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195화 (195/318)

식사를 하면서도 가끔씩 카일을 몰래 살펴보았다.

새로운 메뉴들이 나올 때마다 흠칫, 몸을 떨면서도 아닌 척 하는 게 눈에 보인다.

그러다가 나랑 마주치면 바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는다.

‘다 보여요. 무슨 생각 하는지.’

카일을 반 년 넘게 옆에서 지켜보았다. 덕분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

아마 저 음식들을 먹으면서 이건 염분이 얼마이니, 이건 기름이 얼마이니.

남들이 듣는다면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할 생각들을 하고 있을 거다.

학기 초, 카일과 같이 지낼 때에는 카일이 유독 심한 줄 알았다.

그러나 존 나센 남작령에 다녀온 후로는 그 반대임을 깨달았다.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아주버님과 형님에 비하면 카일은 오히려 유도리가 있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호화스럽고 자극적인 음식은 카일도 거의 먹지 않았던 거다.

그걸 바로 지금, 카일은 평소 먹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먹고 있다.

나를 위해서. 나와의 데이트를 조금이라도 더 좋게 해주고 싶어서.

“티샤?”

고개를 들어보니 카일이 먹다 말고 나를 쳐다보고 있다.

두 눈을 깜빡거리는 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일까.

“무슨 생각을 그리 해요?”

“네? 아, 아.”

아무래도 생각이 너무 길었던 모양이다.

카일이 보기에도 이상했겠지. 포크를 손에 든 채 멍하니 있었으니.

원래라면 대충 얼버무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가 않다.

오히려 솔직하게 말해서 나도 저 사람 곁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고마워요.”

“네?”

“카일에 대해서 잘 알아요. 그리고 학기 내내, 한 번도 이런 식사 한 적 없잖아요.”

카페에 가서 디저트는 즐긴 적이 꽤 많다지만, 이런 적은 정말 없다.

시작부터 끝까지 귀족들이 즐길 법한 자극적이고 호화스러운 음식들.

심지어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조차 ‘이거 먹고 30분 뛰어야겠네요.’ 라는 말도 안 한다.

카일이 변한 것일까? 아니, 설마.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다만, 그는 나를 위해서 지금만큼은 평범한 연인처럼 있어주고 있는 것이다.

“괜찮겠어요? 이렇게 먹고도.”

“데이트잖아요. 데이트에서까지 식단 조절에, 운동에, 그랬다간 등짝을 맞아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네요.”

카일이 웃으면서 손을 내젓는다.

“물론 내일 운동 좀 더 해야 할 것 같긴 하지만요.”

역시, 역시 오늘만큼은 나를 위해 할애한 거구나.

미안하면서도 좋았다. 나중에도 계속 이래주었으면 좋겠다.

“좀 걸을까요? 아, 물론 운동하자는 건 아니고요.”

식사가 끝난 후, 카일이 산책을 권했다.

절대 운동은 아니라고 손까지 내젓는데 나도 모르게 웃을 뻔 했다.

“네. 좋아요. 같이 걸어요.”

슬며시 주머니에 손을 넣어 준비했던 선물을 만지작거렸다.

언제 주는 게 가장 좋을까. 어떻게 주어야 이상하지 않을까.

“조만간 또 어디 좀 다녀올 것 같아요.”

카일의 말에 순간 어디요? 라고 질문을 던질 뻔 했다.

어제 황궁에 다녀온 카일이다. 그리고 분명 황실과 무슨 이야기가 있었을 거다.

여기서 질문을 하면 그 일에 대해서 묻게 되는 꼴이다.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 건 실례라고 들었다.

“동쪽이에요.”

그런 내 속마음을 알아차린 걸까. 카일이 묻지도 않았는데 답을 해주었다.

아예 내가 궁금해 할 부분들은 전부 알려주려는 듯 했다.

“제국 동쪽 국경에 유목 부족들이 있다는 건 알죠?”

“네. 역사 시간에 들었어요. 그런데 이상하네요. 지금의 유목 부족들은 제국과….”

“친했었죠. 얼마 전까지는.”

“…그 말은, 이제는 아니라는 거네요.”

조만간 역사 강의의 내용 중 몇몇 부분이 바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갈까 말까 고민이었는데, 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생겼어요.”

“황제 폐하께서 부탁이라도 하셨나요?”

아무리 카일이라고 해도 황제 폐하의 부탁을 대놓고 거절할 수는 없을 거다.

존 나센 남작령의 직계이니 강제권은 없다지만 그래도 형식상 제국의 귀족이다.

거기에 황녀 저하까지 생각하면 폐하의 부탁을 내치기는 힘들 터.

“아뇨. 오히려 황제 폐하는 제게 알리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피곤하게 그럴 필요 있냐고.”

“아아.”

놀라웠다. 설마 황제 폐하까지 카일의 눈치를 살피실 줄은.

새삼 카일과 존 나센 분들의 위치가 다시금 느껴졌다.

“그런데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 재미난 소식을 들어서요. 안 갈 수가 없네요.”

카일의 두 눈동자에서 번뜩이는 무언가가 머물다가 사라졌다.

화가 난 걸까? 아니야. 저건 화가 났을 때 보이는 표정이라기보다는….

그래. 무언가 대단히 흥미로운 것을 봤을 때 보이는 것이었어.

예컨대, 이안이나 레토를 단련시킬 때 저런 눈빛을 보였었고.

“또 싸우러 가는 거네요.”

“싸우는 느낌이 나면 좋겠네요. 이전까지는 그냥 몸 좀 풀다 온 느낌이라서요.”

“아무튼 위험할 수도 있잖아요. 다치지 않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카일에게서 한 번, 그리고 존 나센에서 또 한 번 들었던 내용.

제국 사람들이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우리도 다 같은 사람이다.

