝났을 때, 그들은 커다란 회의실 앞에 서게 되었다.

“어서 오게, 카일 존 나센.”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에 앉아있던 인물이 카일에게 아는 척을 한다.

카일 또한 고개를 숙이며 한 번 본 적이 있는 이에게 인사를 건넨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관님. 저번에 황궁에서 잠깐 뵈었죠.”

“그렇지. 앉게. 슈렐리츠 대공 각하께서는 잠시 후에 오실 것이네.”

자리를 권한 장관은 앞에 놓인 각종 문건들을 살폈다.

대부분 출정에 관한 것 같았는데, 그 중 특이하게 생긴 무언가가 눈에 들어온다.

“장관님. 저건 뭡니까? 서류는 아닌 것 같고, 서신 같은데요.”

“…아. 이것 말인가? 자네가 말한 그대로야. 서신이지. 정확히는 동쪽에서 온 서신.”

“유목 부족들이 보낸 것이란 말입니까?”

“그렇지. 어제 도착해서 황태자 전하께서 먼저 보셨다네. 그리고 전쟁성으로 내리셨지. 이 서신을 보고 이번 전쟁을 어떻게 치러야 할지 잘 생각하라고 말이야.”

무슨 내용이기에 황태자 전하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일까.

카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서신을 볼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장관은 안 될 거야 없다며 카일에게로 서신을 내밀었다.

- 초원의 늑대들이 일어나…. -

어우, 감성 수준. 첫 문단부터 못 읽겠네.

“장관님. 이 서신, 무슨 내용이랍니까?”

“항상 그런 게 뻔하지 않은가. 우리가 제일 강하다, 나머지는 약하고 열등한 자들이다. 이런 식이지. 이번에는 다른 곳들까지 전부 싸잡아서 전부 겁 많고 약하며 멍청한 자들이라고 하더군. 그러면서 신의 분노가 있을 거라나 뭐라나. 기가 막힌 일이지.”

“…아하. 그렇군요. 본인들이 제일 강하다고요.”

흠칫-.

카일 옆에 있던 이안이 순간 몸을 떨었다.

‘방금 무언가 굉장히 위험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슬그머니 카일을 살핀 이안은 곧 착각이 아님을 깨달았다.

“재밌겠네요.”

카일은 웃고 있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반쯤 죽여놓고 싶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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