병에 걸리면 아프고, 다치면 피가 나고, 상태가 심하면 죽는다.

그래서 더 강인한 몸을 지니기 위해 단련을 하는 것이라고.

‘카일이 저렇게 나설 정도라면 보통 일은 아니야. 저번에 있었던 서쪽 일보다 더 큰 일이겠지. 응. 그럴 거야. 그럴 확률이 아주 높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고민이 되던 부분이 자연스레 사라진다.

더는 고민만 하고 있을 수 없다. 해서, 카일의 손을 붙잡고 벤치 쪽으로 끌어당겼다.

“티샤?”

“잠깐 앉아 봐요. 카일.”

*

티샤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굳은 어조가 들어있었다.

그걸 느낀 카일은 왜요, 라는 질문조차 하지 않고 얌전히 앉았다.

여기서 질문을 하면 티샤가 굉장히 난처해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저, 이거.”

카일을 벤치에 앉혀놓고 한참을 고민하던 티샤가 비로소 입술을 뗀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카일의 손 위에 올려놓는데….

“억.”

순간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리고 마는 카일이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제 손 위에 올려진 건 다름 아닌 반지였으니까.

‘뭐지? 뭔데, 이거. 무슨 뜻이야. 뭐 있나?’

아무리 눈치가 좋은 카일이라고 해도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는 반지라 하면 정말 중요한 순간에 나오는, 일종의 예물 개념이니까.

그걸 자신이 아니고 여자 쪽에서 먼저 내어주니 더더욱 당황스러웠다.

“차, 참고로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카일!”

“아니라고요?”

“아, 저! 그… 너, 너무 과하게 생각하지는 마요. 그러니까… 네. 저번에 선물한 목걸이랑 비슷한 거라고 보면 될 거예요.”

저번에 선물한 목걸이라면… 아아, 그런 건가.

보호의 주술이 새겨진 목걸이. 덕분에 마티유와 싸울 때 조금 더 수월했었다.

마력 폭주처럼 이쪽의 힘을 강화시켜주는 그런 건 아니다.

싸움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염려하는 마음과 다치지 않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부상의 경우를 조금이나마 낮춰주었던 선물이었다.

“물건에 이렇게 주술을 새기는 게 어렵다고 들었는데.”

“별 거 아니에요. 그냥 매일 꾸준히 바람을 각인시키면 되니까요.”

바로 그런 게 어려운 거다. 정해진 기일이 없다. 될 때까지 해야 한다.

주술도 어찌 보면 육체 단련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편법이 없다. 강렬한 마음, 진한 바람으로 그것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제가 주는 선물이에요. 동쪽에 갈 때, 꼭 하고 가요.”

그리 말하다가 티샤가 아! 하고 급히 덧붙인다.

“무, 물론 손가락에 끼라는 건 아니에요! 그, 줄에 매달아서 목걸이처럼 해도 돼요! 그게 아니면 단순히 주머니에 넣고 다녀도….”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카일은 바로 앞에서 제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반지가 무엇인가. 손가락에 끼우라고 있는 게 반지다.

목에 걸어야 하는 거면 목걸이라고 부르겠지. 주머니에 넣고 다닐 거면 부적이라고 하던가.

“카, 카일?”

“저번 싸움에서 유용했어요. 이번에도 굉장히 큰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누군가의 바람은, 그 어떤 마법보다도 더 강렬하고, 더 뜨겁다고. 그렇게 말하곤 하니까요.”

운이 좋았던 건지. 아니면 티샤의 눈썰미가 예리했던 것인지.

반지가 조금의 여유를 남기고 손가락에 들어온다.

“고맙게 잘 받을게요, 티샤. 그것보다, 이거… 매일 받기만 해서는 안 되는데. 나중에는 제가 선물을 해줘야겠네요. 기대하고 있어요.”

그 선물, 이미 받은 거 같은데요.

저도 모르게 그리 답하려던 티샤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한다.

기회가 왔을 때 잡으라고 했다. 놓치는 자는 항상 후회하는 법.

“그 선물, 지금 해줄 수도 있지 않나요?”

“지금요?”

티샤가 카일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 그리고는 갑자기 제 팔을 벌린다.

“따라해요.”

“아.”

그제야 티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린 카일이었다.

따라서 팔을 벌리고 가만히 서있으니 티샤가 냉큼 안으로 파고든다.

그리고는 안에서 잠깐 부비적거리는가 싶더니 슬그머니 입을 연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예요?”

“절대 아니죠.”

품에 안아주고, 조심스레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마녀치고는 굉장히 소박한 소원인데. 더 나은 걸 바랄 줄 알았는데.

콩닥거리는 소리가 전해진다. 이게 자신의 심장 소리인지, 혹은 티샤의 것인지.

아니라면 둘 다의 것일 수도 있다. 엄청 빠르다. 이러면 칼로리 소모가… 아, 이건 아니고.

‘마음에 걸리는 점 하나.’

티샤가 준 것에 비하면 원하는 게 너무 작은 게 아닌가 싶다.

이렇게 안아주기만 하는 건 뭐라고 할까. 굉장한 무례 같기도 하다.

데이트다. 데이트인데 이러고 끝나면 누가 와서 뒤통수를 후려쳐도 할 말이 없다.

“카일?”

안고 있던 티샤를 아주 살짝 밀어낸다.

그러자 티샤가 이유를 묻듯 카일을 올려다본다.

“여기까지 했으니까 이렇게, 도 해야겠죠?”

한 번 한 일이니 두 번은 어렵지 않다.

미소를 지은 두 남녀가 천천히 입술을 포갠다.

첫 키스가 가장 달콤하다고 들었다. 그 말, 틀렸다.

그냥 언제, 어느 때고 해도 달달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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